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제·야마토왜의 접근과 중개외교
1) 4세기의 대신라관계
4세기 가야의 대외관계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가야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당시 가야지역의 상태를 보여 주는 문헌사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는 것이 현재 학계의 실정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당시 가야 제국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학계에서는 4세기에 가야 제국이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나의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소위 가야연맹체설이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 같다.749) 그러나 당시 가야지역에 소국가들이 분립해 있었으며 그 중에서 금관가야가 다른 소국가들에 비해서 약간 우위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가야 제국이 연맹체라고 불릴 만한 공동의 행동을 취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750) 따라서 본고에서는 4세기의 가야지역을 고대국가 전단계의 소국가들이 분립하고 있던 단계로서 이해하고자 한다.
지정학적인 면에서 당시 가야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나라는 신라였다. 그런데≪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와 신라와의 관계는 212년에 가야가 그 왕자를 신라에 볼모로 보내는 기사를 끝으로 481년까지 269년간 공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기간에는 가야 자체에 관한 기사도 전혀 보이지 않아 그야말로 가야사의 공백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4세기 가야의 대내외 정세는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김해 대성동이나 동래 복천동의 고분발굴 결과 소위 제2류 목곽묘의 출현과 함께 陶質토기를 필두로 철제 갑주·마구·각종 철제 무기류 등이 다량으로 발견되고 순장의 습속이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층문화와 무기체제의 변화, 그리고 지배·피지배의 명확한 분리 등을 바탕으로 학계에서는 제2류의 목곽묘 출현을 가지고 국가발전의 한 획기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751) 특히 무기체제의 변화와 각종 철제 무기류의 다량 출현은 이 때부터 대규모 정복전쟁의 수행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3세기 후반부터 김해와 동래지역을 중심으로 소국가간의 통합이 가속화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신라도 경상북도지역의 여러 소국을 병합하면서 영토확장을 위하여 주변의 가야지역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752) 따라서 남과 동에서 국가간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속에서 가야 제국들은 의지할 수 있는 세력을 주변에서 찾지 않으면 안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경우 지리적 여건이나 당시의 세력관계로 보아 금관가야나 신라의 세력확대를 저지하기 위해서 가야 제국이 주변에서 의지할 수 있는 나라는 백제를 제외하고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749) | 金泰植,<加耶史硏究의 現況>(≪韓國史 市民講座≫11, 一潮閣,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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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 | 李永植,<加羅聯盟說の再檢討>(≪加羅諸國と任那日本府≫, 東京;吉川弘文館, 1993). |
751) | 申敬澈,<金官加羅의 成立과 對外關係>(≪伽倻와 東아시아≫, 伽倻史國際學術會議, 金海, 1992)는 제2류의 목곽묘의 출현에서 변한(삼한)과 가라(삼국)의 획기를 구하고 있다. 일반 통설도 삼한 소국단계에서 가야로 변하는 시기를 4세기 초로 보고 있다. |
752) | 李鍾旭,<廣開土王陵碑 및 『三國史記』에 보이는 ‘倭兵’의 정체>(≪韓國史 市民講座≫11, 一潮閣, 1992)는 4세기에 이미 신라가 경상북도 여러 소국을 병합하고 영토확장을 위하여 가야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