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관영수공업
관영수공업은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국가재정의 운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로 성립·정비되었다. 먼저 중고기 수취제도의 정비과정에서 재지 장인들의 생산물품을 調 등의 방식으로 납공케 하는 한편 제방축조에서 볼 수 있듯이 재지 장인들을 중앙의 통제하에 관리하는 체계를 갖추면서, 신문왕 때에 工匠府監을 설치함으로써 일단의 완성을 보았다. 다음으로 군사·지방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병기제조의 업무를 비롯하여 축성 등에 장인을 징발하는 체계를 갖추었는데, 이러한 체계는 진평왕대에 大幢 등의 군단에 大匠尺幢主와 大匠大監을 설치한 데서 비롯하며 신문왕대에 6정과 9서당제를 완비하면서 정비되었다.0401)
신라 관영수공업을 총괄하는 대표적인 관사였던 공장부는 공인과 장인 곧 工匠을 관장하였던 관사로서, 고려시대 將作監의 전신이었다. 공장부는 진덕왕 5년(651) 倉部와 調府를 분리·설치함으로써 수취체제를 정비하는 것과 흐름을 같이하여 공장부 主書를 두면서 비롯되었다. 그 후 중국의 제도를 수용하여 관제와 역역체계를 정비하면서 신문왕 2년(682) 工匠府監을 설치하여 확충·완비되었다. 경덕왕 때에 공장부는 다시 典祀署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였으나, 이미 禮部에 속한 전사서가 있고 보면 그 바뀐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듯하다.0402)
다만 공장부가 공장을 관리하는 관사였다는 점에서 성덕왕대에 설치된 京城周作典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성주작전은 성덕왕 31년(732)과 32년에 令과 卿을 각각 두면서 신설되었는데, 경덕왕대에 修城府로 개명되었다가 혜공왕대에 다시 경성주작전으로 환원되었다. 경성주작전의 신설은 7세기 중엽 이후 어느 시기엔가 축성의 업무가 군사조직으로부터 지방행정조직으로 이관되면서, 당시에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왕경의 행정관사의 정비와 흐름을 같이하여 왕경에 있는 성의 수축을 전담하는 관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무렵을 전후하여, 중고기에 각각 경위와 외위로 구분되어 있던 官匠들을 왕경과 주·소경·군별로 엄격히 구분·편제함으로써 종래에 공장부가 일괄적으로 파악하던 공장들을 왕경과 지방으로 구분하여 관리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 공장부와 경성주작전은 役制의 변화와 관련된 것으로서, 泰封 때에 각각 南相壇과 障繕府로 바뀌었다가, 고려시기에 이르러 공조 산하의 將作監으로 통합되었다.
집사부 산하 관사인 彩典도, 직원의 설치와 정비과정 및 그 구성이 공장부와 동일한데, 그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염색과 관련된 관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채전은 경덕왕의 관호개혁 무렵 궁중수공업관사인 染宮·紅典 등의 염색 관련 관사를 설치할 때까지는 관복의 염색이나 건물의 채색 등에 필요한 염료와 관련된 일을 관장했을 것이다.0403)
한편 중고기 무렵의 축성에는 예외없이 將軍·軍主가 축성의 책임자로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의 축성이 군사조직을 통하여 장인과 일반 역부들을 징발하였던 사실을 반영한다.0404) 이러한 관점에서 신라 군단 가운데 일종 공병부대라 할 수 있는 大匠尺幢과, 중고기의 핵심부대인 6정군단의 여러 군관 가운데 보이는 大匠尺幢主·大匠大監 등의 이름을 주목할 수 있다. 이들은 진평왕대에 설치되어 축성 등에 인력을 징발하는 것과 관련한 직무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신라의 경우 축성작업이 군사방위체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점과 관련하여, 군사조직을 중심으로 장인을 확보하여 필요시에 성을 쌓을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신라 중고기에는 군사조직을 통하여 舟楫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는데, 문무왕 18년(678)에 船府를 설치함으로써 그 동안 병부의 大監·弟監이 기왕에 관장했던 주즙의 일에 관한 업무를 선부에 이관하였다.0405) 그 후 경덕왕 때 선부는 利濟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에 다시 선부로 되돌렸는데, 이는 태봉 관제의 水壇, 고려 전기 工曹 산하의 水部에 해당한다.0406) 그런데 문무왕 18년 이전 병부에서 관장하였다는 ‘주즙의 일’이란 軍船의 조영 등과 같은 軍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러나 나당전쟁이 끝난 뒤 영역이 확대되고 해외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군선의 조영보다는 조세의 수취나 해상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일반 선박의 조영 등을 위한 선박관계의 일이 중요성을 띠게 되자,0407) 선부를 독립 관사로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한편 문무왕 때에 새로 두었던 병부의 직원 가운데 弩舍知와 弩幢은 신병기라 할 수 있는「木弩」를 제조하던 관직으로서, 기타 병기의 제조도 노의 제조와 마찬가지로 병부 산하 관사에서 관장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0408) 아마도 대장척당에 소속된 대장척당주와 대장대감을 중심으로 이러한 무기를 제조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대장척당주와 대장대감은 6정과 9서당에 각각 배속되어 있었던 만큼, 군사조직을 통하여 제조된 무기는 중앙의 무기고(武庫)뿐만 아니라 각 停이 소재한 지역의 무기고에 보관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병부와 6정군단 소속의 대장척당을 중심으로 편제된 일련의 축성·선박조영·병기제조와 관련된 조직은 營造兵器의 책임을 맡은 당나라 軍器寺나 고려 전기의 軍器監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0401) | 朴南守,<新羅 官營手工業 官司의 運營과 變遷>(≪新羅文化≫10·11, 1994 ; 앞의 책)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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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2) | 李基白,<新羅 惠恭王代의 政治的 變革>(≪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242쪽 주 22). 朴南守, 위의 책, 159쪽. |
0403) | 朴南守,<統一新羅 宮中手工業의 運營과 變遷>(≪素軒南都泳博士古稀紀念 史學論叢≫, 1993) ―――,<관영수공업 관사의 운영과 변천>(위의 책), 148쪽. |
0404) | 李基白,<永川菁堤碑 貞元修治記의 考察>(≪考古美術≫102, 1962;앞의 책, 293∼295쪽). |
0405) | ≪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 船府. |
0406) | 李泰鎭,<高麗 宰府의 成立>(≪歷史學報≫56, 1972), 5쪽의<표>高麗 宰府의 成立 참조. |
0407) | 홍희유, 앞의 책, 23쪽. |
0408) | 홍희유는≪三國史記≫職官志 軍官組織에 보이는 四設幢의 弩幢·雲梯幢·衝幢·石投幢 등을 비롯한 皆知戟幢·長槍幢·火尺 등에서 각종 무기를 생산하였던 것으로 파악하였다(홍희유, 위의 책, 24쪽). 물론 이들 부대에는 특수병기를 다루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그 조직이나 각종 전투의 실례를 볼 때 이들은 오히려 특수 병기를 사용하는 전투부대로 보아야 할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