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Ⅲ. 부여2.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2) 부여의 대외관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1. 한국 고대의 정치발전 단계론
        • 2. 국가 형성 이론의 한국사 적용문제
        • 3. 초기국가의 성격
          • 1) 국가 기원 및 형성이론
          • 2) 군장사회와 국가
      • Ⅱ. 고조선
        • 1. 고조선의 국가형성
          • 1) 고조선의 건국신화
          • 2) 동이족과 그 문화권
            • (1) 지석묘문화
            • (2) 비파형청동단검문화
          • 3) 고조선의 주민과 예맥
          • 4) 고조선의 건국연대
          • 5)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 (1) 고조선의 위치문제
            • (2) 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영역
        • 2. 고조선의 변천
          • 1) 고조선사회의 국가적 성장
          • 2) 위만조선의 성립과 변천
            • (1) 위만조선의 성립
            • (2) 위만조선의 국가적 성격
          • 3)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
          • 4) 한사군의 설치와 그 변천
            • (1) 한사군의 설치와 구성
            • (2) 한사군의 성격과 변천
        • 3. 고조선의 문화와 사회 경제
          • 1) 고조선 전기와 청동기문화
            • (1) 비파형동검 이전의 청동기문화
            • (2) 비파형동검시기의 고조선문화
          • 2) 후기 고조선과 철기문화(기원전 4∼2세기)
            • (1) 기원전 4세기 고조선지역
            • (2) 기원전 3∼2세기의 철기문화
          • 3) 고조선의 사회경제
            • (1) 사회성격
            • (2) 경제성격
      • Ⅲ. 부여
        • 1. 부여의 성립
          • 1) 부여사의 성격
          • 2) 부여의 기원과 건국설화
            • (1) 부여 명칭의 기원
            • (2) 부여족의 기원
            • (3) 부여의 선주민문화와 한대 부여문화
            • (4) 건국 연대
          • 3) 부여의 영역과 지리적 특성
            • (1) 3세기 부여의 영역
            • (2) 부여국 왕성의 위치
        • 2.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
          • 1) 부여의 성장
            • (1) 부여의 기원(부여·북부여·동부여)
            • (2) 부여의 성장
          • 2) 부여의 대외관계
            • (1) 고구려와의 관계
            • (2) 중국과의 관계
            • (3) 부여의 쇠퇴와 부흥운동
        • 3. 부여의 정치와 사회
          • 1)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
            • (1) 중앙통치조직
            • (2) 지방통치조직
          • 2) 사회와 경제
            • (1) 신분제도
            • (2) 법률과 형벌
            • (3) 경제생활
        • 4. 부여의 문화
          • 1) 신앙과 제의
          • 2) 생활 풍습
          • 3) 예술-건축, 공예, 기타
      • Ⅳ. 동예와 옥저
        • 1. 동예의 사회와 문화
          • 1) 동예의 위치와 변천
          • 2) 동예의 사회와 문화
        • 2. 옥저의 사회와 문화
          • 1) 옥저의 위치와 변천
          • 2) 옥저의 사회와 문화
      • Ⅴ. 삼한
        • 1. 삼한의 정치와 사회
          • 1) 진국과 삼한
          • 2) 삼한의 정치
            • (1) 소국의 정치권력
            • (2) 소국연맹체의 형성
          • 3) 삼한의 경제와 사회
            • (1) 농경생활
            • (2) 교역활동
            • (3) 계층 분화
        • 2. 삼한의 문화
          • 1) 삼한의 생활과 풍속
          • 2) 삼한의 유적과 유물
            • (1) 철기
            • (2) 토기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중국과의 관계

