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옥저의 사회와 문화
1) 옥저의 위치와 변천
≪삼국지≫동옥저조의 기록에 의하면 沃沮는 개마대산의 동쪽 大海에 접해 있으며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 천 리나 되고 북으로는 挹婁·夫餘와 접하고 남으로는 濊貊과 접한다고 하였다. 옥저는 동옥저로도 불렸으며 남과 북에 각각의 중심지가 있어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하였다. 동옥저는 넓은 의미에서 옥저의 총칭으로 사용되었으나 좁은 의미에서는 옥저의 중심세력인 남옥저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남옥저의 중심지인 옥저성은 현재의 함흥지역이며 남옥저와 동예의 경계는 정평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옥저는 남옥저에서 북으로 8백여 리 떨어져 있었으며 북옥저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길림 연변지구설, 훈춘설, 백두산(장백산) 북쪽지역설, 흑룡강성 영안현 동북지역설, 두만강 남쪽지역설 등으로 다양하다. 문헌 자료 이외에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綏芬河유역의 東寧縣 團結遺蹟을 옥저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으로 간주하고, 이와 유사한 문화유형이 분포된 老爺嶺 이동, 興凱湖 이남을 북옥저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690) 이는 옥저의 범위를 張廣纔嶺 동쪽 牧丹江유역까지 확대시켜 해석하는 데691) 대한 비판으로 鏡泊湖 이남, 英額嶺 이동의 두만강 북쪽지역에 북옥저를 비정하는 견해와도 일부 통한다.692) 북옥저의 중심지는 置溝漊라고 하였는데 치구루의 위치에 대해서도 두만강 하류 琿春설,693) 함북 鏡城설,694) 間島 局子街설695) 등 여러 견해가 있으나 琿春설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삼국지≫毌丘儉傳에는 치구루가 아니라 買溝(漊)로 되어 있어 치구루의 오기로 해석되기도 하나, 매구루는<광개토대왕릉비>의 味仇漊와 같은 곳으로 치구루와는 다른 곳이라는 견해도 있다.696)
남옥저의 중심지였던 함흥지역의 정치집단은 임둔의 중요세력의 하나였다. 임둔지역의 정치집단들은 기원전 2세기경 衛滿朝鮮에 복속되었다가 기원전 108년 漢의 郡縣으로 편제되었다. 이 때 함흥지역에는 夫租縣이 두어졌으며 옥저의 이름은 부조현에서 비롯되었다. 부조현은 기원전 82년 임둔군의 폐지로 현도군에 소속되었다가 기원전 75년 현도군이 만주 興京 老城방면으로 이동한 후(제2현도군) 낙랑군 東部都尉에 소속되었다.697) 그리고 기원후 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 일시 漢의 侯國으로 봉해졌으나≪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기원후 56년 고구려 太祖王의 동해안 진출로 沃沮城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後漢書≫동이전 고구려조에는 元初 5년(118) “고구려가 濊貊과 더불어 다시 현도군을 침략하고 華麗城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옥저 복속시기도 이 시기로 간주하려는 견해가 있으나 동예에 속한 華麗縣 공격을 옥저 복속과 동일한 시기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한군현 설치 초기의 부조현의 소속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대다수의 견해들이≪삼국지≫동이전의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현도군이 처음 설치된 기원전 107년부터 부조는 현도군 소속이었던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군현 설치 초기 부조현은 임둔군에 속했으나 군현통치의 어려움으로 인해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되면서 옥저를 포함한 임둔군 소속 7현이 현도군으로 이속되었다는 비판적 견해가 있다.698) 부조현의 소속에 대한 이같은 이견들은 현도군과 임둔군의 위치 비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옥저를 현도군 군치로 보는 입장에서는 1차 현도군의 범위를 함경도 일대에 비정하거나 또는 함경도 전역과 고구려 일부지역을 현도군에 포함시키고 있다. 