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의 한데집터와 복원
동굴유적은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자연 그대로 이용했던 생활의 터전이다. 따라서 동굴유적의 막집터를 복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굴유적 안에서 막집터를 찾아 막집을 복원한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147) 그 예는 매우 드물다. 이에 비하여 한데집터는 구석기시대의 집터 중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막집을 복원해 본 예가 많은 편이다.
지금까지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구석기시대의 가장 오래된 한데막집터로서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 있는 Olduvai계곡의 제1바닥층에서 약 180만년 전의 전기 구석기시대 한데집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148) 이외에도 또 다른 전기 구석기시대의 한데집터가 있으나 그 수는 많지 않다. 그것에 비하면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한데집터는 비교적 많이 발견된 편이다.149) 그것은 대체로 후기 구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위와 같은 막집의 입지조건이나 기본구조를 갖춘 한데유적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 이러한 조건과 구조에 근거해서 당시의 막집을 복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 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의 한데막집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고된 유적으로는, 함북 웅기 굴포리 서포항유적, 충남 공주 석장리유적, 충북 제천 사기리 창내유적, 전남 화순 사수리 대전유적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굴포리 서포항유적만이 중기 구석기시대의 것일 뿐 나머지는 모두 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적들이다.
가) 웅기 굴포리 서포항유적
굴포리유적에서는 중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굴포문화 Ⅰ기층에 막집의 시설물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150) 그 시설물이란 막의 가장자리를 눌러 놓았던 것으로 인정되는 분암덩이와 돌무지로서 서북-동남선상에 부정형 또는「ㄱ」자형으로 놓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막집터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기둥자리나 기둥의 흔적 또는 화덕자리와 같은 막집터의 증거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 시설물이란 모루로 썼던 것으로 인정하는 큰 분암덩이가 같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한데 석기공방과 관련된 구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 공주 석장리유적
금강가 바로 옆에 있는 공주 석장리유적에서는 시기를 달리하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한데집터 두 곳(제1지구 제1호 집터 및 제3호 집터)을 발견하였다.
(가) 석장리 제1지구 제1호 집터
제1지구 제1호 집터(51구덩이)151)는 바로 눈앞에 금강이 보이는 비스듬한 언덕 위에 기둥을 세워 막집을 지었던 한데집터이다. 제1호 집터에서는 기둥자리·화덕자리·문돌·담돌·당김돌 등의 구조를 찾았다. 그 외에 집터 안에서 새겨진 돌, 땅바닥에 새겨 놓은 고래상, 사람과 짐승의 털, 물감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기둥자리는 5개를 찾았으며 지름은 모두 약 10㎝ 정도이다. 기둥자리는 문돌로부터 250㎝ 지점에서 1개, 서북쪽 담돌과 180㎝ 떨어진 곳에서 1개를 찾았으며 나머지는 이들 2개의 기둥자리에서 100∼150㎝ 정도 떨어진 상태로 모두 수직에 가깝게 나타났다.
화덕자리는 문돌에서 70∼80㎝ 안쪽에 한 곳을 마련하였으며 별다른 시설없이 땅이 움푹 파인 불규칙한 타원형(115×105㎝)의 모양이다. 이 곳에서 오리나무 종류의 나무숯과 재가 나왔다.
집터의 서남방향에 양쪽 문돌이 약 150㎝ 사이를 뗀 상태에서 나왔다.
막집터의 바깥 둘레에는 서쪽에서 남쪽, 동쪽으로 연이어 큰 돌로 담돌을 쌓은 것으로 나타났고(7.5×7m 범위), 막집을 고정시키기 위한 당김돌은 집터의 남쪽과 동쪽에서 찾았다.
화덕자리에서 출토된 나무숯을 이용하여 절대연대를 측정한 결과 20,830±1,880BP(AERIK-8)라는 연대가 나와 석장리 제1지구 제1호 막집터가 후기 구석기시대의 것임이 밝혀졌다.
석장리 제1호 막집은 복원한다면 다음과 같이 지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① 먼저 가운데에 큰 기둥을 5개 이상 수직으로 세우고 잔가지를 큰 기둥과 담돌에 받쳐 막을 두른 뒤 지붕을 이었다. ② 출입문은 막집의 남쪽인 강쪽에 문돌을 놓아 만들었다. ③ 문돌이 가까운 막집의 안쪽에는 땅만 움푹 판 채로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은 화덕을 하나 마련하였다. ④ 막집 둘레에는 담돌을 둘러 놓았다(<그림 1>).
북서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은 지세에 세웠던 제1호 막집을 복원해 본 결과, 바닥은 네모꼴 모양이 아닌 여러 모로 된 둥그스럼한 모양이 된다. 막집의 내부 면적은 약 50㎡의 크기로 8∼10명 정도가 생활했던 곳으로 짐작된다. 또 화덕을 집안에 만들었던 것으로 보아 이 막집은 겨울철에 생활했던 집으로 여겨진다.
