나. 동굴유적
북한에서의 동굴유적은 상원 검은모루동굴유적 발굴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된 상원계 석회암지대에 있는 동굴이 주로 조사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수도인 평양에서 가까이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 이외에도, 평양의 역사성이 구석기시대까지로 올라가고 있다는 그들의 역사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가) 대동강유역
(가) 상원 검은모루유적
이 유적은 평남 상원군 상원읍 흑우리 검은모루(해발 117.58m)에 있으며, 석회석을 깨뜨리는 공사를 하던 중 짐승뼈화석이 출토되자 1966∼1970년에 조사하였다(<사진 3>). 북한학자들이 첫번째 조사한 이 동굴유적은 5개의 지층으로 구분된다.
그 가운데에서 맨 밑바닥의 Ⅰ층과 Ⅳ층이 뼈화석이 엉긴 층이며, 석기는 Ⅳ층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석영과 석회암을 감으로 하여 모루·망치떼기·부딪쳐떼기·직접떼기·외날떼기수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석기의 종류는 주먹도끼모양 석기(<사진 4>)·외날찍개 등인데, 이러한 석기들은 조금 더 고고학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보고자들은 동물화석의 종적 구성을 ①삼림성, ②초원성∼삼림성 초원성(큰쌍코뿔이), ③강·늪 가까이에 사는 짐승, ④열대∼아열대(원숭이<사진 5>·코끼리)의 4생태적 집단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동물화석을 북경 周口店의 뼈화석들과 비교하면서 민델빙기의 시대로 보고 있다.138)
그러나 보고서에서와 같이 Ⅰ층에서 출토된 대개의 작은 짐승(소형 포유류, 특히 습들쥐·갈밭쥐)들은 현재의 북부 고산지대(중국 동북부·시베리아 동남부·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특히 추운 동물상의 요소를 많이 가졌다. Ⅳ층에서는 큰쌍코뿔이의 아래턱·위팔뼈를 비롯한 큰 뼈화석들이 많이 출토되어 더운 동물상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Ⅰ층은 추운 동물의 시기인 민델빙기로, Ⅳ층은 민델·리스간빙기로 구분하여 보는 해석이 보다 합리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139)
(나) 덕천 승리산유적
이 유적은 평남 덕천 승리산의 동남방향으로 대동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석회암동굴이다. 지표 위 7m 높이에 위치한 이 굴은 입구가 궁륭식이며, 전체의 길이는 62.2m로 1972∼1973년에 발굴되었다(<사진 6>).
우리 나라의 구석기유적에서 사람뼈를 처음 찾아 보고한 이 승리산유적은 6개층인데 가장 중요한 층인 Ⅳ층(적갈색 자갈층)에서는 슬기사람 계통의 ‘덕천사람’ 이빨이, 슬기슬기사람 계통의 ‘승리산 사람’의 아래턱은 Ⅴ층(기본화석층)에서 출토되었다(<사진 7>).
‘덕천사람’은 Ⅳ층에서 동굴하이에나와 함께 출토되었으며, 중기 홍적세 말기∼후기 홍적세 초기에 있었던 슬기사람 계통으로 보았다. ‘승리산사람’의 아래턱의 길이는 현대인과 크게 차이가 없는 76㎜이나, 그 너비는 114㎜로 현대인의 103㎜에 비하여 훨씬 큰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로 보아 승리산사람은 중국 주구점의 山頂洞人보다 더 이른 시기인 후기 홍적세 중기∼말기의 35세 정도의 장년 남자로 해석하고 있다.
동물의 종적 구성은 충위 구분없이 분류하여 6목 14과 25속 31종 2아종으로 설명하고 있으나,140) 덕천사람이 출토된 Ⅳ층에서는 동굴하이에나·큰쌍코뿔이 등과 같은 더운 동물(la fauna chaude)이, 승리산사람이 출토된 Ⅴ층에서는 털코끼리 등의 추운 동물(la fauna froide)이 출토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층위의 구분없이 출토유물-동물상을 섞어 보고하는 것은 단지 이 유적만이 아닌 북한 구석기연구의 공통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이 만든 유물에 관한 일체의 설명을 하지 않아 이 동굴유적의 성격과 문화행위를 밝힐 과학적인 자료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다) 역포 대현동유적
앞에 대동강이 흐르는 석회암 동굴유적인 평양시 역포구역 대현동유적은 1977년에 발굴한 길이 9m의 작은 굴이다.