또는 현도군은 중국 무순에서 함흥까지의 긴 혁대 모양의 공도에 설치된 것으로699) 현도군의 설치 목적은 요동방면으로부터 渾江 지류를 거쳐 압록강 중류 集安에 이르고 다시 낭림산맥을 넘어 동해안에 이르는 교통로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고구려를 제압하는 것이므로 이 교통로의 도달지점인 옥저가 현도군에 포함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700) 이처럼 옥저=현도군 소속설은 공통적으로 옥저와 임둔군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옥저=임둔군 소속설은 임둔군을 함경도 일대에, 1차 현도군을 압록강 중류 일대의 고구려지역에 비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도군의 군치인 고구려현은 현재의 집안지역이며, 임둔군에 속한 동옥저는 거리상으로도 집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1차 현도군과는 무관하다는 해석이다.701)
옥저성이 임둔군에 속한 적이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고 문헌기록의 불분명한 부분을 보완하는 데는 고고학 자료가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진번군과 임둔군이 두어진 곳은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던 진번과 임둔지역이라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 그런데 위만조선에 복속되었거나 위만조선과 통교했던 지역에서는 고고학상 위만조선의 중심부에서 출토되는 것과 유물형태와 유물조합상이 유사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예를 들면 진번지역으로 추정되는 황해도 봉산군 송산리와 배천군 석산리 등지에서 출토되는 것과 동일한 기원전 2세기 경의 청동기·철기유물들이 함경남도의 함흥시 이화동 등지에서도 출토되었다(앞의<표>참조).702) 그리고 진번·임둔과 함께 등장하는 기원전 2세기경의 중요 정치집단으로 진국이 있다. 진국은 위만조선의 방해로 漢과 직접 통교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辰國의 세력권으로 추정되는 충남과 전라도지역에서도 황해도 송산리나 함흥 이화동과 흡사한 일괄유물이 출토되었다.703) 이러한 금속제 유물들은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품(prestige goods)으로서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획득되기보다 집단간의 정치 경제적 관계를 매개로 취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동해안지역에서 출토되는 기원전 2세기경의 이같은 금속제 유물들은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던 임둔의 중심지와 범위를 반영하는 유물로 간주될 수 있다. 강원도와 함경도지역을 합하여 이 시기의 청동기 및 철기유물의 분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은 함흥과 영흥 일대이다. 그리고 유물의 중요 분포범위는 북쪽은 함남 신창, 남쪽은 강원도 문천으로 함흥을 중심으로 남북 각 60∼70㎞ 범위에 걸쳐 있으며, 금속제 유물의 분포밀도는 함흥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질수록 낮아진다. 따라서 동해안 일대에서 임둔의 중심지를 비정한다면 고고학 자료상으로는 함흥과 영흥 일대가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압록강 중류의 集安과 위원 용연동·평북 세죽리 그리고 두만강유역의 함북 무산 호곡동·회령 오동 등지에서 출토되는 기원전 3∼2세기경의 유물은 이른바 明刀錢유적으로 알려진 戰國계 철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집안에서 출토된 청동유물704) 역시 고조선의 세형동검과 다른 요동계통의 것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동북지방의 청동기문화의 지역별 분포상으로도 함경남도 동해안 일대는 금야-토성리문화유형의 분포권으로 두만강유역(오동유형, 초도유형)과는 세부적으로 구분되고 있다.705) 이같은 고고학 자료들은 두만강유역과 압록강유역의 정치집단들이 진번과 임둔 및 대동강유역의 고조선과는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졌음을 뜻한다. 이러한 현상은 문헌기록을706) 통해 위만조선 고지에 낙랑군·진번군·임둔군이 두어졌으며, 압록강과 혼강유역의 고구려지역 즉 예맥사회에 현도군이 두어졌다는 주장과도707) 합치되는 면이 많다.
