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9권 통일신라Ⅰ. 삼국통일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1. 삼국통일 과정
          • 1) 7세기 신라의 내정변화
          • 2) 대여제항쟁과 나당군사동맹
            • (1) 대여제항쟁
            • (2) 나당군사동맹
          • 3) 백제의 패망과 부흥운동
            • (1) 백제의 패망
            • (2) 백제국 부흥운동의 진압
            • (3) 새로운 나제관계
          • 4) 고구려의 패망과 부흥운동
            • (1) 고구려의 패망
            • (2) 고구려국 부흥운동
          • 5) 대당전쟁
            • (1) 대당전쟁의 원인
            • (2) 대당전쟁의 승리
        •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 1) 민족융합의 문제
          •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1. 무열왕계의 왕권확립
          • 1) 문무왕의 왕권강화
          • 2) 김흠돌란의 발생
          • 3) 신문왕의 개혁정치
        • 2. 전제왕권과 귀족
        • 3. 중앙통치조직의 정비
          • 1) 중앙통치조직의 정비과정
          • 2) 중앙통치조직
          • 3) 내정기관의 정비
          • 4) 재상제도의 운영
        • 4. 지방·군사제도의 재편성
          • 1) 9주 5소경
          • 2) 군사조직
            • (1) 중앙의 군사조직
            • (2) 지방의 군사조직
          • 3) 진과 성곽시설
        • 5. 토지제도의 정비와 조세제도
          • 1) 토지제도
            • (1) 관료전
            • (2) 녹읍
            • (3) 정전·연수유전답
          • 2) 조세제도
            • (1) 전조
            • (2) 호조
            • (3) 부역
      • Ⅲ. 경제와 사회
        • 1.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 1) 수공업의 발달
            • (1) 궁중수공업과 관영수공업
            • (2) 민간수공업
            • (3) 각종 수공업 기술의 발달
          • 2) 상업의 발달
            • (1) 국내 상업
            • (2) 대외교역
        • 2. 귀족의 경제기반
          • 1) 사유지와 목장
          • 2) 식읍
          • 3) 녹읍과 녹봉
          • 4) 문무관료전
        • 3. 농민의 생활
          • 1) 신라장적
            • (1) 문서의 성격과 작성연도
            • (2) 신라장적과 농민생활
          • 2) 촌락과 농민의 지위
        • 4. 천민의 생활
          • 1) 향·부곡
          • 2) 노비
        • 5. 의식주 생활
          • 1) 의생활
            • (1) 머리장식
            • (2) 의복
          • 2) 식생활
          • 3) 주생활
      • Ⅳ. 대외관계
        • 1. 당과의 관계
          • 1) 친당외교의 추진
          • 2) 나당 친선외교의 확립
        • 2. 일본과의 관계
          • 1) 7세기 후반∼8세기 일본과의 국가간 교섭
          • 2) 9세기 전반 일본의 사신파견
          • 3) 신라상인에 의한 무역의 전개
          • 4) 9세기 후반 일본의 신라에 대한 경계강화
        • 3. 해상활동
          • 1) 항로의 개척과 항해술의 발전
            • (1) 북방해로(노철산항로)
            • (2) 황해횡단항로
            • (3) 남방해로
            • (4) 선박과 항해술
          • 2) 해외무역
            • (1) 수출품
            • (2) 수입품
            • (3) 일본과의 교역
            • (4) 이슬람과의 교역
          • 3) 당에서의 활동
            • (1) 유학생과 문인의 교유
            • (2) 구법승의 순례
            • (3) 재당신라인과 무역상
      • Ⅴ. 문화
        • 1. 유학과 역사편찬
          • 1) 유학의 발달
            • (1) 성격
            • (2) 유학의 발달
            • (3) 도당유학생의 활동
          • 2) 역사의 편찬
        • 2. 불교철학의 확립
          • 1) 교학의 발달
            • (1) 유식사상
            • (2) 원효 교학
            • (3) 화엄교학
            • (4) 계율학
          • 2) 불교신앙의 일반화
            • (1) 미타신앙
            • (2) 관음신앙
            • (3) 미륵신앙
            • (4) 지장신앙
          • 3) 승려들의 국가적 활동
        • 3. 과학과 기술의 발달
          • 1) 하늘의 과학
            • (1) 첨성대와 천문현상의 기록
            • (2) 천문도의 도입과 천문기관의 발달
            • (3) 해시계와 물시계
            • (4) 역법과 연호
            • (5) 수학과 도량형
          • 2) 땅의 과학과 기술
            • (1) 풍수지리와 지리학
            • (2) 농업기술과 생물 지식
            • (3) 풀·나무·흙의 기술:종이·직물·유리·도자기
            • (4) 쇠붙이의 기술
          • 3) 사람의 과학과 기술
            • (1) 의약학
            • (2) 빙고-얼음의 저장 이용
            • (3) 인쇄술
            • (4) 간단한 기계와 자동 장치
            • (5) 탑과 건축
            • (6) 선박 기술
        • 4. 언어와 문학
          • 1) 이두와 언어
            • (1) 고대국어의 자료와 표기법
            • (2) 차용어
            • (3) 문법
          • 2) 향가
          • 3) 한문학
            • (1) 한문학의 전개
            • (2) 한문학의 의의
        • 5. 예술
          • 1) 회화
          • 2) 서예
            • (1) 초기의 서풍
            • (2) 서풍의 발전
            • (3) 후기의 선풍 글씨
          • 3) 조각
            • (1) 불교조각
            • (2) 탑과 부도의 조각
            • (3) 일반 조각
          • 4) 공예
            • (1) 금속공예
            • (2) 토기 및 와당과 전
          • 5) 건축
            • (1) 사원 건축(목조)
            • (2) 궁실 및 연못
            • (3) 고분
            • (4) 석조건축
            • (5) 성곽
          • 6) 음악
            • (1) 역사적 배경
            • (2) 향악과 향악기
            • (3) 당악과 불교음악의 대두
            • (4) 일본에서의 고려악
          • 7) 무용·체육
            • (1) 무용
            • (2) 체육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1) 민족융합의 문제

