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Ⅱ. 신라의 융성3. 영토의 확장과 왕권강화1) 영토의 확장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1. 건국신화와 시조신화
          • 1) 박혁거세 신화
          • 2) 석탈해 신화
          • 3) 김알지 신화
          • 4) 신라 신화의 특징
        • 2. 성립과 발전
          • 1)≪삼국사기≫초기 기록의 문제점
          • 2) 성립
            • (1) 사로 6촌의 위치와 성격
            • (2) 사로국의 형성
          • 3) 발전
            • (1) 내부체제의 정비
            • (2) 진한 소국의 복속
            • (3) 복속 소국에 대한 통제의 강화
      • Ⅱ. 신라의 융성
        • 1. 나제동맹의 결성과 정치적 발전
          • 1) 내물왕의 등장과 김씨 세습왕조의 성립
          • 2) 나제동맹의 결성
            • (1) 나제동맹 성립 이전의 대외관계
            • (2) 고구려의 남하와 나제동맹의 성립
          • 3) 마립간시대의 정치적 발전
            • (1) 왕권의 강화
            • (2) 축성사업
        • 2. 정치체제의 정비
          • 1) 배경
            • (1)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생산력의 발전
            • (2) 사회의 변동
          • 2) 부체제
            • (1) 부
            • (2) 6부의 기원과 성립
            • (3) 부의 구조와 기능
            • (4) 부대표자 회의-화백
          • 3) 지증왕대
            • (1) 지증왕의 등장
            • (2) 국호 및 왕호의 개정
            • (3) 지방제도의 정비
          • 4) 법흥왕대
            • (1) 율령의 반포
            • (2) 군사제도의 정비
            • (3) 불교의 공인
        • 3. 영토의 확장과 왕권강화
          • 1) 영토의 확장
            • (1) 한강유역의 확보와 백제·고구려와의 항쟁
            • (2) 가야의 병합
            • (3) 대지방민 정책
          • 2) 왕권의 강화
            • (1) 대왕호의 사용과 연호의 제정
            • (2) 상대등과 관부의 설치
            • (3) 화랑도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1. 중국과의 관계
          • 1) 조공의 의미와 대중국 교섭의 전개
          • 2) 수 이전의 중국과의 관계
          • 3) 당과의 관계
          • 4) 대당사행의 유형
        • 2. 왜국과의 관계
          • 1) 시기 구분
          • 2) 4세기 후반∼5세기 초 왜국과의 관계
          • 3) 5세기 왜국과의 관계
          • 4) 6세기 전반 왜국과의 관계
          • 5) 6세기 후반 왜국과의 관계
          • 6) 대수관계의 개시와 왜국과의 관계
          • 7) 대당관계의 개시와 왜국과의 관계
          • 8) 당과의 군사동맹 강요와 왜국의 동향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1) 관등과 관직
          • 2) 행정조직
          • 3) 화백회의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조직
          • 2) 군사조직
          • 3) 교통로 개척과 성곽시설
        • 3. 경제
          • 1) 농업
            • (1) 철제 농기구와 우경의 보급
            • (2) 수전의 확대
            • (3) 맥류 재배의 확산
          • 2) 수공업
          • 3) 상업
          • 4) 토지제도와 조세·요역제도
            • (1) 토지제도
            • (2) 조세·요역제도
        • 4. 사회구조
          • 1) 신라사회의 대본이 되는 골품제도
          • 2) 골품제도의 형성 배경
            • (1) 왕경 6부의 성립과 그 전개과정
            • (2) 율령의 수용과 신분층의 결정화 과정
          • 3) 골품제도의 계층 구성
            • (1) 골제-성골과 진골-
            • (2) 두품제
            • (3) 불완전한 사회성층의 지표-화랑도
          • 4) 골품제사회의 권력구조
            • (1) 경위제-골품제도와의 대응관계-