 부여와 중국과의 관계는 초기 단계부터 비교적 우호적이었으며, 일시적으로 정략결혼과 공수동맹이 맺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5호16국의 혼란기에 들어가면서 부여는 중국 동북면에서 크게 강성해진 慕容氏 燕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어 그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서한 초에는 흉노가 강대하여 북부의 예맥족은 중국과 隔絶되어 漢왕조와는 관계가 비교적 적었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한 후에 부여와 한왕조는 점차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나중에는 예속관계를 맺어 부여는 한왕조로부터 그 國君에게 주는 印綬를 받았다. 서한시대 말기에 왕위를 찬탈한 王莽은 건국한 원년(기원 9)에 새로운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사신을 사방에 보내어 옛날 한의 인수를 거두어 들이고, 다시 새로운 왕실의 인수를 주었다. 이 때 “동으로 나간 사신은 현도·낙랑·고구려·부여에 이르렀다”521)고 한다. 이 기사를 통해 부여는 이미 왕망 이전부터 서한왕조의 인수를 받았으며, 따라서 왕망 때에 이르러 改授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와 한왕조와의 관계가 진일보하게 된 것은 후한 초부터였다. 우선≪후한서≫동이열전 부여조와 본기에 의거해서 후한과의 교섭관계를 정리하면 다음의<표 1>과 같다.

연 대 관 련 내 용
1. 光武帝 建武 25년(49) 夫餘王遣使奉貢 光武厚答報之 於是 使命歲通
2. 安帝 永初 5년(111)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 寇鈔樂浪 殺傷吏民 後復歸附
3. 安帝 永寧 원년(120) (夫餘王)乃遣嗣子尉仇台 詣闕貢獻 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
4. 安帝 延光 원년(122) 夫餘王遣子(尉仇台) 將兵救玄菟 擊高句麗 馬韓 穢貊 破之
5. 順帝 永和 원년(136) 其王(夫餘王)來朝京師(洛陽) 帝作黃門鼓吹角抵戱
6. 桓帝 延熙 4년(161) (夫餘王)遣使朝賀貢獻
7. 桓帝 永康 원년(167) 王(夫餘王)夫台 將二萬餘人 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 斬首千餘級
8. 靈帝 熹平 3년(174) (夫餘)復奉章貢獻

<표 1>부여와 후한의 외교관계 기사

 후한정권은 건무 8년(32)에 동북의 각 종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祭彭은 41년에 요동태수가 되어 은혜를 베풀고 위엄을 부렸는데 이를 계기로 각 종족은 한왕조와 우호관계를 회복하였다. 동북지구에서 세력이 강대했던 부여는 49년에 한에 降附하여 후한왕조와의 관계 회복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겨울 부여왕은 사신을 보내어 한조정에 봉헌하였는데 한의 통치자는 후하게 보답하였고, 이로 인하여 “命하여 사신이 해마다 통하게 했다”522)고 한다.

 대외적으로 부여는 남으로부터 고구려의 위협과 서쪽 유목민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부여는 이 양대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을 꾀하였다. 중국측도 선비족과 고구려의 결속을 저지하고 이들을 제압하는 데 부여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에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기간에 걸쳐 부여와 한왕조는 정상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한왕조는 부여에 대해 두터운 예우로써 대접하였다.<표 1>에서 보듯이 120년에는 부여왕자 尉仇台가 후한 낙양에 가서 공물을 바쳤고, 2년 뒤에는 위구태를 현도성에 보내어 고구려의 침입에 맞서 한을 구원하였다. 136년에는 부여왕이 친히 京師에 가서 조공하였는데, 이 때 한의 통치자는 헤어질 때에 ‘黃門鼓吹와 角抵戱를 해서 보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이례적으로 접대를 하였다. 또한 역대 부여왕이 죽은 후에는 玉으로 만든 관을 썼는데, 한왕조가 “미리 옥갑을 현도군에 가져다 놓고 왕이 죽으면 현도군에서 가져다가 쓰게 했다”523)는 것은 부여와 한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부여는 후한과의 화친관계를 발전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고구려에도 사신을 보냈는데, 이는 고구려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세기는 부여와 고구려가 서로 견제하면서 요동평야로 진출을 시도하였던 시기이다. 현도·낙랑 양군은 명목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요동군에 흡수되어 있었다. 이 당시는 후한왕조가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동태수를 중심으로 하는 군현세력과 부여·고구려 三者가 요동평원을 사이에 두고 각축을 벌이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2세기 초에 이르러 부여와 후한 사이에는 일시적인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서에 기재된 것을 보면 부여와 후한왕조 사이에는 두번의 마찰과 전쟁이 있었다. 첫번째는 111년에 부여왕이 “步騎 7·8천 인을 거느리고 낙랑을 노략질하고, 吏民을 살상한 후에 다시 귀부하였다”고 한다.524) 다음으로는 167년에 부여왕 夫台가 2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약탈하니 현도태수 公孫域이 그것을 격파했다고 한다. 이들 기사는 부여와 한과의 우호적 관계를 생각할 때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되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174년부터 다시 국교가 회복되어 부여왕은 “다시 奉章 공헌하였다”525)고 한다.

