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돌널무덤
고인돌과는 비슷한 시기적 배경을 갖고 나타나는 이 시대의 무덤으로 돌널무덤(石棺墓)을 들 수가 있다. 이 무덤은 청동기시대에 시베리아로부터 滿蒙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져 있는 매장시설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독특한 성격을 보이며 반도의 거의 전역에 걸쳐 확인되고 있다.
돌널(石棺)은 시신을 묻기 위해 판석을 세우거나 깬돌, 또는 냇돌을 쌓아 올려 만든 매장시설을 모두 일컫지만 고고학에서 돌널무덤이란 일반적으로 선사시대의 무덤에 국한시키고 있다. 이 돌널무덤은 고인돌과는 달리 매장 구조물의 전체가 땅 속에 묻힌 채 땅 위에는 아무런 표지물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경작이나 굴착공사 등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 돌널무덤이 처음부터 계획적인 발굴에 의해서 학술적 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극히 드물고 대개는 사후의 수습조사 결과만을 대할 수밖에 없어 그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는 매우 한정된 실정이다.
우리 나라에서의 돌널무덤의 분포는 비슷한 시기적 배경을 갖고 나타나는 고인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빈약하지만 지역에 따라 밀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반도 전역에 걸쳐 넓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광범위한 분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학술적으로 조사 보고된 돌널무덤의 수는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돌널무덤은 대체로 그리 높지 않은 구릉지대의 한 곳에 단독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지만 北倉 大坪里,0218) 扶餘 松菊里0219)와 佳增里0220)에서와 같이 4∼6기가 한데 모여있는 곳도 있다. 晋陽 大坪里0221)에서는 1기의 고인돌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몇 기의 돌널무덤이 둘러 있었다(<그림 3>).
돌널무덤은 땅을 파고 여기에 판돌을 세우거나 깬돌·냇돌을 쌓아 올려 네모난 매장 공간을 마련한 구조물로서 짜임새의 성격에 따라 板石墓와 割石墓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판석묘는 다시 한쪽 벽이 한 장의 판돌로서만 이루어진 單板石式과 여러 장을 이어 세운 複板石式으로 나뉘어진다.0222)
이들은 우리 나라 거의 전역에 걸쳐 분포를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판석묘 가운데 단판석식이 반도의 서북지방에 퍼져 있는 데 비해 복판석식은 주로 남부지방, 특히 부여지역에서 성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단판석식의 분포가 한강유역과 멀리 진양 대평리에서까지 확인된 것으로 보아서는 고인돌 문화의 확산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할석묘는 대부분 남한지역에서 조사되었는데 특히 금강유역에서 청동기 일괄유물과 함께 나타나는 강한 지역적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가) 판석묘
판석묘의 구조적인 특징은 매장시설의 네 벽 가운데 각 벽면을 한 장, 또는 여러 장의 판석으로 세워 만든 것으로 여기에 쓰여지는 판석으로는 점판암과 같은 얇은 석재가 쓰이기도 하고 보다 두터운 자연판석이 사용되기도 한다. 마구리벽(短壁)은 일반적으로 양 긴벽(長壁)의 사이에 끼워지는데 이는 넘어지기 쉬운 마구리벽을 지탱해 주기 위한 구조적인 배려로 여겨진다. 이들 판석묘에는 한 장, 또는 여러 장으로 된 뚜껑돌(蓋石)이 덮이기도 하고 바닥에도 마찬가지 판돌이 깔리는 경우도 있으나 대신 잔자갈을 깔거나 판석과 잔자갈을 섞어 깔기도 한다.
판석묘의 평면은 장방형이 대부분으로서 대개는 한 쪽 마구리벽이 맞은편의 그것에 비해서 약간 넓어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는 길쭉한 사다리꼴을 이루게 되는 것이 많다. 이러한 특이한 평면을 갖추게 된 것은 시신이 널 속에서 차지하는 범위가 하체에 비해 상체가 넓어지는 것을 감안한 구조적 배려로 생각된다. 이러한 전통은 멀리 시베리아의 카라수크무덤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만몽지방에서도 성행하였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서북지방의 판석묘에서 이러한 모습이 강하게 보이고 있다.
나) 할석묘
할석묘는 지하에 이루어진 무덤의 네 벽을 깬돌이나 냇돌로 쌓아 올린 것으로 앞서 판석식에 비해 한 단계 늦은 시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할석묘는 이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도 가장 보편화된 묘제로서 널리 퍼졌지만 그 사이를 이어주는 이른바 ‘원삼국시대’에 있어서 할석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한반도의 돌널무덤 가운데 할석묘의 분포는 앞서 판석묘에 비해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지금까지 주로 금강유역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할석묘가 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멀리 떨어진 요령지방에서 성행되었으며 출토유물의 성격에서도 양 지역의 유사한 상황을 보이고 있는 바 이를 통해 지역 상호간에 이루어진 청동기문화의 교류상을 추측할 수 있다.
