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고인돌
고인돌은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의 거의 전기간에 걸쳐 반도의 모든 지역에서 이루어진 묘제로서 비슷한 시기 중국의 동북지방과 일본의 규슈(九州) 지방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0207) 특히 한반도에서는 선사시대의 모든 문화요소 가운데 고인돌만큼 한 시대의 특징을 부각시켜 주는 것은 없을 정도로 고인돌이 청동기시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가) 분포와 형식
고인돌의 분포는 지역에 따라 밀집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거의 한반도 전역에 고루 퍼져 있다. 아직까지 고인돌에 대한 전국적인 지표 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 정확한 실태는 알 수 없지만 특정지역에서의 상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고인돌이 가장 밀집된 곳은 평안남도와 황해도 등 서북지방과 전라남·북도 등 주로 우리 나라 서해안 지방에 해당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비교적 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전라남도의 경우는 1,900여 군데에서 모두 16,000기가 넘는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0208) 물론 이 곳은 우리 나라에서 고인돌의 분포가 가장 밀집된 곳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이로써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는 분포의 실상을 어느 정도 어림할 수가 있다.
이들 고인돌은 그 모양과 짜임새의 특성이나 분포의 양상에 따라 크게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북방식은 비교적 넓고 편평한 판돌을 땅 위에 세워 네모난 상자모양의 방을 짜맞춘 뒤 바닥에 시체를 안치하고 그 위에 덮개돌(上石)을 덮어 마치 책상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학자에 따라서는 이 유형을 卓子式 혹은 地上形이라고도 하며 북한에서는 대표적인 유적의 이름을 붙여 五德里形0209)으로 부르고 있다(<그림 1>).
한편 남방식에서는 땅밑에 판돌(板石)을 짜맞추거나 깬돌(割石), 또는 냇돌(川石) 등을 쌓아 돌널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묻지만 드물게는 구덩이만 파고 묻기도 한다. 무덤 위에는 큰 덮개돌을 얹게 되는데 더러는 그 아래에 받침돌을 괴어 마치 바둑판과 같은 모습을 띠는 것도 있다. 이러한 외형적 특성 때문에 남방식을 바둑판식(碁盤式)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받침돌이 없는 것은 따로 無支石式이라고도 하며, 북한에서는 沈村里形0210)으로 일컬어지고 있다(<그림 2>).
이와 같이 외형과 짜임새의 특성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이들 고인돌이 각 형식에 따라 그 분포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략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방식은 그 이북에서 주된 분포를 보이는 반면, 이남에서는 남방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개략적인 분포의 성격을 나타낼 뿐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한강 이남에서는 주로 서해안 지방에서 북방식이 드물게나마 확인되고 있고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황해도 일원에 적지 않은 수의 남방식 고인돌이 분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의 고인돌은 각기 그 둘레에 이루어진 보강 구조물로서의 돌무지 시설의 유무에 따라 積石式과 無積石式으로 분류되고 이 가운데 남방식은 다시 매장 부위의 구조적 성격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즉 남방식은 매장시설을 이룬 벽체구조의 짜임새를 기준으로 하여 板石形, 割石形, 混築形, 土壙形 등으로 구분되고 특수한 지방 형식으로 濟州形을 들 수 있다.0211)
나) 편년적 성격
고인돌 문화에 대한 원류와 편년문제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처음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오고 있는 중요한 과제이다. 처음으로 한반도의 고인돌에 대한 형식분류를 시도한 연구에서는 이들 고인돌을 ‘석기시대’에 이루어진 무덤유적으로 추정하고 보다 원시적인 외형을 갖춘 남방식이 북방식에 비해 선행한다고 보았다.021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어떤 학술적인 자료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주변지역의 상황을 어림해서 내린 추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뒤로 다른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현지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고인돌로 부터 출토된 몇몇 유물을 통해 그 시대적 성격이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금속기 사용초기’로 그 시기를 압축하거나0213) ‘금속병용기’로 보기도 했다.0214) 또한 당시까지의 유적조사 성과를 집대성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고인돌은 기원전 3∼2세기나 그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0215)
1960년대 이후 한반도의 각 지역에서 고인돌 발굴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자료가 축적되면서 지금까지 외형에 의한 피상적 연구단계를 벗어나 매장시설의 구조적 성격과 출토유물을 바탕으로 점차 그 연구가 체계화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적어도 기원전 8세기 이전 한반도에는 고인돌이 구축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하였으며0216) 이후 대부분의 학자들이 고인돌 문화를 청동기시대의 소산으로 보기에 이르렀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종류와 수량이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한반도에서의 편년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축적된 자료, 특히 토기류와 석기류의 양상을 통해 개략적인 편년관은 그 윤곽이 잡혀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몇몇 종류의 유물의 성격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고인돌 축조는 기원전 10세기경부터 기원 전후에 이르기까지, 즉 기원전 1천년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가 바로 한반도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거의 전기간에 해당되지만 그 발생과 소멸시기가 지역에 따라 다르고, 큰 줄기로 볼 때는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시대가 늦어지는 것은 문화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당연한 양상일 것이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대부분 토기류와 석기류가 주류를 이루지만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부장된 유물의 종류나 수량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최근에는 남해안의 일부 지역에서 遼寧式銅劍이나 銅鉾와 같은 청동유물이 출토되기도 하는데0217)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고인돌 문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0207) | 池健吉,<東아시아 支石墓의 型式學的 考察>(≪韓國考古學報≫12, 韓國考古學硏究會, 1982), 24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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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8) | 李榮文,≪全南地方 支石墓 社會의 硏究≫(韓國敎員大 博士學位論文, 1993), 43쪽. |
0209) | 석광준,<우리나라 서북지방 고인돌에 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7,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112쪽. |
0210) | 석광준, 위의 글. |
0211) | 池健吉,<湖南地方 고인돌의 型式과 構造>(≪韓國考古學報≫25, 1990), 74∼75쪽. |
0212) | 鳥居龍藏,<平安南道·黃海道古蹟調査報告書>(≪大正五年度古蹟調査報告≫, 朝鮮總督府, 1916), 74∼75쪽. |
0213) | 梅原末治,≪朝鮮古代の墓制≫(1946), 16쪽. |
0214) | 藤田亮策,<朝鮮の石器時代>(≪朝鮮考古學硏究≫, 京都;高桐書院, 1948). |
0215) | 三上次男,≪滿鮮原始墳墓の硏究≫(吉川弘文館, 1977), 144쪽. |
0216) | 金載元·尹武炳,≪韓國支石墓硏究≫(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6, 1967), 19쪽. |
0217) | 李榮文,<全南地方 출토 靑銅遺物>(≪韓國上古史學報≫3, 1990), 213∼2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