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관직
나부체제가 확립되고 왕권이 제가세력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하면서, 연맹체를 운영하기 위한 여러 관부와 관직이 설치되고, 제가들은 계루부왕권의 관료체계에 편입되어 중앙의 군신집단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 관부조직과 관직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당시 중앙정치운영에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관직인 左輔·右輔와 國相 및 中畏大夫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처음에 군신집단을 대표하는 관직은 大輔로서,487) 왕의 측근 군신 중에서 임명되었다. 대보는 대무신왕대에 좌우보로 확대 개편되었다.488) 대무신왕이 후한에 사신을 보내 王號를 회복한 데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듯이,489) 이 때에 계루부왕권이 크게 신장되면서 보다 확대된 연맹체제를 운영하기 위한 관직으로 좌우보제가 실시된 것이다.
좌보·우보는 왕을 보필하고 군신의 대표자로서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관직이었다.490) 그러나 좌우보의 권능은 제한적이었다. 좌우보의 임명과 퇴출이 왕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국정을 관장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예컨대 태조왕 71년(123)에는 좌보 穆度婁와 우보 高福章이 임명되었는데, 당시의 실권은 오히려 왕제 遂成이 장악하고 있었다.491) 더욱이 수성이 왕위를 차지할 야심을 갖자 이를 견제하던 고복장은 결국 수성이 즉위한 후 살해되었으니,492) 이는 좌보·우보의 직능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아직 제가세력의 중앙정계 진출이 활발하지 않은 태조왕대까지 좌우보에 임명된 인물들은 대개 계루부내의 대가나 왕의 측근세력이 중심이 되었다.493) 그런데 차대왕대에는 나부세력의 동향에 변화가 나타났다. 태조대왕 80년 경부터 왕제 수성과 결탁하여 중앙정계에 등장한 환나부·관나부·비류나부 세력이 차대왕 즉위 후에 좌우보·중외대부 등의 요직을 장악한 것이다.494)
제가세력의 중앙정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정치운영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왕권 및 각 나부간에 갈등이 나타났다. 차대왕의 즉위는 태조대왕대의 정치운영에서 소외되었던 비류부를 비롯한 환나부·관나부의 반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차대왕대에도 여전히 그의 즉위에 공을 세운 일부 나부세력에 의해 국정의 운영이 주도되면서, 여기서 배제된 연나부의 반발을 초래하여 결국 연나부 조의 明臨答夫에 의해 차대왕이 시해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495)
이러한 왕권 및 제가세력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나부 제가세력의 전반적인 참여 위에 성립된 새로운 정치운영체제가 國相制였다. 국상은 신대왕 2년에 좌우보를 개편하여 설치되었는데,496) 국상의 기능 역시 좌우보와 마찬가지로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상의 권능은 좌우보보다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때로는 국상에게 군사권이 주어지기도 하였으며, 梁貊 등 예속민집단을 관장하는 권한이 부여되기도 하였다.497) 따라서 최고 관직인 국상에 임명되는 인물의 관등도 우태 이상이었다.
더구나 국상의 임기는 前王의 사망이나 新王의 즉위에 상관이 없이 종신제로서, 그 임명 퇴출이 왕권의 영향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498) 또한 당시 군신집단의 구성원이 제가세력이기 때문에 이를 대표하는 국상은 諸加會議의 의장으로 볼 수 있다.499) 따라서 국상은 대체로 계루부를 비롯하여 전왕족인 비류부나 왕비족인 연나부 등 유력 나부 출신이 차지하였다.
국상제로의 개편은 당시 왕권의 강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500) 제가세력들의 중앙정계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장치가 국상제였다. 동시에 국상은 제가회의를 대표하는 관직으로 왕권에 대한 견제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봉상왕대 국상 倉助利가 군신들과 협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한 것이 그 예이다.501) 그러한 의미에서 국상제는 나부체제에 대응하는 정치운영체제라고 할 수 있다.
中畏大夫는 좌우보나 국상 아래의 관직으로서, 우태 이상의 관등이 임명되었다. 고국천왕이 처음 乙巴素를 등용하여 중외대부에 임명하였을 때, 을파소가 그 관직으로는 일을 처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사양하므로 다시 국상직을 맡겼다는 기사를 보면,502) 국상보다는 직능이 제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외대부는 명칭상에서 중국 관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503) 왕의 근시직을 총괄하는 관직으로 추정된다.
487) | ≪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유리왕 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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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 | ≪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대무신왕 8년 2월·10년. |
489) |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
490) | ≪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대무신왕 8년 2월·10년 및 권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71년 10월. |
491) | ≪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69년 11월. |
492) | ≪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차대왕 2년 2월. |
493) | 左右輔를 桂婁部 출신의 右輔과 4那部 출신의 左輔에 의한 공동정치운영방식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金賢淑,<高句麗 初期 那部의 分化와 貴族의 姓氏>,≪慶北史學≫16, 1993, 30쪽). |
494) | ≪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80년·94년 및 차대왕 2년. |
495) | ≪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차대왕 20년. |
496) | ≪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신대왕 2년 정월. |
497) | ≪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신대왕 2년 및 권 17, 高句麗本紀 5, 중천왕 3년 2월. |
498) | 盧重國, 앞의 글, 14쪽. |
499) | 盧重國, 위의 글, 24∼28쪽. 그러나 國相을 관료적 성격이 강한 군신집단의 長으로 이해한 글은 다음과 같다. 李鍾旭,<高句麗 初期의 左右輔와 國相>(≪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9), 506∼508쪽. 金光洙, 앞의 글(1991), 8∼9쪽. 琴京淑, 앞의 글, 108∼114쪽. |
500) | 盧重國, 위의 글, 24∼28쪽. 李鍾旭, 위의 글, 506∼508쪽. 金光洙, 위의 글, 8∼9쪽. |
501) | ≪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봉상왕 9년. |
502) | ≪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고국천왕 13년. |
503) | 中畏大夫를 漢代의 御史大夫와 비교하는 견해도 있다(金光洙, 앞의 글, 1991, 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