 신라의 삼국통일은 미리 민족적 동일성을 내세우면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삼국간의 격렬한 대립 속에 자기보존의 방편이 상대국의 呑倂이라는 國家意識으로 깊이 작용한 결과였다. 삼국통일의 주체적 당사국인 신라는 三韓을 한 국가로 통합했다는 ‘一統三韓’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삼한은 삼국을 상징했기 때문에 신라인은 고구려·백제가 같은 韓族이라는 동족의식을 가졌던 것이라 한다.0102) 그런데 동족의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언어의 동질성을 꼽을 수 있다.≪三國史記≫本紀·列傳을 보면 삼국인 사이에 의사소통상 언어의 장애가 거의 없었던 것 같지만, 언어학자의 연구에서는 삼국간에 상당한 거리감을 갖고 있었다. 즉 오늘날 우리 국어의 가장 이른 단계를 夫餘韓祖語라 가정할 때, 고구려·신라·백제어는 여기서 갈려나온 것인데 삼국의 후기에 서서 볼 때 夫餘系와 韓系의 分岐를 1천 년 이상으로 추측하였다.010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적·문화적으로 동질적 성격을 지닌 國家群으로0104) 상호의존적 균형을 취하면서 비교적 자주 접촉하는 동안에 비록 자각된 것은 아니더라도 동족적 친근감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것이 신라에 의한 國體의 통합과 새로운 지배질서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차츰 신라국민으로서 더욱 동질성을 자각하면서 동족의식이 뚜렷해졌을 것이며 민족적 융화가 촉진되었을 것이다.

 무열왕 7년(660) 이래 신라는 일부 백제토지와 유민을 흡수하여 당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1월에는 포로한 백제인 중에서 좌평 忠常·常永과 達率 自簡에게 一吉湌(7등위)을 주어 총관으로 임명하였고 恩率 武守에게는 大奈麻(10등위)에 大監職을 주었다. 또 은솔 仁守는 대나마에 弟監으로 삼았다. 이들은 才質을 고려한 임용이라 했는데, 실은 백제국 부흥군 진압에 동원키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이들이 백제의 포로나 降卒을 인솔하고 출전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후 문무왕 원년(661) 2월에는 충상을 아찬(6등위)으로 승급시켜서 사비성을 공격하는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는데 참전시키고 있다. 다시 그 해 7월 17일에는 충상이 品日 등과 함께 上州摠管에 임명되고, 自簡은 眞欽 등과 下州摠管에 임명되었다. 이들 신라군은 당의 고구려 침공에 상응하여 북상하다가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였다. 신라에서는 雨述城에서 항복한 달솔 助服을 급찬(9등)에 古陁耶郡(安東) 태수로 삼았고, 은솔 波伽에게 급찬에 田宅과 衣物을 주었다는 것인데, 이들 또한 일부 백제 유민과 동반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백제정벌과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항복한 백제 장군들은 다시 전쟁터에 동원하기 위하여 임시로 관등과 관직을 수여하였으나 문무왕 11년부터 백제가 평정·통합됨에 따라서 백제 유민에 대한 대처방안이 대두한 듯하다. 그것은 주로 백제의 관료와 장군 등을 신라의 官僚組織體系內로 흡수할 때의 처우규정으로서 문무왕 13년에 확정되었다(<표 4> 참조). 그러나 바로 이 시기는 한창 나당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유민 가운데에서 대당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유용한 재질을 충분히 감안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라가 백제 전지역을 정복하면서 대당전쟁을 더욱 활기있게 추진할 인적자원을 종래 신라인 수만큼이나 더 얻은 셈이지만 백제 유민은 대당전쟁에 그렇게 많이 동원된 것 같지는 않다. 신라로서는 단지 이들을 조속히 안정시키는 일 또한 큰 과제였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百 濟 官 階 新 羅 官 階
官 階 官 階 名 中央官階 中央官階名 地方官階 地方官階名
2

