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발해의 대외관계
1. 신라와의 관계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나 기록이 없다고 해서 남북의 교섭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특히 피지배 주민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다. 남북왕조가 교섭했다고 하는 기록이≪三國史記≫에 분명히 남아 있고, 발해에서 신라로 통하는「新羅道」197)로서 신라 泉井郡(咸南 德源)으로부터 발해의 柵城府(吉林省 琿春)까지 39개의 驛이198)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상에 전하는 몇 차례의 남북교섭은 신라 왕실의 정변 이후였던가, 아니면 발해가 외세로부터 위협을 받아 왕실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였다.≪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남북교섭에 관한 두 차례의 기록은 金富軾 등도 중요한 사건이라고 인정하였기에 남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남북국의 교섭은 기록상에 나타나는 접촉의 횟수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남북국의 문제는 서로 교섭을 하였는지의 여부보다는, 양국이 어떠한 이유로 교섭을 시도하였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남북국의 관계는 교섭보다 대립의 시기가 더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기록들을 사실대로 믿어야 할지 아니면 기록의 미비로 인한 결과로 보아야 할지 의문이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는 교섭 못지않게 대립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쟁도 역시 ‘적극 교섭’의 일환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삼국이 한강유역 쟁탈이라는 현실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서로 대립하였던 사실을 분쟁의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독자적인 역사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노력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즉 삼국의 항쟁을 민족통일 과정의 일환으로 받아들인다면 남북국의 대립관계 역시 한국의 역사상에서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229년간 지속되었던 남북국의 관계는 교섭과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대개 다섯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발해가 건국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20여 년간의 남북교섭기(698∼713), ② 발해의 정복사업 추진기로서 발해의 제2대 武王과 제3대 文王의 집권 중기까지 60여 년간의 남북대립기(713∼785), ③ 신라 元聖王과 憲德王의 정변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형성된 30여 년간의 남북교섭기(785∼818), ④ 발해국의 고구려 땅 회복정책과 신라와 당의 밀착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남북대립기(818∼905), ⑤ 발해 멸망기의 남북교섭기(905∼926)가 그것이다.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