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법상종 승려들의 유식학
삼국시대의 교학은 대소승·율학·정토신앙·두타행·화엄·법화·習誦·삼론·천태·밀교 등이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나 그 주류는 唯識이었다. 통일 이전에도 고구려를 비롯하여 삼국에 구유식이 소개되어 이에 대한 이해가 축적되었음을 圓光과 慈藏 등의≪攝大乘論≫을 중심으로 한 교학에서 살필 수 있으며, 통일 후에는 법상종 승려들의 많은 저술에서 유식학의 융성을 확인할 수 있다.1043)
元曉는≪判比量論≫등 유식학의 저술도 상당수 남겼다. 그의 저술에는≪瑜伽論≫이나≪섭대승론≫을 비롯한 유식경론이 많이 인용되고 있어, 새로운 사상인 유식학을 크게 활용하여 그의 사상체계를 수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효의 저술 중에는 유식과 인명에 관한 것이 13종에 이른다. 그는 후에 고려 법상종에서 태현과 함께 해동조사로 추앙되었으며, 불교논리학인 因明을 인식논리학으로 전환시키고 신인명을 확립한 陳那보살의 화신으로 일컬어졌다.
順憬은 불교논리학인 인명에 밝았던 신라승이었다. 순경이 신라에서 현장의 眞唯識量을 전해 듣고 決定相違不定量을 세워 건봉연간(666∼667)에 사신편에 보냈더니 현장은 이미 입적하고 없어 규기가 이를 보고 식견이 높다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순경은 입당하여 현장에게 신유식을 수학한 문인으로 현장에게 유식의 논증방법인 量說을 배우고 신라에 돌아와 이를 전하였다.1044) 순경은 인명에 대한 주석서인≪因明入正理論抄≫를 비롯한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는 대소승을 두루 배우고 청정한 마음을 강조하는 두타행을 실천하였으며 신라에 돌아온 뒤에는 祇園寺에 주석하였다. 그는 또한≪화엄경≫의 初發心 便成佛 구절을 불신하고 비방하다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일화를 남겼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엄에 비해 열세였던 유식의 형세를 가늠할 수 있다.1045)
憬興은 문무왕의 고명으로 신문왕대에 國老로 봉해져서 三郞寺에서 활동한 백제 출신의 인물이다. 경흥은 유식을 비롯하여 여러 부문에 걸쳐 40여 종의 주석서를 남겨 원효·태현과 함께 신라 3대 저술가로 꼽힌 인물이다. 이 저술 중에서 유식에 관한 것이 17종으로 그의 교학연구의 중심을 이루는데, 유식 관계 저술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사상은 알 수 없다. 이 밖에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정토신앙 관계 저술과≪金光明經≫및≪사분율≫에 관한 저술이 특히 많다.
義寂은≪성유식론≫등 유식 관계 4종의 저술을 비롯하여 정토·반야·법화·열반·계율 등 25종의 주석서를 저술하여 유식승의 왕성한 저술활동을 계승하고 유식의 대가로 꼽히기도 한 인물이었다. 의적은 의상과 만나 교리를 토론하는 등 화엄종과 교유를 갖기도 하였다.
