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요동중심설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는 權擥의≪應制詩註≫에 잘 나타나 있다. 권람은 낙랑을 압록강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箕子의 건국지를 靑州(遼東, 遼西)로 비정하여 고조선의 중심지를 요동지역으로 파악하였다. 이후 洪汝河는≪東國通鑑提綱≫에서 眞番을 遼陽에 비정하고 浿水도 遼河로 비정하여 고조선의 요동중심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申景濬과 李瀷 등도 고조선의 중심을 요동지역으로 비정하였다.189) 이러한 견해는 申采浩·崔南善·安在鴻·鄭寅普로 이어졌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 있었다는 요동중심설은 1960년대 이후 북한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190) 북한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에 관하여 요동설·평양설·이동설 등이 제기되어 논란을 벌였는데 그 결과 요동설이 채택되었다.191) 북한학계의 공식적 견해로 자리잡은 요동중심설은 실학자들의 연구성과와192) 이를 계승한 민족주의 사학자로 지칭되는 신채호와 정인보 등의 견해를 계승한 것이다. 또한 평양설193) 및 이동설도194) 정약용과 안정복 등 실학자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여 일본인 학자들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인정하는 선상에서 제기된 것으로서 이 주장을 반드시 민족의 자존심과 연결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요동중심설은 大凌河를 고조선의 국경선인 浿水로 보고 於尼河를 王儉城의 沛水라고 비정하여 고조선의 중심지를 오늘날의 蓋平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리고 기원전 7세기 이전에는 蓋國·靑邱國·肅愼國 등의 국명이 있었으나 기원전 7세기 이후에는 조선만이 보이는데 이는 여러 나라를 통일한 후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灤河 좌안지대인 昌黎에 고조선의 도읍지가 언제인가 있었다고 보았다.195) 이같은 견해는 북한학계의 공식적 주장으로서 관련 유적·유물 등에 대한 고고학적 재해석 등이 보완되어 나름의 체계를 견지하며 최근까지 유지되었다. 우리 학계에서는 일부 학자가 이같은 견해를 수용하여 이를 부연하였다.196)
189) | 韓永愚, 앞의 책, 207∼21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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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 徐榮洙, 앞의 글, 28∼32쪽. |
191) | 김기웅 정리,<고조선문제에 대한 토론개요>(≪력사과학≫6, 1961). 장주협 정리,<고조선령역에 대한 학술토론회>(≪력사과학≫2, 1963). 리병선 정리,<고조선문제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한 학술토론회>(≪력사과학≫5, 1961). 허종호 정리,<고조선의 위치와 령역에 대한 학술토론회>(≪력사과학≫5, 1961). 趙法鍾,<북한 학계의 고조선연구>(≪북한의 고대사 연구와 성과≫, 대륙연구소, 1994), 134∼171쪽. |
192) | 성호 이익, 박지원, 이규경 등이 요동설을 주장하였다. |
193) | 북한학계의 대표적인 평양설 주장자는 도유호를 중심으로 한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의 성원들로서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劍鉾文化와 평양 일대에서 발굴된 중국식 유물 등을 주요 논거로 들었다. |
194) | 북한학계에서 이동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정찬영을 들 수 있다. 그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요동지역에서 중국세력의 확장에 의해 현재의 평양지역으로 이동하였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
195) | 리지린, 앞의 책, 83∼96쪽. |
196) | 尹乃鉉,≪古朝鮮硏究≫(一志社, 1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