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당군사동맹
삼국간의 상호항쟁은 신라·고구려·백제 사이의 좁은 국제문제만이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주위의 여러 나라와 보다 넓은 국제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581년 隋帝國이 성립되고, 다시 618년에는 唐이 수를 멸하고 수립되었다. 이 수·당의 통일제국은 주위의 돌궐·거란·토곡혼 등을 복속하고 동북아시아의 覇者임을 자처하여 각각 수·당 중심의 국제질서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제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세력균형에 의한 각국의 존립이 아니라 수·당에 의한 강자만의 논리가 곧 국제질서를 재편성할 기세였다.
이 같은 중국의 수·당에 맞서 가장 완강한 대립을 보인 것은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비록 말은 藩臣이라 칭하면서도 誠節이 미진하다”는 책망과 동시에 굴종을 강요하는 수에 대하여0023) 遼西지방을 선제공격함으로써 고구려의 독자성을 과시하였다. 이에 수는 4차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고구려는 이를 모두 격퇴하며 薩水大捷(淸川江) 같은 큰 전승을 거두기도 하였다.0024) 다시 당과는 약 30여 년간 표면상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를 유지하며 대립했으나0025) 결국 장기간의 전쟁이 고구려·당 사이에 전개되었다. 이것은 당의 覇權主義에 의하여 고구려가 스스로 복속해 오지 않으면 정벌이 불가피하다는 일방적 결행이었다.0026) 결국 寶臧王 4년(645)에 당 태종이 대병력으로 요동을 침입하였으나 훌륭하게 물리친 이래 장기전이 지속되었다.
이렇게 고구려가 수·당과 치열한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신라는 백제의 빈번한 침략을 방어하기에 급급하였다. 이런 신라와 백제도 수·당과 교섭하여 각각 자국의 유리한 국제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수와 함께 고구려를 共伐하겠다는 일종의 濟隋軍事同盟을 맺고 軍期를 정했으나 실제는 출병하지 않았으므로 국제적 신뢰성의 상실과 국력의 허약성을 스스로 노정시킨 결과가 되었다. 이런 결과는 당과의 외교에도 영향을 미쳐 실패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당은 삼국간의 항쟁을 화해시키려고 중재에 나서면서도 신라를 당의 번신이라고 두둔하면서 백제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백제는 당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던 것이다.0027)
이때 신라는 眞平王 43년(621)에 처음으로 당에 사신을 파견한 이래 급속히 접근하는 한편 삼국의 상호항쟁을 삼국내의 세력균형에 의하여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일차적 시도였다. 즉 선덕여왕 11년(642)·12년에 신라는 여제의 침공을 당에 전하며 구원을 청하기도 했지만0028) 한편 김춘추가 고구려에 가서 청병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삼국의 성장과정에서 삼국관계에 의한 역사적 배경을 의식한 점과 삼국 자체내에서 문제해결을 시도했다는 점 등이 주목된다. 그러나 이에 실패한 신라는 오직 당과의 제휴가 불가피했고 고구려정벌에 실패한 당은 여제가 연합했다는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신라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羅唐軍事同盟이 체결될 수 있었다.
비담의 난을 평정하고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했던 김춘추는 그 아들 문왕과 함께 진덕여왕 2년(648)에 당으로 가서 당 태종을 만나자 태종은,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平壤以南과 百濟土地는 다 그대 新羅에게 주어 길이 평안하게 하려 한다(≪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
고 말하였고, 이어 計策과 軍期를 정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곧 나당군사동맹이며 이는 신라의 단순한 청병과 당의 막연한 출사의 약속만이 아니었다. 나당 양국이 여제를 멸망시키면, 그 戰後에 있을 양국간의 領土分割約定으로서 평양 이남과 백제 全土는 신라가 영유한다는 외교적 타결이었다.0029) 그러나 당의 고구려정벌계획이 貞觀 19년(선덕여왕 14년, 645)의 실패 이후부터 장기전략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신라와의 군기를 실천하는 데는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그 이유는 나당의 여제정벌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당은 고구려를 두고 백제를 정벌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신라는 백제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도 힘겨웠는데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선덕여왕 14년에는 요동을 공격하는 당을 도와 신라가 고구려 남경을 침공했더니 그 틈에 백제는 신라 서변의 7성을 빼앗아갔다. 또한 고구려는 당의 침공이 없는 시기를 틈타서 신라를 침범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4國이 얽히어 싸우면서 나당이 백제를 先攻한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양국의 오랜 주저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전략의 묘는 바로 당이 대고구려 정벌전략에서 장기전략을 실천하는 과정의 산물인 듯싶다.
요컨대 신라는 대당외교를 적극화하여 상호 결속하였지만, 이는 신라가 일방적으로 당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이 신라를 적극 끌어들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라가 여제 양국의 위협을 받았지만, 신라에서 일차적인 통합대상으로 삼은 것은 백제였다. 따라서 당의 강적이 고구려였던 상황을 재빨리 간파한 신라는 대당외교에서 여제 양국의 침입과 위협을 거론하면서 결론은 백제에 초점을 두었다. 이런 과정에서 신라는 여제가 連兵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당에게 의구심을 갖게 함으로써 당이 신라에 접근하도록 유도하여 나당군사동맹은 물론 백제를 먼저 멸망시키는 외교에 성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0023) | ≪三國史記≫권 19, 高句麗本紀 7, 평원왕 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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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4) | ≪한국사≫2(국사편찬위원회, 1977), 496쪽.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는 隋-新羅로 연결된 東西세력과, 突厥-高句麗-百濟-倭로 연결되는 南北세력이 팽팽히 맞서 있었으며, 麗隋의 전쟁은 이 동맹세력의 盟主끼리의 싸움”이라 했지만, 이는 실증없는 추상이다. 또 隋·百濟관계로 보아도 高句麗·百濟가 與國일 수 없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
0025) | 申瀅植,<三國의 對中關係>(앞의 책), 315쪽. |
0026) | ≪舊唐書≫권 61, 列傳 11, 溫大雅弟 彦博 및 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高麗 武德 7년. |
0027) | ≪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百濟 貞觀 22년. |
0028) | ≪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선덕여왕 12년. |
0029) | 李昊榮,<新羅三國統一에 관한 再檢討>(≪史學志≫15, 檀國大, 1981) 참고. 이 시기 당의 동태로 보아 김춘추가 압록강 이남의 땅을 신라가 소유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더라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은 압록강 이북의 요동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