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연구사 개관
한반도에서 고고학적 조사가 개시된 것이 1910년경부터라면, 신석기시대에 관한 체계적인 학술조사도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16년 평안남북도·황해도 및 경기도 일대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를 발표한 것이 황해도 용연리패총에 대한 간략한 발굴보고서였다.300)
그 후 1925년에는 서해안지역의 암사동유적, 1930년에는 남해안지역의 동삼동패총, 1932년에는 동북해안지역의 유판패총 등이 발견 조사됨으로써 한반도 전역에 걸친 신석기시대의 윤곽이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1945년 이전 한반도의 고고학조사는 역사시대의 고분발굴조사에 중점이 두어졌다. 따라서 신석기시대에 대한 연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지만 간헐적이나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 학자들이 개인적 관심에서 이 분야에 조사업적을 남겼는데 당시 간행된 보고서는 중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하였으며, 그들에 의한 서울 암사동유적과 부산 동삼동패총, 함북의 유판패총 등의 조사결과는 신석기문화의 개략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당시 수집한 신석기시대 토기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내놓은 빗살무늬토기에 관한 연구301)는 신석기시대 토기에 대한 자료축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에 중요한 지식을 제공한 것이었다.
한편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에 대하여는 북유럽 기원의 캄케라믹이 시베리아로 동진하여 그 일파가 한국으로 유입되었다는 시베리아 전파기원론이 제창되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우리 나라 빗살무늬토기의 유입경로가 시베리아→연해주→동북지역→남해안지역→서해안지역으로 차차 전파된 것으로 발표되기도302) 하였다. 이는 그 후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어, 이 설이 발표된 지 반세기가 지난 얼마전까지 학계의 정설로서 통용되어 왔다. 이와 같이 넓은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그들 지역간의 선후관계 구명에 초점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빗살무늬 자체의 선후관계 구명은 커다란 진전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63년에는 빗살무늬토기의 양식분류에 의한 편년안이 제시되었다.303) 이는 한반도 빗살무늬토기에 관한 최초의 편년안이지만 역시 층서적 증거의 불충분으로 인한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신석기유적에 대한 대규모로 학술발굴조사가 실시됨에 따라 새로운 편년설정의 기준자료가 제시되었다. 먼저 북한에서는, 1950년대에 궁산리패총의 발굴을 시작으로 지탑리유적을 발굴, 집자리의 선후관계에 의한 유물 상호간의 차이를 구분하여 기원전 5,000년에서 2,000년까지 3시기의 편년안을 내놓았다.304)
암사동유적·동삼동패총·수가리패총·오산리유적 등 층위를 이룬 중요한 유적의 발굴과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를 토대로 한국 신석기문화의 기본적인 편년 골격이 세워지면서,305) 한국의 신석기문화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 이후 기틀을 다져 나갔다. 1980년대 말에는 패총유적들이 남해안지역에서 계속적으로 발굴조사되면서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이 축적된 자료를 종합하여 한국 신석기시대의 편년을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