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조선의 문화와 사회 경제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인 衛滿朝鮮을 포함하는 고조선의 문화내용과 성격을 규명하는 데는 부족한 문헌사료보다는 고고학적인 자료에 더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라는 것도 그 자체의 확실한 명문이 나와 있지 않는 한, 그 주체가 고조선인지 아닌지를 밝혀내기 어렵다. 하지만 문헌사료에서 일정한 범위가 정해지면 그 지역의 문화상이 어떠한지 고고학에서 잘 밝힐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고조선 연구는 문헌사료가 부족하여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의 강역을 추정하는 등의 예가 많다. 이러한 탓으로 고조선 연구는 어려움이 많은 편이다. 우선 고조선의 문화상을 밝히려할 때 먼저 해결되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우리 나라에서는 고조선을 檀君朝鮮·箕子朝鮮·위만조선의 3단계로 인식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고조선이라는 용어와 이 세 가지의 조선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북한에서는 기자와 위만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이 청동기시대에 출현한 국가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그 존속시기를 기원전 1000년대 전반기의 청동기문화에서 시작하여 철기문화시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이들의 표지적인 문화로 각각 美松里(평북 의주군)-崗上(遼寧 旅大市)시기(전기:기원전 8∼7세기)와 細竹里(평북 영변군)-蓮花堡(遼寧 撫順市)유형(후기:기원전 3∼2세기)으로 나눈 바 있다.291) 그러나 이러한 편년은 미송리-강상시기와 세죽리-연화보유형문화 사이에 4세기 정도의 시간폭을 대표할 만한 문화의 공백에 대한 뚜렷한 해석이 없어, 고조선이라는 하나의 정치체가 일관되게 존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두 문화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으므로 최근에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고조선의 고고학적 문화를 고조선 전기문화의 형성(미송리-강상시기)→고조선 전기문화의 발전→고조선 후기문화의 형성→고조선 후기문화의 발전(세죽리-연화보유형문화, 평양지역의 세형동검문화)으로 이해하여 이전 연구의 단점을 보완하고 있다.292) 이에 비하여 남한에서는 고조선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293) 고조선에 단군조선만을 포함시키는 등294) 여러 의견이 있어서 그 용어의 사용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을 줄이고 기본적인 개념을 확정시키는 일이 고조선 연구에 필요할 것이다.
둘째로 고조선의 강역문제는 고조선에 관한 여러 문제 중 가장 이견이 많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문헌 자료로 볼 때 여러 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고고학적인 강역의 추정에도 여러 이견이 있다. 대체로 積石塚(돌무지무덤)과 石棺墓(돌상자무덤), 미송리형토기, 細文鏡(잔 줄무늬거울), 琵琶形銅劍(요령식 또는 만주식 동검)의 분포가 고조선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일부의 주장처럼 비파형동검과 같은 하나의 유물로만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하는 경우 문제점이 많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고조선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유적을 발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한계가 있다. 중심지와 관련된 문제는 고고학적 발굴뿐 아니라 문헌 자료가 절대로 부족하다. 그나마 남아있는 자료도 대부분 단편적이고 애매모호하여 고조선의 실체(정치체제)를 규명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세번째로 문헌에 나타나는 고조선의 시간적·공간적 범위와 고고학상 나타나는 문화적인 영역의 시간적·공간적인 범위는 반드시 동일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어느 정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고조선의 강역에 관해서 학자간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더욱 심도있게 그 문화와 사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문헌에 나타나는 고조선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정치적인 변화를 거치는데 이러한 변천과 아울러 고고학적인 문화도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문화의 변화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의 변천 또는 발전과정 사이에 어떠한 연동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그러자면 우선 고고학상에 보이는 고조선과,≪史記≫朝鮮列傳 등의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인 위만조선과의 관계를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비파형동검(또는 遼寧式銅劍)의 사용이 끝날 무렵인 기원전 5∼4세기경에는 요동지방과 우리 나라 서북지방에 철기가 도입되기 시작하고,295) 기원전 3∼2세기부터는 明刀錢과 고도의 철제 농기구가 나오는 세죽리-연화보유형의 문화와 細形銅劍문화가 발생한다.