3개로 구분된 층위 가운데 Ⅱ층 밑바닥에서 발굴된 슬기사람(Homo sapiens)계통의 ‘역포사람’(7∼8살, <사진 8>) 화석의 윗머리뼈 곧은 길이는 102.5㎜, 굽은 길이는 112.0㎜인데, 굽은 지수는 93.2로 슬기사람(93.0)과 비슷하다.
동물의 종적 구성이 4목 12과 12속 22종으로, 사멸종은 큰쌍코뿔이 등 10종으로 45.4%를 차지하여 검은모루유적(62%)·승리산유적(34.9%)의 수치와 서로 비교하여 보면, 검은모루보다는 낮지만 승리산보다는 높아 중기 홍적세의 이른 시기로 보고하고 있다.141)
여기에서도 사람뼈화석과 함께 좋은 동물화석들이 많이 발굴되었음에도 문화행위를 밝힐 유물에 대한 고찰과 연구를 하지 않아 문화성격의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라) 평양 만달리유적
이 유적은 평양시 승호구역 만달리에 있는 석회암동굴로 1979년 10월과 1980년 5∼8월 사이에 발굴되었다.
동굴의 층위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되는데, 후기 구석기문화층인 Ⅱ층에서는 ‘만달사람’으로 명명된 비교적 많은 사람뼈 부분과 뼈연모·석기·동물화석이 출토되었다(<사진 9>).
20∼30살쯤의 남자인 만달사람의 머리뼈는 길이 201㎜, 너비 146㎜로 대단히 길며, 머리뼈 지수는 72.6으로 전형적인 장두형에 속한다.
눈두덩은 상당히 발달되었으며, 이마의 경사는 비교적 급하고, 앞머리뼈의 옆모습은 활등선을 그리며, 그 지수는 82.4로 오늘날 사람(86.0)과 비슷하다. 그리고 정수리각(bregma angle)은 57˚이며, 윗머리뼈는 상당히 굽었고, 아래턱은 거의 완전하며 앞부분이 넓은 말발굽형으로 크고 두터우며 무겁다.142)
이 유적의 중요한 또 다른 자료는 만달사람이 만든 모두 13점의 석기들이다. 차돌망치와 격지가 같이 출토되어 직접 석기제작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해석되는 이 문화층에서는 쐐기를 대고 대개 5㎝ 미만의 길이에 너비 3∼5㎜ 되는 좀돌날(細石刃)을 5∼8개 떼어낸 좀돌날몸돌이 주목된다(<그림 3>). 석기제작방법을 분석하여 보면, 수양개 Ⅲ형식과 같음을 알 수 있는, 15,000년 전후의 시기로 보인다.143)
이 유적의 연구는 이미 먼저 보고한 상원 검은모루(1974년)·덕천 승리산(1978년)연구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우선 Ⅱ층(4목 8과 12속 13종)에서 출토된 동물상과 그 밑층의 동물상(Ⅰ층, 5목 12과 19속 24종)을 층위별로 분석하여 층위의 비교연구가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러한 연구자세는 만달사람의 연대와 특징을 설명하는데 보다 설득력을 갖게 한다.
(마) 승호 화천동유적
평양시 승호구역 화천동에 있는 이 유적은 해발 30m에 있는 석회암동굴로서, 1977년 4월∼8월 사이에 6개의 수직굴 가운데 퇴적층이 잘 남아 있으면서 짐승화석이 가장 많은 2호굴이 발굴되었다.
2호굴은 21m로 두터운데, 크게 겉층(5m)과 화석층(16.5m)으로 나뉘어진다. 짐승화석의 종적 구성은 모두 등뼈짐승으로 6목 12과 20속 22종이며, 사멸종은 큰쌍코뿔이·물소의 2종(9.1%)이다. 그러나 층위나 화석의 출토지를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아 전체 동물상에 대한 분석은 하기 어렵다. 동물상의 비교를 통하여 보고자는 그 시기를 대현동보다는 후기에 속하나, 승리산보다는 이른 시기인 중기 홍적세의 늦은 시기로 보기도 한다.144)
그런데 2호에서 발굴된 화덕자리는 길이 50∼60㎝ 정도의 둥근 형태로 숯층(두께 10㎝ 안팎)에 타다 남은 사슴뼈들이 남아 있었던 점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의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 상원 용곡동굴유적
상원군 용곡리에 있으며, 2개의 석회암동굴 가운데 1호 동굴이 1980년 5월∼1981년 1월까지 발굴되었다.