종족상으로도 부조는 東濊와 함께 濊族에 속하며 貊族이나 韓族과는 구분된다. 기원전 1세기 후반 漢이 夫租縣의 邑君에게 준 ‘부조예군’ 인장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군현에서도 함흥의 부조현을 예족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의 군현이 토착 정치집단을 기본단위로 설치된 것이라면 임둔지역 예족사회의 중요세력이었던 부조현만 분리하여 정치 문화기반이 다른 현도군에 소속시켰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욱이 지리적으로 함흥은 임둔의 중심부에 위치하므로 부조현이 현도군에 소속되었다면 함흥과 그 동북쪽 지역이 모두 현도군에 소속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함흥과 영흥에 있던 임둔의 핵심세력을 남과 북으로 양분하여 1년의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른 군에 소속시킨 것이 되는데 그 이유가 잘 납득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집안을 비롯하여 현도군 소속 縣治가 있었던 곳에서 널리 확인되고 있는 平地土城遺址가 함흥지방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도 의문이다.708) 따라서 부조현=현도군 소속설의 중요 근거인≪삼국지≫동이전의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는 기록을 군현설치 초기부터의 사실로 이해하거나 굳이 옥저성을 현도군치로 삼았다고 해석해야 할 근거는 없다. 실제 기원전 82년 임둔군의 폐기로 부조현을 비롯한 임둔의 중요 현들이 일시 현도군에 소속된 적이 있으므로 이 기록은 동옥저의 연혁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옥저성이 낙랑군 동부도위에 소속되기 직전에는 현도군에 속하였다는 사실을 적기한 것으로 생각된다.709)
이처럼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 해안지대의 정치집단들은 기원전 2세기경까지도 임둔이라는 공동의 정치세력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기원후 1세기 전반 동부도위가 폐지되기까지 거의 동일한 정치 문화적 변화 과정을 겪어 왔다. 그런데 3세기 중엽에 이르러 부조현이 옥저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와 동시에 함흥과 그 북쪽지역의 주민들은 두만강유역의 주민들과 합쳐져 옥저로 통칭되는 반면 함흥 남쪽의 주민들은 동예로 칭해지고 있다. 이는 한반도 동해안의 예족사회가 옥저와 동예로 나뉘어지고 옥저성의 이름이 함흥 이북 동해안과 두만강유역의 주민을 통칭하는 옥저족의 개념으로까지 확대된 결과이다. 함흥지역 주민이 두만강유역의 주민과 합해져 동일한 종족단위로 인식된 것은 고구려의 동해안 진출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태조왕대로부터 3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어온 고구려의 세력확장 결과 강원도 북부와 함경도 동해안 그리고 두만강유역이 모두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 갔다. 이 과정에서 漢 이래 개척되어온 집안-강계-낭림산맥(薛寒嶺, 牙得嶺)-장진-황초령-함흥으로 이어지는 압록강 중류유역과 동해안을 연결시키는 교통로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이 교통로가 북으로 연장되어 함경도 동해안과 북옥저를 거쳐 고구려로 되돌아 오는 순환코스가 성립되었던 것같다. 魏의 正始 6년(245)) 毌丘儉의 군대가 옥저방면으로 달아난 고구려 東川王(位宮)을 추격한 경로는710) 바로 이 지역의 통치과정에서 이전부터 고구려가 활용해온 동해안 북부 교통로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동해안 교통로를 통해 남옥저와 북옥저가 하나의 통치단위로 운용되었고 이것이 3세기대의 역사서에서 남북옥저가 합해져 동옥저라는 단일한 세력집단 내지는 종족집단처럼 나타나게 된 배경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245년 관구검의 명령을 받은 玄菟郡 태수 王頎가 東川王을 추격하여 옥저에 이르러 3천 여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에서 보이듯이 魏軍에 의해 옥저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고 이곳에 구축된 고구려의 지배기반도 무너졌다. 이후 285년 길림지역에 있던 부여국이 慕容 鮮卑의 공격으로 왕 依慮가 자살하고 나라가 망하게 되자 왕의 자제와 부여국의 중심세력들이 북옥저로 옮겨와 다음해 晋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할 때까지 머물렀다. 