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은 고고학상으로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전기(종전의 초기 철기시대)로 나누어지는 지표유물이 된다. 특히 세형동검의 경우 한반도에 국한되어 나타나며 요령지방과는 문화적으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한반도에도 정치·문화적으로 일정 정도 변혁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고고학적인 문화의 변화와 문헌상에 보이는 정치적인 변화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위만조선까지 포함하는 문헌상의 고조선의 변천은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시기로 先秦文獻에 단편적으로 보이는 고조선의 이름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기록으로≪管子≫揆道편과 輕重甲편에 고조선의 특산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296)≪관자≫가 쓰여진 것은 기원전 4세기이지만 이 기록의 무대는 기원전 7세기이므로 적어도 기원전 7∼4세기 무렵에 고조선이 존재하여, 중국과 교역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두번째 시기로 燕과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시기이다. 그것은≪三國志≫에 인용된 魏略에서 볼 수 있는데, 연이 稱王하자 고조선도 왕을 칭하고 연과 대립하다가 燕將 秦開의 침략을 받고 그 세력이 한풀 꺾이는 시기를 말한다. 물론 기록에서 특정한 시기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연의 전성기가 昭王대임을 감안한다면 기원전 4세기 무렵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 연의 철기 제작기술이 도입되었다고 보여진다. 마지막 시기는 準王이 衛滿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위만조선이 개창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위만조선은 기원전 198년에 성립되어 기원전 108년까지 존속하였다.
한편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하여 고조선의 발전과정을 5단계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 小國 형성 이전의 族長社會를 기원전 15∼12세기, 소국시기의 고조선을 기원전 12세기 말∼9세기, 소국연맹시기의 고조선을 기원전 8∼5세기, 소국병합시기의 고조선을 기원전 5세기 말∼4세기 말로, 평양으로 이동한 후의 고조선을 기원전 4세기 말∼위만조선 이전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편년 설정은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사료를 조화시키려 한 것으로 보이나 소국의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에 관하여 또다른 논의를 불러올 수 있다. 이를 다시 고고학적 문화로 분류한다면 요동지역의 청동기문화의 발전이 소국 이전의 족장사회, 고조선 이전의 비파형동검문화를 소국발전시기, 비파형동검의 典型과 변형이 쓰여지는 시기가 소국연맹시기, 초기 세형동검 또는 중간형의 동검이 쓰이는 시기가 소국병합시기이며, 그 이후 평양천도 후의 고조선은 세죽리-연화보유형문화와 평양지역의 세형동검문화로 이분된다.297)
강역에 대해서는 학자간에 너무나 많은 의견이 존재해서 여기에서는 일일이 소개할 수 없지만, 대체로 요하 이동에서 평양지역까지를 고조선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요하 이동에서 평양지역의 청동기문화의 발생·발전과 철기문화의 도입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291) | 이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사회과학출판사, 1973). 최택선·이란우,≪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사회과학출판사, 1976).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조선전사≫2 고대편(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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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 박진욱,≪조선고고학전서:고대편≫(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8). |
293) | 金貞培,<古朝鮮의 再認識>(≪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高麗大 出版部, 1985). 김정배는 고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濊貊朝鮮)으로 나누어 보았다. |
294) | 李基白,<古朝鮮의 國家형성>(≪韓國史 市民講座≫2, 1988). 고조선에 단군조선만을 포함시키는 견해는 기자의 東來를 부인하고 기자조선이라고 되어있는 사서의 기록을 단군조선 이래의 고유의 왕조가 지속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
295) | 崔盛洛,<鐵器文化를 통해서 본 古朝鮮>(≪國史館論叢≫33, 國史編纂委員會, 1992), 59쪽. |
296) | ≪管子≫揆道 “吾聞海內玉幣有七莢… 發朝鮮之文皮”. ≪管子≫輕重甲 “桓公曰 四夷不服… 發朝鮮不朝… 一豹之皮, 然後八千里之 發朝鮮 可得而朝”. ≪山海經≫에도 조선의 위치에 대한 언급이 있다. ≪山海經≫海內北經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山海經≫海內經 “東海之內 北海之隅 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畏人愛之”. |
297) | 李鍾旭,≪古朝鮮史硏究≫(一潮閣, 19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