            • (2) 외위제―지방촌락사회의 계층구조―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1. 가야사 연구의 개관
          • 1) 가야사 연구의 전통
          • 2) 임나 문제의 제학설
            • (1) 임나일본부설의 성격
            • (2) 임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경향들
          • 3) 가야관계의 제학설
            • (1) 문헌사학 계통의 가야사 연구
            • (2) 고고학 계통의 가야문화 연구
        • 2. 가야사의 범위
          • 1) 가야의 명칭과 6가야
          • 2) 변한 및 임나와의 관계
          • 3) 가야사의 시기 구분
      • Ⅵ. 가야의 성립
        • 1. 가야의 풍토와 지리
        • 2. 가야의 건국 설화
          • 1) 가락국 수로왕 신화
          • 2) 대가야국 이진아시왕 신화
        • 3. 가야 제국의 성립
          • 1) 성립 배경
          • 2) 성립 시기
          • 3) 존재 형태
        • 4. 가야연맹의 형성
          • 1) 가야연맹의 성립
          • 2) 전기 가야연맹의 영역
          • 3)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1. 가야연맹의 발전
          • 1) 후기 가야연맹의 형성
          • 2) 대가야 세력권의 확립
          • 3) 후기 가야연맹의 영역
        • 2. 가야연맹의 약화
          • 1) 탁기탄국의 신라 투항
          • 2) 백제의 안라 걸탁성 진주
          • 3) 남가라국(금관국)의 신라 투항
          • 4) 백제의 구례모라성 축성과 안라 경영
        • 3. 가야의 멸망
          • 1) 대가야·안라 이원체제로의 분열
          • 2) 가야연맹의 자구노력과 백제 부용화
          • 3) 가야연맹의 신라 복속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1. 백제·야마토왜의 접근과 중개외교
          • 1) 4세기의 대신라관계
          • 2) 대백제관계의 시작
          • 3) 대야마토왜관계의 시작
          • 4) 대백제관계의 진전
        • 2. 대백제관계의 심화와 부용외교
          • 1) 신라·고구려의 침입과 대백제관계의 심화
          • 2) 야마토왜에 대한 군사기지 제공
          • 3) 백제군의 주둔
        • 3. 백제·신라의 각축과 분열외교
          • 1) 신라의 진출
          • 2) 백제의 직접지배 시도
          • 3) 가야의 멸망
      • Ⅸ. 가야인의 생활
        • 1. 산업의 발달
          • 1) 전기 가야의 산업
          • 2) 후기 가야시기
        • 2. 종교와 풍속
          • 1) 문헌에 보이는 가야의 종교
            • (1) 불교
            • (2) 유교
            • (3) 도교
          • 2) 가야의 신앙과 풍속
            • (1) 소도신앙
            • (2) 태양신앙
            • (3) 산악신앙
          • 3) 유물자료에 보이는 신앙과 풍속
            • (1) 장례 풍속
            • (2) 점복풍속
            • (3) 기타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1) 한강유역의 확보와 백제·고구려와의 항쟁

 진흥왕이 등장할 무렵의 고구려의 사정을 살펴보면 왕위계승 문제로 왕실의 내분이 있어 국내정세가 상당히 불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日本書紀≫에 의하면 欽明天皇 7년(546)에 고구려에서 큰 난리가 있어 죽은 자가 2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하는데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百濟本紀에 이르기를 고구려가 정월 丙午에 中夫人의 아들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나이가 8살이었다. 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正夫人은 아들이 없었고, 중부인이 세자를 낳았는데 그 아버지가 麤群이며, 소부인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버지가 細群이다. 박왕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세군과 추군이 각기 그 부인의 아들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측의 죽은 사람이 2천여 명이나 되는 것이다(≪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7年 春正月).