부여 왕족의 북옥저 이주가 정복에 의한 것인지 이전부터의 교류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이 때 북옥저에 잔류한 부여족을 중심으로 東夫餘세력이 형성되었으며711) 북옥저의 중심지인 치구루에는 동부여의 왕성인 餘城이 두어졌다.712) 그리고 410년 고구려가 동부여를 멸망시킨 후 이 지역에는 고구려 柵城이 두어졌고, 고구려 멸망 후 渤海시기에는 東京 龍原府가 설치되었다. 책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훈춘 八連城(半拉城) 일대로 비정하는 종래설에 대해 이곳에서 5리 떨어진 溫特赫部城으로 비정하는 설713) 과 함북 청진으로 비정하는 새로운 설이 있다.714)
690) | 李 强,<沃沮, 東沃沮考略>(≪北方文物≫1981-1), 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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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 | 匡 瑜,<戰國至兩漢的北沃沮文化>(≪黑龍江文物叢刊≫1982-1), 27쪽. |
692) | 日野開三郞,≪東北アシア民族史≫上, 日野開三郞 東洋史學論集 14(東京, 三一書房, 1988), 104쪽. |
693) | 島山喜一,<渤海東京考>(≪史學論叢≫京城帝大文學部 文學會論纂 7, 1938). 박시형,≪발해사≫(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9). |
694) | 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1976), 229쪽. |
695) | 池內宏,<曹魏の東方經略>(≪滿鮮史硏究≫ 上世篇 1, 祖國社, 1951), 266쪽. |
696) | 李丙燾, 앞의 책, 204∼205쪽. 盧泰敦,<扶餘國의 境域과 그 變遷>(≪國史館論叢≫4, 1989), 46쪽. |
697) | 李丙燾, 위의 책, 169∼170쪽. |
698) | 李丙燾, 위의 책, 228쪽. |
699) | 和田淸,<玄菟郡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
700) | 田中俊明,<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朝鮮文化硏究≫1, 東京大 朝鮮文化硏究室, 1994), 34∼35쪽. |
701) | 李丙燾, 앞의 책, 195쪽. |
702) | 황기덕,<1958년 춘하기 어지돈지구 관개공사구역유적정리간략보고>(≪문화유산≫, 1959-1). 박진욱,<함경남도일대의 고대유적조사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 |
703) | 충남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전북 장수 남양리유적이 있다. 李健茂,<扶餘合松里遺跡出土 一括遺物>(≪考古學誌≫2, 1990). 池健吉,<長水南陽里出土 靑銅器, 鐵器 一括遺物>(≪考古學誌≫2, 1990). 李健茂,<唐津素素里遺蹟出土 一括遺物>(≪考古學誌≫3, 1991). |
704) | 集安縣文物保管所,<集安發現靑銅短劍墓>(≪考古≫1981-5). |
705) | 김용간·안영준,<함경남도, 량강도 일대에서 새로 알려진 청동기시대유물에 대한 고찰>(≪조선고고연구≫, 1986-1), 25∼28쪽. |
706) | ≪史記≫권 110, 列傳 50, 匈奴의 “漢이 東으로 예맥과 朝鮮을 공략하여 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
707) | 李丙燾, 앞의 책, 169∼170쪽. |
708) | 田中俊明, 앞의 글, 21쪽. |
709) | ≪삼국지≫의 동옥저 관계기록에서 최초에 부조가 임둔군에 편성되었던 사실과 임둔군에서 다시 현도군으로 移屬된 사실이 빠졌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金基興,<夫租薉君에 대한 고찰>,≪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22쪽). |
710) | 池內宏, 앞의 글, 271∼278쪽. |
711) | 동부여의 위치가 동예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韓鎭書,≪海東繹史≫東夫餘考. 丁若鏞,≪疆域考≫東夫餘考. 李丙燾, 앞의 책, 203∼206쪽. |
712) | 池內宏,<夫餘考>(앞의 책). 盧泰敦, 앞의 글, 43∼46쪽. |
713) | 엄장록·정영진,<연변의 주요한 고구려 고성에 대한 고찰-고구려의 책성을 겸하여 논함>(≪연변대학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논문집≫1, 1989). 盧泰敦,<朱蒙의 出子傳承과 桂婁部의 起源>(≪韓國古代史論叢≫5, 1993), 39쪽. |
714) | 채태형,<발해 동경룡원부-훈춘 팔련성에 대한 재검토>(≪력사과학≫19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