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금속기술
백제의 금속 공예기술은 일찍부터 주목되어왔다. 백제가 성장한 한강 유역에서 한반도의 서남부에 이르는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철기들은 기술적으로 우수한 제품들이다. 백제의 금속기술은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그 돌거푸집들, 그리고 철제 농기구들은 백제의 우수한 금속 합금기술과 주조기술, 단련 및 세공기술 전통의 원류가 된 것이었다. 4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제의 금·은·구리·철 등의 제련, 주조 및 세공기술이 기술적으로 거의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 시기의 유물과 기록들은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 사신에게 鐵鋌 40매를 주었다고 한다. 이 덩이쇠는 최근까지 가야의 유적과 일본 규슈 북부지방의 고대 유적에서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는데, 그것은 철제품을 만드는 원료가 되는 철재로서 비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래서 덩이쇠는 일본에 철기의 원료 철재로 대량 수출되어 일본의 철기 문화를 전개하는 바탕이 되었다.
백제의 금속기술을 실증하는 매우 중요한 유물로 七支刀가 있다. 근초고왕 24년(369)에 제조된 것으로 알려진 칠지도는 지금 일본 天理의 이소노가미(石上) 신궁에 보존되어 있다. 75㎝길이의 이 철검은 그 뛰어난 철의 단조 기술과 61자의 금상감으로 새겨 넣은 명문, 그리고 사슴뿔을 형상화한 듯한 특이한 디자인 등으로 4세기초의 백제 금속기술의 우수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명문에 씌어 있는 것처럼 칠지도는 ‘百鍊의 鐵’, 즉 鋼鐵과도 같은 쇠로 만들었다. 글자 그대로 철을 백번 이상 숯불에 달구었다 연단하는 과정을 거쳐 탄소가 조금씩 고루 쇠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공법으로 만든 매우 단단한 쇠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高炭素鋼과도 같은 쇠붙이는 백제의 몇군데 유적에서 출토된 쇠도끼와 화살촉과 칼과 같은 날카로운 철기들의 화학분석 결과로 입증되고 있다. 덩이쇠와 칠지도는 그 당시 국가의 富와 첨단기술을 상징하는 철의 생산과 철의 기술을 나타낸다는 점에서≪日本書紀≫의 기록과 함께 귀중한 기술 자료이다.706)
6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백제의 금속기술은 더욱 더 크게 발전하였다. 최근에 발굴된 6세기의 백제 향로는 백제 금속 공예기술을 압권한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뛰어난 기술은 중국의 기술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칠지도의 제조기술의 전통을 잇는 것이다. 金銅龍鳳蓬萊山香爐라고 이름지어진 높이 64㎝, 무게 11.8kg의 금도금 청동향로는 백제 금속기술의 결정이며 금속기술자들이 만들어 낸 최대의 걸작이다.
하늘을 향해 막 날아오르려는 큰 용과 연꽃봉우리, 봉래산의 74개 봉우리와 그 정상에 서서 날개짓하는 봉황의 리얼한 표현을 그대로 청동으로 부어낸 고도의 주조기술과 솜씨는 백제의 美를 창조적 기술로 구현한 것이다. 이 향로는 밀랍 거푸집으로 부어만들었고, 금도금은 아말감 수은법으로 고르게 잘 입히고 있어서 이 시기 백제의 금속 주조기술과 도금기술의 뛰어난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향로의 뛰어난 금속기술은 7세기의 백제 불상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78호)의 제작기술과 맥을 같이한다. 높이 80㎝의 이 불상은 머리 부분과 몸체 부분을 따로 주조한 후에 연결 용접하는, 기술적으로 훌륭한 방법을 썼다. 코발트 60 방사선에 의한 투과 촬영 조사로 그 주조 솜씨가 고도로 발달된 기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불상에서도 볼 수 있는 밀랍 거푸집에 의한 주조기술은 6세기에 일본에 건너가서 불상 주조기술을 지도한 백제의 주조기술자들에 의하여 전수된 그것과 같은 기법이었을 것이다.707) 일본 奈良 東大寺의 거대한 청동불상은 백제의 기술자들이 전수한 기술로 그 후손에 의하여 주조된 것이다. 그것은 밀랍 거푸집으로 약 490톤의 청동을 써서 주조된 것으로, 수은 아말감을 이용한 금도금법을 써서 완성한 8세기 최고의 금속기술이 결집된 최대의 불상이었다.708)
이러한 금속기술은 백제의 전문 관료기술자 집단에 의하여 개발되고 발전된 고도의 창조적 공예기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백제에는 최고의 전문기술 교수직을 가진 名匠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덕왕 35년(588)에 일본에 파견된 전문기술자들 중에 鑪盤博士라는 불탑의 상륜을 주조하는 전문기술 교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709) 다른 여러 가지 금속기술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 교수가 또 있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710)
백제의 금속기술에서 또 하나 귀금속 공예기술을 빼놓을 수 없다. 무령왕릉이 발견되면서 백제의 귀금속 공예기술은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백제 특유의 부드럽고 세련된 디자인이 특히 돋보이는 가공기술과 세공기술이 뛰어난 백제의 아름다움과 기술의 전통을 창조해냈다는 사실이 크게 부각된 것이다. 장식품을 주류로 하는 이 공예품들을 볼 때, 백제의 기술자들은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내려는 제품은 어떤 것이라도 훌륭하게 제작할 수 있는 기술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금속기술의 첨단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중국과 고구려의 첨단 금속기술을 도입하고 소화할 수 있는 자기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을 적절히 받아들였다. 금속제품은 장식품 이외에 생활용품과 그릇들이 있고, 불교 사찰용 제품들도 적지 않게 제작되었다. 이들 금속제품들은 적어도 출토된 것으로 볼 때, 기술 수준이 처지는 제품은 눈에 띄지 않는다.
706) | 칠지도의 명문에 그것이 ‘百鍊의 鐵’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백제국의 서쪽에 谷那 철산이 있다. 그 철산의 철을 캐서 계속 보내겠다”고 했다는≪日本書紀≫의 기사는 철의 기술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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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 | 小林行雄,≪古代の技術≫(東京, 1962), 207∼208쪽. |
708) | 吉田光邦, 앞의 책, 97∼100쪽. 이 청동불상은 백제의 청동기술이 결집된 작품이다. |
709) | ≪日本書紀≫권 21, 崇峻天皇. |
710) | 聖德大王神鐘에는 그 명문에 鑄鐘博士라는 직책이 새겨져 있다. 종을 주조하는 전문 기술 교수가 있었던 것이다. 강헌규 외,≪백제의 역사≫(공주, 1995), 67∼70쪽 및 302∼31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