太賢은 瑜伽祖라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법상종조로 추앙된 유식의 대가였다. 그는 남산의 茸長寺에 머물면서 미륵과 미타상을 함께 모시는 신앙을 전개하였다.1046)
태현은 일체의 論과 宗을 편력하였다고 기록될 만큼 불교학의 전 분야를 두루 수학하였다. 원효·경흥과 더불어 신라 3대 저술가의 한 사람인 태현은 모두 50여 부의 저술을 남겼다. 화엄의 원융한 이치를 탐구하고 법화·열반·반야 등의 대승경전과 여래장·중관서를 주석하였고 유가계의 戒學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정토 관계 저술도 9종이나 된다. 유식 관계 저술은 20종이나 되는데 이는 그의 중심사상이 유식사상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들은 초기 유식으로부터 중국 법상종의 정통이 된 호법의 유식과 불교논리학인 인명에 이르기까지 현장의 신역으로 이루어진 논서에 대한 광범위한 주석서들이다. 태현은 많은 저술에 古迹記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경론을 주석하는 데 여러 선학들이 주석한 바에 의거하여 그 요점을 취하여 계승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태현은 원측의 유식학을 계승한 道證의 제자로서 유식은 원측·도증을 따르고 화엄은 법장·원효를 계승하여 유식과 중관에 대해 각기 그 진리성을 인정하는 공정한 입장에서 학설을 비판하고 계승하여 종합하였다.1047) 태현의 유식사상의 중심은≪成唯識論學記≫에 나타나 있다. 顯宗出體門·題名分別門·解釋文義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저술에서 태현은 당대 학계의 논쟁점을 포괄하여 자세하게 보여주었다. 이 중 空有쟁론에 대해 태현은 공과 유는 언어상으로는 다투지만 그 근본 취지는 동일한 것으로서, 논쟁의 의도는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화쟁의 입장을 보였다. 태현은 유식학설에 대해서도 법상종 정통의 규기의 학설을 토대로 그와 다른 경향을 보였던 원측의 학설을 포용하여 종합 회통하였는데 여기에 태현의 사상적 특색이 있다. 그러나 그의 중심 입장은 유식 중도를 근본 종지라고 본 호법의≪성유식론≫에 근거한 신유식사상이었다.1048)
중대 초기 이래의 유식학승들의 활동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태현의 사상과 신앙이 중심이 되어 경덕왕대에 법상종이 형성되었다. 태현은 유식중도설의 입장에서 각 교설의 의미를 밝혀 性相의 대립을 지양하고 신라 불교학의 성과를 종합한 사상적 바탕으로 독실한 미륵신앙을 실천하여 교학연구를 계승하는 유식학승들을 이끄는 법상종의 조사가 되었다.
유식 경론 주석서
圓測 해심밀경소(○)·구사론석송초·성유식론소·성유식론별장·유가론소·이십유식론소·광백론소·백법론소·관소연연론소·육십이견장·광백론소·대인명론소·인명정리문론소 神昉 십륜경초·십륜경소·십륜경음의·대승대집지장십륜경서(○)·순정리론술문기서·성유식론요집·현유식론집기·종성차별집 元曉 해심밀경소(◇)·유가론소·유가초·유가론중실·섭대승론세친석론약기·섭대승론소·양섭론소·중변분별론소(◇)·변중변론소·잡집론소·성유식론종요·인명론소·판비량론(◇)·인명입정리론기 憬興 해심밀경소·구사론초·유가론소·유가론초·유가석론기·성유식기·성유식론폄량·유식추요기·현유식기·현양론소·현양론술찬·인명론의초·법원의림기·금광명경약의·금광명경술찬·금광명최승왕경약찬(○)·최승왕경소 智仁 불지론소·현양론소·잡집론소 靈因 해심밀경소·구사론초 行達 유가론요간·유식추요기 順璟 성유식론요간·인명입정리론초 道證 성유식론요집·성유식론강요·섭대승론세친석론소·변중변론소·인명입정리론소·대인명론초·대인명론소 勝莊 금광명최승왕경소(◇)·성유식론결·잡집론소·불성론의·대인명론술기 玄一 유가론소·유가론사기·중변론요간 悟眞 인명론비궐략·법원의림집현초·성유식론의원초 義寂 성유식론미상결·백법론총술·백법론주·대승의림장 道倫 금광명경약기·성유식론요결·유가론기(○) 太賢 유가론고적기·유가론찬요·중변론고적기·현양론고적기·잡집론고적기·섭대승론세친석론고적기·유식이십송고적기·변중변론고적기·성업론고적기·오온론고적기·백법론고적기·성유식론학기(○)·성유식론결택·광백론고적기·불지론고적기·섭대승론무성석론고적기·관소연연론고적기·인명정리문론고적기·인명입정리론고적기·인명입정리론기·인명입정리론학기·금광명경술기·금광명경요간·법원의림석명장·광석본모송·대승일미장·보살장아비달마고적합집 (≪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 東國大 出版部, 1976, 9∼93쪽을 토대로 함. ○는 현존, ◇는 부분 현존).
