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궁중ㆍ관영수공업관사의 변화
신라는 중대 초엽에 이르러 내성조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신문왕 원년(681) 본피궁을 수반으로 하는 궁중수공업의 체계를 갖추었으며, 수취제도와 군사·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工匠部·彩典·兵部·船府 등을 중심으로 한 관영수공업의 체계를 갖추었다. 그런데 궁중수공업의 경우 매우 정비된 일련의 체계를 보이지만, 관영수공업은 분산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궁중수공업이 주로 국왕이나 왕실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한 생산체계였다면, 관영수공업은 국가의 재정과 관사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체계였기 때문이었다. 경덕왕대 이후 궁중수공업 관사는 점차 관영수공업 관사에 통섭되어 갔다.
특히 나말려초에 이르러 수공업관사는 내성산하의 일개 관사였던 物藏典이 태봉의 관제에서는 고려시대 小府寺의 전신인 物藏省으로 확대 개편되고, 신라 경덕왕대를 전후하여 생산공정에 따라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던 생산관사가 고려의 관제에서는 雜織署·都染署·中尙署 등으로 통합되어 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신라 하대에 서역 또는 중국의 사치품이 신라에 유입되면서 궁중수공업 제품의 수요가 줄어들었고, 그 결과 궁중수공업의 폐쇄적 운영만으로는 더 이상 왕실 귀족의 사치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된 때문이었다. 이에 폐쇄적인 궁중수공업 기술이 사회 저변에 보급·확대되고, 궁중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제외한 각종 물품을 貢賦 등의 형태로 수취함으로써 물장성이 생산을 맡는 관사로 확대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0409)
이와 함께 大匠尺幢과 船府·工匠府·京城周作典·彩典 등의 관사를 중심으로 분산적으로 운영되던 관영수공업은, 각각 고려 초기의 軍器寺와 水曹, 將作監, 소부시 산하의 도염서로 바뀌었다. 이는 결국 당의 관영수공업체계 곧 무기제작을 맡는 군기시, 토목공사의 조영과 수리 및 공장들을 관리하는 장작감, 관용물품을 제작하는 소부시의 세 관사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체계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왕실의 사적 경영의 성격이 강한 궁중수공업이 조세제와 국가의 통치체제에 바탕을 둔 관영수공업에 통합되었음을 의미하며, 또한 최소한의 물품만을 관영수공업에서 일괄적으로 제조하고 여타의 물품은 민간 또는 전업적 수공업 집락에 위임한 때문이었다.
0409) | 朴南守, 앞의 글(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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