 이 기록을≪三國史記≫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삼국사기≫에 는 安原王이 죽은 연대를 545년이라고 하여 1년의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안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陽原王은 안원왕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라고 하는 등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때에 고구려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왕실 내부에 치열한 다툼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이로부터 6년 뒤인 양원왕 7년(551;신라 진흥왕 12년)에 신라가 居柒夫로 하여금 고구려의 한강 상류지역을 공격할 때에 그가 승려시절에 은혜를 입은 고구려 僧 惠亮을 맞아오게 되었는데, 이 때 혜량이 거칠부에게

지금 우리 나라는 政亂이 일어나 멸망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원컨대 귀국으로 데려가 주길 바란다(≪三國史記≫권 44, 列傳 4, 居柒夫).

 고 한 것으로 보아 확인된다. 아마 당시의 고구려의 왕실 내부의 다툼으로 인해 전반적인 국내정세가 매우 혼미했을 뿐 아니라 민심도 이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무렵의 백제는 성왕이 수도를 熊津에서 泗沘로 遷都하여 국정을 쇄신하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사비로 천도한 후 22部의 中央官署와 5部·5方의 수도 및 지방 행정제도를 갖추었으며, 謙益과 같은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의 진흥을 꾀하고 국가의 정신적 토대를 굳게 하였다. 또 밖으로는 중국의 梁과의 연결을 더욱 강화하여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였고, 倭와의 친선도 두터이 하여 왜에 여러 방면의 기술자를 보내 주는 이외에 불교를 전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라와는 가야지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는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고구려의 남하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연맹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내정비와 신라와의 친선관계를 바탕으로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회복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무렵 등장한 신라의 진흥왕은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처음에는 母后의 섭정을 받았으나 재위 12년(551)에는 開國이라는 年號를 사용하면서 親政을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의 대외정복 사업은 보다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먼저 진흥왕 11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道薩城과 金峴城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빼앗았다.223) 이 두 성을 둘러싼 공방은 먼저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하자 고구려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였던 것인데, 두 나라의 병사가 피곤한 틈을 타 신라가 이 두 성을 차지한 것 같다.224) 이 두 성의 위치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도살성은 天安 또는 曾坪 근처라고 생각되고, 금현성은 全義로 비정된다.225) 이는 모두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요충지가 되는 곳으로 이 지역의 확보를 위해 고구려와 백제가 공방을 벌이는 동안 신라가 이를 모두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해 3월에 진흥왕이 娘城(淸州)에 순수하여 于勒과 그의 제자를 불러 음악의 연주를 들었다고 하는데, 이 순수는 앞의 두 성을 차지한 뒤 새로이 개척된 영토를 획정하기 위한 목적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고구려·백제는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는데, 백제의 입장으로는 곧 벌어질 한강유역에 대한 신라와의 합동 공격을 위해 이를 묵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진흥왕 12년(551) 신라와 백제는 한강유역의 공격에 나서게 된다. 신라는 거칠부 등 여덟 장수를 보내 竹嶺 이북 高峴 이내의 10개 군현을 탈취하였고, 백제는 평양을 격파하였는데,226) 고현이 어디인지는 불확실하나 죽령 이북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이 때에 신라가 획득한 지역은 한강 상류지역의 고구려 영토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이 당시에 건립되었다고 보이는<丹陽 赤城碑>의 위치로 보아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가 공취한 지역에 대해≪일본서기≫欽明天皇 12년조에 漢城·平壤 등의 6개 군을 취하였다고 했으니 이는 한강 하류지역으로 현재의 서울을 포함한 지역일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지난날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옛땅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 신라는 백제의 동북지역을 공격하여 이 지역에 新州를 설치하고 각간 武力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는 백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커다란 충격이었고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반대로 신라의 입장에서는 고대해 마지않던 숙원사업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라로서는 한강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점령함으로써 많은 人的·物的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여 국제관계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를 분리시킴으로 인해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부터 신라와 백제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데,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긴 