3

4

5

6

7
達 率

恩 率

德 率

扞 率

奈 率

將 德
10

11

12

13

14

15
大 奈 麻

奈 麻

大 舍

舍 知

吉 舍(幢)

大 烏
4

5

6

7

8

9
貴 干

選 干

上 干


? 伐

? 尺

<표 4>백제 유민에게 주어진 신라 관계

 한편 고구려가 패망한 문무왕 8년을 전후하여 그 유민도 적지 않게 신라로 망명·투항해 왔다. 즉 문무왕 6년에는 고구려 대신 淵淨土(淵蓋蘇文의 弟)가 12城 763戶 3,543人을 가지고 투항하였다. 신라는 연정토와 그 從官 42인을 왕도·州府 등에 안치시키고 衣物·糧料·家舍를 주어 새로운 정착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12성 중에서 8성은 성읍 백성이 온전함으로 士卒을 보내서 지키게 했던 것이다. 또 문무왕 8년 11월 5일 신라군이 고구려정벌을 마치고 개선할 때 포로 7,000人과 함께 입경하였다. 다시 문무왕 10년 6월에는 안승 등 고구려국 부흥운동 4,000호가 망명해 왔다. 문무왕 13년에 호로하(임진강)에서 신라군이 唐將 이근행의 군에게 밀리면서 “餘衆은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고 한 이 ‘여중’은 신라군과 함께 항당하던 고구려국 부흥군일 것이다.0105) 이렇게 수차에 걸쳐 신라로 망명·투항한 고구려 유민은 공식적 집계만도 30,543명인데 이 숫자는 7세기 당시로는 엄청난 것이다. 여기에 점령한 고구려 남경의 토지와 유민까지 참작하면 놀라운 팽창이었다.

 이들 고구려 유민의 상당수는 문무왕 10년 이후 백제고지의 정복과 대당전쟁에 동원되었을 것이나 문무왕 16년에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이들 고구려 유민에 대한 조치가 정책적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부 투항·포로한 고구려 유민은 따로 신라 內地에 분산·안치했으므로 별다른 문제가 없었겠지만, 고구려국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안승집단은 신라로 망명하면서 금마저에 머무르게 했는데 거의 독립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안승집단은 문무왕 14년까지「고구려」라 했을 것이며, 그 이후부터는「報德國」으로 冊命하여 신라 스스로 宗主的 의미를 강화하면서 그들의 독자성을 부인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아직 나당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은 이들 집단의 성격은 그런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문무왕 20년에 왕의 누이를 안승에게 시집보내고 문무왕 23년에는 그에게 蘇判(3등위)을 주는 동시에 金氏로 賜姓하여 甲第와 良田을 주어 京都에 살도록 하였다. 그러니까 보덕국은 안승을 왕으로 문무왕 23년까지 고구려 官制를 사용하면서, 신라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운영되어 왔었다. 문무왕 16년에 나당전쟁이 끝나고 7년이 흘러간 이 시점에서 신라가 통일국가로서 새로운 통치체제를 재정비함에 안승집단은 이제 장애가 될 뿐더러 신라로서는 그들을 흡수·융합할 필요성이 절실했다고 믿어진다. 신라의 이 같은 조치에 반발하여 신문왕 4년에 안승의 族子로 장군인 大文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군에게 진압되면서 餘衆을 남쪽 州郡으로 옮김으로써 고구려국 부흥집단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들 고구려 유민 중 관료나 장군이었던 유력한 자들을 신라 관료조직내로 흡수하기 위하여 그 처우규정을 신문왕 6년(686)에 제정하였다(<표 5>참조).