(나) 석장리 제1지구 제3호 집터
제1지구 제3호 한데집터(101구덩이)152)는 제1호 집터보다 위층에서 찾았으며 그 구조는 제1호 집터와 약간 다르다. 제3호 집터에서는 기둥자리·화덕자리·당김돌을 찾았고, 그 외에 집터의 앞쪽에서 석기공방을 확인하였다.
크고 작은 기둥자리가 여러 개 나왔으며 큰 것은 지름이 16cm, 작은 것은 지름이 4∼8cm 정도 된다. 기둥자리는 한 줄 또는 두 줄로 이어져 나왔고 작은 구멍은 10°쯤 기울었다.
화덕자리는 집터 앞쪽에 있으며 7개의 자갈돌이 불에 탄 상태로 둥글게 놓였다. 당김돌은 큰 기둥자리 바깥쪽에 있는 자갈돌을 이용하였다.
제3호 집터는 제1호 집터보다 층위와 석기구성으로 보아 제1호 집터보다 조금 늦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막집터이다.
석장리 제3호 막집은 다음과 같이 복원된다. ① 먼저 동쪽에 큰 기둥을 서로 마주하여 세운 후 ② 서쪽으로 가면서 기둥을 안으로 차츰 좁히면서 약간 기울여 남·북쪽에 줄지어 세우고 양쪽에서 잔가지로 서로 엮어 종도리를 이루었다. ③ 출입문은 큰 기둥을 세운 동쪽에 마련하였다. ④ 큰 기둥 바깥에 있는 자갈돌에 당김줄을 매어 큰 기둥을 고정하도록 하였다. ⑤ 막집 앞에는 둥근 자갈돌 7개를 둘러 놓아 한 개의 화덕을 만들었다(<그림 2>).
완성된 막집의 바닥은 고른 편이고, 지붕의 모양은 앞에서 뒤로 가면서 기울어지고 좁아진 동서로 긴 형태이다. 집의 뒤쪽은 막집의 바닥보다 낮게 하여 집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였다. 막집의 크기는 16.5㎡로서 한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규모이다. 화덕자리가 막집의 앞에 놓인 점, 집 앞쪽이 높은 점, 배수시설이 잘된 점 등으로 보아 석장리 제3호 집터는 여름철에 지었던 강가의 막집터로 생각된다.
다) 제천 창내유적
창내유적153)은 남한강과 그 지류인 창내가 마주치는 두물머리에 있으며 이 곳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한데막집터를 찾았다. 강자갈층 위에 마련된 창내 막집터에서 기둥자리·화덕자리·당김돌 등 집터의 기본구조를 찾았다.
기둥자리는 10여 개 이상 찾았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는 대개 60∼160㎝ 간격이다. 기둥구멍은 지름과 깊이, 기울기가 각기 다르게 마련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각 기둥구멍의 지름은 10∼28㎝이고 깊이는 11∼49㎝이다. 출입문 부분인 동쪽의 기둥구멍은 깊이가 모두 40㎝ 이상으로 매우 깊은 편이다. 기둥구멍의 기울기는 22˚∼81˚로 기운 정도가 매우 다르지만 나들이 부분은 모두 80˚이며, 버팀목을 세운 기둥자리는 모두 71˚∼76˚에 이른다. 그리고 기둥구멍 주위에는 자갈돌을 동그랗게 돌려 놓았다.
화덕자리는 막집의 바로 앞에 있으며 방향은 동쪽인 강쪽에 놓였다. 구조는 커다란 돌(59×20×19㎝)을 집과 나란히 옆으로 놓고서 이맛돌로 삼아 이 돌과 잇대어 둥근 모양이 되도록 강자갈돌을 두 켜 내지 세 켜 정도 쌓아 올려 놓았다. 화덕의 크기는 56×76cm이고 깊이는 가장 깊은 부분이 47㎝이다. 둥그런 화덕 안에서 참나무과의 커다란 나무숯과 숯부스러기가 나왔다.
당김돌은 막집의 뒤편에 있는 커다란 자갈돌을 이용하였다.
창내유적의 막집터는 이 곳에서 출토된 석기의 특징으로 보아 후기 구석기시대의 집터임이 밝혀졌다.
창내유적의 막집은 다음과 같이 복원된다. ① 우선 3개의 가위목을 지붕끝에서 서로 겹쳐서 길게 기울여 세우고 가위목을 아랫부분에서 각각 버팀목으로 받친 후 ② 하나의 문기둥을 가위목 위에 걸쳐서 거의 수직으로 깊게 세워 막집의 중심 기둥으로 삼았다. ③ 나머지 기둥을 지붕끝에 얹어 기울여 세우고 잔가지로 엮어 집의 기본 골격을 갖춘 후에 지붕을 단단히 하고 풀로 지붕을 이어 막집을 만들었다. ④ 출입문은 다른 어느 기둥보다 곧추 세운 동쪽 즉 강쪽 부분에 마련하였다. ⑤ 집을 짓고 나서 보다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지붕끝에서 내린 줄을 당김돌에 연결시켜 마무리지었다. ⑥ 출입문 바로 바깥에 크고 작은 자갈돌을 이용하여 타원형의 화덕을 만들었다. 특히 바람에 불씨가 막집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커다란 이맛돌을 막집 쪽에 길게 가로놓았다(<그림 3>).