1호 동굴의 퇴적층은 13개, 문화층은 5개층이 밝혀졌는데, 1문화층∼4문화층까지는 구석기시대이고, 5문화층은 신석기시대의 것이다. 각 구석기문화층에서는 문화행위를 알 수 있는 석기나 화덕자리와 함께 사람의 머리뼈화석이 출토되어 깊은 연관을 갖는 연구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출토된 석기를 보면 1문화층(8층)의 석기는 정형화되지 못하고 종류도 매우 단순하다. 2문화층(9층)에서는 1문화층의 문화성격과 비슷하나 톱니날석기가 있음이 주목된다. 3문화층(10층)에서는 간접떼기수법인 눌러떼기수법이 쓰인 점(<그림 4>), 4문화층(11층)에서는 격지석기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또한 2·4문화층에서는 뼈로 만든 찌르개와 송곳이 출토되었으며, 뼈를 납작하게 갈아서 짐승머리를 조각한 예술품도 발굴되었다(4문화층). 화덕자리는 2문화층에서 3개, 3문화층에서 5개, 4문화층에서 4개를 찾아 연속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10사람분에 해당하는 많은 사람뼈화석이 발견된 ‘용곡사람’ 가운데 2문화층에서 출토된 제7호 머리뼈(<그림 5>)는 보존상태가 좋고, 외형적인 특징으로 보아 35살 정도의 남자로 해석된다. 머리뼈의 길이는 190㎜, 너비는 132㎜로, 지수는 69.7이며 장두형에 속한다. 뇌의 발달을 나타내는 이마뼈의 곧은 길이는 118㎜, 굽은 길이는 138.2㎜, 지수는 84.6으로 산정동인(86.6)이나 자바사람(90)보다 작으며, 뇌부피는 1450㏄쯤 된다. 3문화층에서 출토된 제3호 머리뼈 길이는 204㎜, 너비는 142㎜, 지수는 69.7로 장두형이며, 부피는 1,650㏄쯤 된다. 윗머리뼈의 곧은 길이는 130.2㎜, 굽은 길이는 138.6㎜로 지수는 93.8인데, 이는 북경사람과 슬기사람의 사이에 해당된다.
보고자들은 열형광법으로 8층(1문화층)을 50만∼48만년 전, 9층(2문화층)을 46만∼40만년 전으로 측정된 6개의 자료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8층을 중기 구석기로, 9층을 후기 구석기시대로 보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145) 그러나 용곡동의 연구는 다른 유적의 연구보다도 몇 가지 점에서 앞선 성과를 보이고 있다. 우선 각 층위에 대한 문화해석을 시도하여, 퇴적층·꽃가루·동물상·사람뼈 연대측정 등과 같은 과학적 방법이 이용되어 보다 합리적인 해석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석기에 관해서는 각기 층위와 유물별로 고찰되기는 하였지만,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서술에 멈춰 서 있고, 또한 문화층에 따른 비교연구와 검토가 뒤따르지 아니하여 문화발달에 관한 개념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李隆助>
138) | 김신규·김교경,<상원 검은모루 구석기시대 유적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 3∼3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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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 이융조,<구석기유적>(≪북한의 문화유산≫1, 고려원, 1990), 91∼94쪽. |
140) | 고고학연구소,<덕천 승리산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11, 1978). |
141) | 김신규·김교경,<력포구역 대현동유적 발굴보고>(≪평양부근 동굴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14, 1985), 69∼119쪽. |
142) | 김신규·김교경 등,<승호구역 만달리 동굴유적 발굴보고>(≪평양부근 동굴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14, 1985), 2∼68쪽. |
143) | 이융조·윤용현,<한국 좀돌날몸돌의 연구-수양개수법과의 비교를 중심으로>(≪先史文化≫2, 충북대 선사문화연구소, 1994), 133∼229쪽. |
144) | 김신규·김교경,<승호구역 화천동유적에서 드러난 화석포유동물상>(≪평양부근 동굴유적 발굴보고≫, 1985), 120∼160쪽. |
145) | 전제헌·윤진·김근식·류정길,≪룡곡동굴유적≫(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6). 많은 남북한학자들이 최근 새로운 해석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다음의 글이 크게 참고된다(한창균, <용곡 제1호 동굴유적의 시기구분과 문제점>≪博物館紀要≫8, 단국대 중앙박물관, 1992, 69∼8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