이들 할석묘는 주로 표고 50m 미만의 낮은 구릉지대에 이루어지는데 구덩이를 파내고 깬돌이나 덩이돌(塊石)을 조잡하게 쌓아올려 네 벽을 이루었다. 돌널의 윗면이나 바닥에는 부여 연화리0223)에서와 같이 넓적한 돌을 덮거나 깐 곳도 있으나 그 밖의 유적에서는 이러한 시설이 이루어지지 않고 바닥에서 나무 썩은 흔적이 검출된 것으로 보아 혹시 나무널 같은 별도의 시설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 편년적 성격
이들 각 유형의 돌널무덤은 그 분포상에 나타난 구조적 특성과 함께 부장된 유물의 성격에서도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판석묘로부터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주류를 이루는 것은 돌검(石劍)과 돌살촉(石鏃) 등 석기류이지만 드물게는 고식의 청동유물도 함께 나오고 있다. 북한지방의 단판석식으로부터는 단추(銅泡;강계 풍용동)나 날개촉(兩翼銅鏃;사리원 상매리) 등이 출토되었고 남부지방에서의 복판석식으로부터는 요령식동검(부여 송국리) 등 우리 나라의 청동기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들이 나오고 있다. 한편 금강유역에서의 할석묘로부터는 한국식동검을 비롯하여 각종 무기나 儀器와 같은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최성기에 만들어진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들 각 유형의 돌널무덤이 갖는 시기적 배경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돌널무덤으로부터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돌검과 돌살촉이며 이 가운데 돌검을 통해서 이들 각 형식 사이에 나타나는 성격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단판석묘로부터 나온 돌검은 대부분 검신에 피홈(血溝)이 나 있는 슴베식(有莖式)이거나 자루식(有柄式)인 데 반해 복판석묘로부터 출토되는 것들은 모두 피홈이 없는 것들이다. 돌검의 일반적인 형식분류에 따르면 혈구식이 보다 선행양식으로서 단판석식과 복판석식 사이에 나타나는 선후관계를 미루어 볼 수가 있다.
돌살촉은 그 형식이 매우 다양할 뿐 아니라 각 형식의 시간성이 너무 길어 돌검에서와 같은 형식 서열을 매기는 것이 쉽지가 않고 오직 출토유물의 개괄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그 선후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판석묘로부터 출토되는 돌살촉은 삼각형, 버들잎형(柳葉形), 긴마름모형(長菱形), 슴베식 등이지만 이 가운데 삼각형과 버들잎형은 지금까지 단판석식에서만 나오고 긴마름모형은 복판석묘로부터, 슴베식은 오랫동안 모든 판석묘로부터 출토되고 있다. 이들 돌살촉과 돌검의 성격에 따라 우선 판석묘 가운데 단판석묘가 한 단계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할석묘로부터 돌검은 출토된 바 없고 돌살촉으로는 삼각형만이 출토될 뿐 각종 무기와 의기로 이루어진 청동기 일괄유물이 다량으로 나온다. 그러나 판석묘로부터는 청동유물의 출토가 훨씬 드물고 그 종류도 단추와 날개살촉이나 요령식동검 등 한반도의 청동기 가운데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것들만 출토되고 있다.
지금까지 출토유물을 통해 각 돌널무덤의 편년적 성격을 살펴볼 때 대체로 단판석묘 → 복판석묘 → 할석묘의 전개과정을 추정할 수 있지만 각 유형의 분포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음을 볼 때 시기적인 차이와 함께 강한 지역성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 돌널무덤의 구조적인 측면과 출토유물의 성격을 통해서 볼 때 그 시대적 편년은 대략 한반도에서의 청동기문화와 궤를 함께 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북지방의 강계 풍룡동0224)이나 사리원 상매리0225) 등지에서 출토된 단추와 화살촉 등은 우리 나라 청동기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오는 표지적 유물들이고0226) 금강유역의 유적으로부터는 순수 청동기문화의 마지막 양상을 살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돌널무덤의 존속기간은 고인돌문화와는 상당 기간 겹치게 되지만 고인돌보다는 적어도 1∼2세기 가량 일찍 반도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된다.
0218) | 정찬영,<북창군 대평리유적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3, 사회과학출판사, 1990), 213∼21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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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9) | 金永培·安承周,<扶餘松菊里 遼寧式銅劍出土 石棺墓>(≪百濟文化≫7·8, 公州師大, 1975). 당시에는 1기만 조사되었으나 1992년 국립공주박물관에 의한 주변 발굴에서 3기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
0220) | 有光敎一,≪朝鮮磨製石劍の硏究≫(京都大 文學學 考古學叢書 2, 1959), 59∼62쪽. |
0221) | 趙由典,<慶南地方의 先史文化>(≪考古學≫5·6, 韓國考古學會, 1979), 1∼140쪽. |
0222) | 池健吉,<墓制 Ⅱ(石棺墓)>(≪韓國史論≫13, 國史編纂委員會, 1983), 230∼254쪽. |
0223) | 金載元,<扶餘·慶州·燕岐出土 銅製遺物>(≪震檀學報≫25·26·27, 1964), 285∼298쪽. |
0224) | 有光敎一,<平安北道江界郡漁雷面發見の一箱式石棺と其副葬品>(≪考古學雜誌≫31-3, 日本考古學會, 1941), 162∼171쪽. |
0225) |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황해북도 사리원시상매리 석상묘조사보고>(≪고고학자료집≫2, 1958), 41∼42쪽. 황기덕,<1958년춘하기 어지돈관개공사구역 유적정리간략보고(Ⅱ)>(≪문화유산≫1959-2), 67∼77쪽. |
0226) | 尹武炳,≪韓國靑銅器文化硏究≫(藝耕産業社, 1991), 92∼9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