高 句 麗 官 階 新 羅 官 階
中央官階 中央官階名 中央官階 中央官階名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鬱折(主簿)

太大使者(大相)

皀衣頭大兄(位頭大兄)

大使者(從大相)

大 兄

收位使者(儒相)

上位使者(狄相)

小使者(小相)

小 兄

諸 兄

先 人

自 位
7

8

9

10

11

12

13

14

15



 
一 吉 湌

沙 湌

級 伐 湌

大 奈 馬

奈 馬

大 舍

舍 知

吉 土(吉次)

大 烏(烏知)



 

<표 5>고구려 유민에게 주어진 신라 관계

 이상 백제인과 고구려인에 대한 두 표를 비교하면 백제인은 京位 대나마(10등위)가 최고 관등이고 귀간 등 外位도 수여하도록 규정하였다. 고구려인에게는 일길찬(7등위)·사찬(8등위)을 상위 관등으로 규정하여 백제인보다 두 등급을 높게 책정했으나 이것은 큰 차별이라고 할 수 없다. 고구려인으로 최고 관등을 받은 主簿가 地籍圖나 戶籍을 작성하는 技能人이었다면,0106) 통일 직후 폭증된 인구와 확대된 영토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도 주부는 매우 긴요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 같은 필요에서 주부를 최고 관등으로 대우했다면 그 영향은 新羅帳籍에까지 미쳤을 것이 분명하나, 경덕왕 18년(759)에는 調府·禮部 등의 大舍(12등위)를 주부라 고치는 것으로 보아, 주부의 직능도 단순한 文書記錄官으로 전락하고 그 등급도 낮아졌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초기의 여제에 대한 이러한 흡수·융합정책은 이후 얼마나 지속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라정부가 고심한 흔적은 안승집단의 처리과정에서 현저히 볼 수 있다. 더욱이 신문왕 5년(685)에 지방행정구획을 재편성함에 있어 신라로 통합된 전 영역을 9州·5小京으로 나누었다. 옛 신라 땅을 3州로, 옛 백제 땅을 3주로, 옛 고구려 땅을 3주로 각각 數的 均分을 의도한 것은 여제인을 같은 통일신라인이라는 同質化政策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또 9誓幢에 신라인뿐 아니라 백제·고구려·말갈인으로 조직한 이유는 이들을 포섭과 회유하는 동기에서 나온 민족융합정책이라는 것이다.0107)

 한편 삼국의 국민은 공통적으로 佛敎를 신봉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신라정부에서는 불교를 통해 亡國으로 격앙된 여제인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였으며,0108) 熊川州 출신인 高僧 憬興을 國老로 우대한 것은 민심을 수습하려는 정책과도 상통된다고 할 수 있다.0109)

 물론 이러한 일련의 민족융합정책에 대하여 회의적·부정적 견해도 있다. 즉, 통일 후 신라정부는 여제 유민을 제도적 장치로 차별하였기 때문에 그들 유민은 망국의 원한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신라에 대한 경계심과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내심에 잠재한 國系意識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0110) 그러나 신라인을 중심으로 여제인을 차별한 것인데, 그 차별의 정도는 인류의 역사변혁 과정에서 불가피한 산물인 동시에 시대적 한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신라는 여제 유민과 함께 대당전쟁을 승리로 끝맺으면서 이들 유민을 흡수·융합하고자 고심한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첫째 투항·망명한 유민은 신라 內地에 분산·안치시켰고, 둘째 유민 가운데 지배층은 신라 관료조직 속으로 흡수하였다. 셋째 신라와 옛 여제지역을 9주로 나누었고 5소경을 설치함으로써 행정구획편제에 평등을 취하려고 한 것이다. 넷째 불교로 유민의 정신적 안정과 그 수습을 배려한 듯하다. 이와 같이 증가된 국민과 확대된 영토를 新羅化하려는 정책을 추구했는데, 이런 융화정책이 민족형성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0102)邊太燮,<三國統一의 民族史的 意味>(≪新羅文化≫2, 東國大, 1985), 58쪽.
0103)李基文,<古代 三國의 言語에 대하여>(≪27회 全國歷史學大會 發表要旨≫, 1984), 37쪽.
0104)盧泰敦,<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韓國史硏究≫ 38, 1982), 129∼156쪽.
0105)≪三國史記≫권 22, 高句麗本紀 10, 말미 總章 4년.
0106)李昊榮,<三國時代의 敗政>(≪國史館論叢≫13, 國史編纂委員會, 1990), 106쪽.
0107)邊太燮, 앞의 책, 63쪽.

필자는 9州·9서당 등의 제도는 중국의 天下思想을 도입하여 新羅가 天下를 지배한다는 新羅中心思想의 표징으로 보았다.
0108)金相鉉,<新羅 三國統一의 歷史的 意義>(≪統一期의 新羅社會硏究≫, 新羅文化硏究所, 1987), 397쪽.
0109)許興植,<新羅佛敎界의 組織과 行政制度>(≪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8, 1987), 150쪽.

崔根泳, 앞의 책, 60쪽에서 文武王이 그를 國師로 임명하려 했으나 ‘曲爲國老’한 사실(≪三國遺事≫권 5, 感通 7, 憬興遇聖)은 차별한 처사로 보았다.
0110)崔根泳, 위의 책, 63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