복원된 막집의 바닥은 불규칙하지만 둥근 모양이고 전체 모양은 원뿔 모양이다. 바닥의 가장 긴 축의 길이는 약 4.6m이고 가장 짧은 쪽은 약 3.4m이다. 집의 높이는 약 3.6m이고 사용된 기둥의 길이는 4∼4.6m에 이른다. 막집의 내부면적은 약 10㎡로 3∼4명이 생활했던 공간으로 짐작된다. 이 막집은 화덕을 집 밖에 만들었던 점과 석기의 출토 성격으로 보아 여름철에 강가에서 사냥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이용했던 집으로 해석된다.
라) 화순 대전유적
대전유적154)은 보성강가의 구릉지대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후기 구석기 시대의 한데막집터를 찾았다. 이 곳에서는 기둥자리와 강자갈을 깐 구조물을 확인하였다.
기둥자리는 24개로 확인되었으며 1∼2m 정도의 간격으로 서로 대칭되게 길게 분포되었다. 각 기둥구멍의 지름은 5.5∼28㎝이고 깊이는 5∼56㎝이다. 출입문 부분의 기둥구멍의 깊이는 각각 33㎝·56㎝로 다른 것보다 매우 깊은 편이다. 기둥은 10개의 기둥을 두 개씩 서로 마주 보게 하여 세웠다. 기둥구멍의 기울기는 51˚∼88°사이로 나타났다. 각 기둥구멍이 표면 높이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집터는 남서쪽으로 기울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덕자리는 후대에 훼손되어 찾아볼 수 없으나 집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였다.
대전유적의 막집터도 출토된 석기의 특징으로 보아 후기 구석기시대의 한데집터로 밝혀졌다.
대전유적의 막집은 다음과 같이 복원된다. ① 우선 가운데 축에 중심 기둥을 2개 세우고 종도리를 올렸다. ② 이어 양쪽 옆에서 나무를 휘어서 기둥을 세우고 종도리에 묶었다. 기둥에 따라서 버팀목을 세워 기둥을 받치도록 함께 묶기도 하였다. ③ 기둥을 모두 세운 후 기둥 사이의 공간에 잔가지를 걸치거나 기둥 위에 가죽을 덮어 막집을 완성하였다. ④ 출입문은 강물이 흐르는 남서쪽에 만들었다. ⑤ 집의 뒤쪽에 별도로 말뚝을 세워 중심 기둥과 줄을 연결하여 막집을 튼튼하게 고정시키도록 하였다(<그림 4>).
복원된 대전 막집의 모양은 모를 죽인 긴 타원형이고 남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집이다. 집의 높이는 6m쯤 된다. 막집의 내부면적은 약 30㎡ 정도로서 7∼10명이 생활했던 공간으로 생각된다. 내부에는 강자갈을 깐 것으로 보인다. 이 막집은 화덕이 집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 추운 계절에 지었던 생활주거로 짐작된다.
147) | 동굴내의 집터가 복원된 유적으로는 프랑스 니스에 있는 라자레유적을 대표로 들 수 있다(Lumley, H. de, et, Une Cabane Acheuléenne dans la Grotte du Lazaret, Nice, Mémoire de la Société Préhistorique Française Ⅶ, Paris, 1969, éd. Les Premiers Habitants de l'Europe : 1,500,000-100,000 ans, 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 Paris, 1982, pp.133∼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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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 Leakey, M. D., Olduvai Gorge, vol. III : Excavations in Beds I and II, 1960∼63, Cambridge Univ. Press, Cambridge, 1971. |
149) | Jelinek, J., Dwellings and Settlements of Stone Age Man, The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Evolution of Man, Hamlyn, London, 1975, pp. 211∼274. Combier, J., Les Habitats de Plein Air, Les Dossiers Histoire et Archéologie 87, France, 1984. 10, pp. 34∼40. 梶原 洋,<ソビエトの舊石器時代住居址>(≪月刊考古學ジャ-ナル≫262, ニュ-·サイエンス社, 東京, 1986. 5), 8∼14쪽. 박희현, 앞의 글, 5∼6쪽. |
150) | 김용간·서국태,<서포항원시유적 발굴보고>(≪고고민속론문집≫4, 사회과학출판사, 1972), 36∼38쪽. 김용남·김용간·황기덕,≪우리나라 원시집자리에 관한 연구≫(사회과학출판사, 1975), 5쪽. |
151) | 孫寶基,<石壯里의 후기 구석기시대 집자리>(≪韓國史硏究≫9, 1973), 3∼57쪽. ―――,<舊石器時代 : 人種과 住居址>(≪韓國史論≫12, 國史編纂委員會, 1983), 202∼205쪽. ―――,≪석장리 선사유적≫(동아출판사, 1993). |
152) | 손보기, 위의 책. |
153) | 박희현,≪제원 창내 후기 구석기문화의 연구≫(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89). ―――, 앞의 글, 3∼24쪽. |
154) | 李隆助·尹用賢,≪和順 大田 舊石器時代 집터 復元≫(忠北大 先史文化硏究所, 1992), 49∼5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