 부여와 후한 양측 사이에는 그 뒤에도 밀접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2세기 말경 公孫度이 요동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동방의 패자로 군림했을 때 부여는 후한세력과의 관계 때문에 화친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공손탁의 宗女와 결혼하여 일종의 혼인동맹을 맺었다. 이후 魏가 공손씨를 멸망시킨 다음 幽州刺史 毌丘儉을 보내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에(244∼245) 현도태수 王頎가 부여를 방문하였고, 이에 부여의 權臣인 大使 位居는 大加를 시켜 위군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군량을 제공하였다.

 한편 부여는 장기간 현도군의 관할 아래 있었는데, 한 무제시기에는 부여의 요청에 따라 요동군 관할로 바뀌게 되었다.526) 그리하여 한왕조의 명령과 征調에 대해 부여는 충실히 이를 집행하였다. 121년 마한·예맥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포위하였을 때 부여왕은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2만의 대군을 이끌고 가서 힘을 합해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5백여 級을 참수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고구려가 처음으로 중국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예맥이 모두 복종하니, 동쪽 변방에 일이 적어지게 되었다”527)고 하였다.

 이처럼 중국과 관계를 맺고 국가적 성장을 지속하던 부여는 285년에 이르러 요하 상류에서 일어난 선비족 출신의 慕容廆528)의 침략을 받아 국가적인 위기에 처하였다. 부여는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 왕 依慮는 자살하였으며 많은 자제들이 沃沮(北沃沮)529)로 망명하였다. 한편 부여의 본국은 의려가 자살한 다음 해에 의려의 아들 依羅에 의하여 나라가 재건되었으나 이 재건된 부여국은 이미 그 옛날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무력한 것이었다.

521)≪漢書≫권 99, 列傳 69, 王莽.
522)≪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夫餘國.
523)위와 같음.
524)위와 같음.
525)위와 같음.
526)이는 부여가 현도군이 아니라 요동군을 통하여 후한 왕실과 거래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부여와 현도군 사이의 관계가 오래 전부터 악화되어 있었고 167년 부여군의 현도 공격도 이와 관계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부여사>,≪조선전사≫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9, 147쪽).
527)≪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高句麗.
528)모용씨는 선비족으로 ‘廆’ 때에 요하 상류에서 일어나 앞서 부여를 공파하여(285) 東走케 하고, 또 요서지방을 침략하여 棘城(현 錦州부근)지방에 도읍하더니(294) 그의 아들 慕容皝은 스스로 ‘燕王’이라 일컫고 얼마 아니하여 龍城(지금의 朝陽)으로 천도하여(342) 위세를 떨쳤으므로 바로 이 해에 모용황은 대대적으로 고구려에 침입하여 고국원왕을 달아나게 하고, 용성 천도 4년 후(346) 마침내 부여까지 침략하였다.
529)沃沮를 동해안지방으로 비정하는 설(李丙燾, 앞의 글)과 간도지방의 北沃沮(池內宏,<夫餘考>,≪滿鮮史硏究≫上世篇 1, 東京;祖國社, 1951, 459·462∼464쪽)로 보는 설이 있는데 대체로 두만강유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魏書≫권 100, 고구려전에 보이는 435년경 ‘東至柵城’했다는 柵城이 바로 이곳에 설치한 고구려의 鎭城일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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