법상종의 또 하나의 계통으로 眞表(718∼?;734∼?)계가 꼽힌다. 完山州 출신의 진표는 입당하여 善導에 배워온 崇濟(順濟)에게 金山寺로 출가한 뒤 亡身懺 수행으로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계법을 받았다는 인물이다.1049) 진표는 점찰법을 강조하였는데 점찰법은 점찰로서 자신의 果報를 점치고 그 결과에 따라 참회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진표는 지옥 중생까지 구제하겠다는 悲願의 보살인 지장신앙과 미륵상생을 추구하는 참회수행을 아울러 실천하며 이끌었다. 이와 같이 점찰법과 지장신앙을 바탕으로 진표가 선도한 법상종의 흐름은 永深·融宗 등에 의해 여러 지역에 확산되었고, 신라 하대의 心地와 고려에 연결된 釋忠 등 진표의 문도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이렇게 속리산·명주·개골산 등지의 고신라 변방지역에 실천신앙 중심의 교화를 전개한 법상종은 기층민에게까지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법상종은 유식사상연구를 중심으로 계율연구를 비롯한 광범위한 교학연구를 수행하여 신라 교학연구를 주도하면서 화엄종과 대비되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법상종에는 두 가지 계통이 있었다. 하나는 태현의 법상종으로 경덕왕대에 서울을 중심으로 유식학연구의 학파적인 교단이 미륵과 미타신앙을 체계화하여 전개되었다. 그리고 또하나는 진표의 법상종으로 이보다 약간 늦게 지방을 근거지로 계율과 참회를 내세운 실천적인 교단이 일반민을 대상으로 미륵과 지장신앙을 조직화하며 전개되었다.1050)
1043) | 吳亨根,<新羅唯識思想의 特性과 그 歷史的 展開>(≪韓國哲學硏究≫上, 東明社, 1977), 254∼265쪽. 金南允,<新羅 中代 法相宗의 成立과 信仰>(≪韓國史論≫11, 서울大, 1984), 105∼10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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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4) | 金相鉉,<新羅 法相宗의 成立과 順憬>(≪伽山學報≫2, 伽山佛敎文化硏究院, 1993), 80∼82쪽. |
1045) | 金南允, 앞의 책, 26∼29쪽. |
1046) | ≪三國遺事≫권 4, 義解 5, 賢瑜伽海華嚴. |
1047) | 蔡印幻,<大賢의 戒學>(≪新羅佛敎戒律思想硏究≫, 東京;國書刊行會, 1977), 391쪽. ―――,<新羅大賢法師硏究>(≪佛敎學報≫20·21·22, 東國大, 1983∼1985). 李 萬,≪新羅 太賢의 唯識思想 硏究-成唯識論學記를 中心으로-≫(동쪽나라, 1989). |
1048) | 金南允, 앞의 책, 48∼80쪽. |
1049) | ≪三國遺事≫권 4, 義解 5, 眞表傳簡 關東楓岳鉢淵藪石記. ≪宋高僧傳≫권 14, 唐百濟國金山寺眞表傳(≪大正新修大藏經≫권 50, 793∼794쪽). 蔡印幻,<新羅眞表律師硏究>(≪佛敎學報≫23·24·25, 1986∼1988). |
1050) | 金南允, 앞의 글, 130∼135쪽. 文明大는 道證과 甘山寺 金志誠의 활동에서 보듯이 720년경에 법상종이 성립되었다고 하며 원측·태현계와 원광·진표계의 양계로 나누어 보았다(文明大,<新羅 法相宗의 成立과 그 美術>,≪歷史學報≫62·63, 1974, 156∼160쪽). 金相鉉은 순경에 의해 법상종이 성립되었다고 보았다(金相鉉,<新羅 法相宗의 成立과 順璟>,≪伽山學報≫2, 1992, 94∼10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