직후에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로 보내고 있는데, 이는 일단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편입한 것을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경계심을 늦추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신라에 대한 본격적인 침입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음해인 554년 7월 성왕은 大加耶軍 및 왜와 합세하여 신라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이 때의 싸움터가 지금의 沃川 부근인 管山城이었는데, 처음에는 백제가 유리한 듯 하였으나 적진 깊숙히 진격한 아들 餘昌(威德王)을 위문하러 성왕이 친히 步騎 50을 이끌고 밤에 가다가 狗川에서 신라의 복병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이를 틈타 신라의 대반격이 시작되어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는데 당시 백제의 군사 29,600명이 전사하였다고 한다.227)

 새로이 확보한 한강유역을 통치하기 위해 신라는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하고 진흥왕 16년(555)에는 왕이 친히 北漢山에 巡幸하여 疆域을 확정지었는데228), 현재 서울에 있는 진흥왕의<북한산비>는 이 때에 세운 것이다. 진흥왕 18년에는 신주를 폐하고 北漢山州를 두었으며 같은 왕 29년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南川州(利川)를 설치하였다가 진평왕 16년(594)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두었다. 이렇게 자주 州를 폐하고 설치한 것은 사실은 주의 治所를 옮긴 데 지나지 않는데, 이는 신라가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매우 고심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생각된다. 또 한강의 상류지역에는 고구려의 國原城 자리에 小京을 설치하여 國原小京이라 불렀는데, 이 지역을 정치·문화·군사의 중심지로 개척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더욱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진흥왕 19년에는 중앙귀족의 자제와 6부의 豪民을 국원소경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가야에서 귀순한 樂聖 우륵도 이런 사정으로 국원성에 머물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로서는 국원을 실질적인 한강유역의 중심지로 육성하고자 했던 것이며, 이는 고구려가 이 지역을 남진정책의 기지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는 북진정책의 기지로 삼으려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南陽灣에는 党項城이란 요새를 쌓아 이를 거점으로 진흥왕 25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의 陳과 北齊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교의 성공에 크게 힘입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한강유역의 점령이야말로 통일사업의 큰 기반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신라가 백제의 성왕을 죽인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게 된다. 진흥왕 23년에는 백제가 변경을 침입해 왔고, 眞智王 2년(577)에는 一善 지역에서 백제군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진평왕 24년에는 阿莫城(雲峰)에서 전투가 있었고 같은 왕 33년에는 椵岑城이 백제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신라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善德女王 11년(642)에 있었던 大耶城(陜川)의 함락일 것이다. 이 전투에서 신라의 都督 品釋 부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전사하였는데, 품석의 妻는 金春秋의 딸이었다. 이후 김춘추는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직접 당나라에 가서 함께 백제를 공격할 것을 간청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對唐外交에 나서게 되는데 아마도 대야성전투로 인한 백제에 대한 적개심이 그를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만들었을 것이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잃어버린 한강유역을 다시 찾기 위하여 여러 차례 군대를 보내 신라의 北邊을 침입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嬰陽王(590∼618)初의 溫達장군의 出征이라 하겠다. 平原王의 사위로 일찍이 後周와의 싸움에서 武勇으로 威名을 날린 바 있는 온달은 자청하여 군대를 이끌고 오면서 맹세하기를 “鷄立峴과 竹嶺 以西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며 비장한 각오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阿旦城229)의 싸움에서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223)≪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1년.
224)≪三國史記≫권 19, 高句麗本紀 7, 양원왕 6년 및 권 26, 百濟本紀 4, 성왕 28년.
225)李丙燾,≪譯註 三國史記≫(乙酉文化社, 1977), 57쪽.
226)≪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2년 및 권 44, 列傳 4, 居柒夫.
227)≪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5년.
22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6년.
229)阿旦城의 위치에 대하여는 이를 흔히 서울의 廣壯津의 峨嵯山城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丹陽의 永春面에는 溫達山城이 있고, 中原郡 上芼面 彌勒里에는 溫達 장군이 갖고 놀았다는 공기가 있는 등 온달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永春의 옛 이름이 乙阿旦縣으로 아단성과 비슷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아단성은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옳을 듯하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