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Ⅲ. 후삼국의 정립2. 후백제4) 후백제의 몰락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1. 중대에서 하대로
          • 1) 기로에 선 중대 전제왕권
          • 2) 혜공왕 말년(780)의 정변 ― 중대의 종말
          • 3) 하대의 개막과 원성왕계의 성립
        • 2. 귀족사회의 분열과 왕위쟁탈전
          • 1) 왕실가족에 의한 권력독점
          • 2) 무열왕계의 반발과 김헌창의 난
          • 3) 범진골 귀족세력 화합책의 시도
          • 4)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계승쟁탈전
        • 3. 정치개혁의 실패
          • 1) 율령의 개정을 통한 집권체제의 정비 시도
          • 2) 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합체화에 의한 권력집중 시도
        • 4. 골품제도의 퇴화
          • 1) 골품제의 사회적 기반의 축소
          • 2) 진골귀족의 분열
          • 3) 6두품세력의 성장
        • 5. 수취체제의 모순과 농민층의 피폐
          • 1) 귀족 및 사원의 농장경영과 왕경의 번영
          • 2) 농민층의 피폐와 자영농민의 몰락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1. 호족세력의 대두 배경
          • 1) 호족의 개념
          • 2) 호족세력의 대두 배경
        • 2. 호족세력의 대두
          • 1)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
          • 2) 군진세력 출신의 호족
          • 3)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 4) 촌주 출신의 호족
        • 3. 장보고와 청해진
      • Ⅲ. 후삼국의 정립
        • 1. 후삼국기의 신라
        • 2. 후백제
          • 1) 후백제의 성립
            • (1) 견훤의 출신과 군사적 기반
            • (2) 후백제의 성립과정
          • 2) 후백제의 발전과 호족연합
            • (1) 영토의 확대
            • (2) 호족과의 연합
          • 3) 후백제의 대외정책
            • (1) 대신라정책
            • (2) 대고려정책
            • (3) 대중국·일본정책
          • 4) 후백제의 몰락
            • (1) 신검 형제의 정변
            • (2) 신검정권과 그 멸망
        • 3. 태봉
          • 1) 궁예의 출신과 사회적 진출
          • 2) 후고구려의 건국
            • (1) 자립과 세력기반의 확립―하층농민의 포섭
            • (2) 건국―호족들과의 제휴
          • 3) 마진과 태봉의 중앙정치조직
            • (1) 광평성체제의 성립과 호족연합정권-마진
            • (2) 광평성체제의 변화와 전제왕권―태봉
          • 4) 태봉의 몰락
            • (1)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의 추구와 그 지지세력
            • (2) 반궁예세력의 동향과 918년 정변
      • Ⅳ. 사상계의 변동
        • 1. 유교사상의 변화
          • 1) 유교사상의 발달
          • 2) 숙위학생의 활동
          • 3) 유교사상의 변화
        • 2. 불교의 변화
          • 1) 교학 불교의 전개
            • (1) 화엄종
            • (2) 법상종
          • 2) 선종의 흥륭
            • (1) 북종선의 전래와 남종선의 도입
            • (2) 선종 유행의 사회적 기반
            • (3) 선종산문의 성립
            • (4) 선종사상의 경향
          • 3) 미륵신앙
            • (1) 미륵의 출현과 말법신앙
            • (2) 궁예의 이상세계 건설
          • 4) 유·불·선 3교의 융합
            • (1) 유·불 2교의 교섭
            • (2) 유·불·선 3교의 조화
        • 3. 풍수지리·도참사상
          • 1) 풍수지리설의 도입
          • 2) 유식론적 선사상의 성립
          • 3) 지방호족 중심의 국토 재구성안
          • 4)<삼국도>의 작성과 비보사상
          • 5) 도참사상의 전개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4) 후백제의 몰락

(1) 신검 형제의 정변

 후백제는 군사적인 면에서 고려와 신라를 압도하고 있었고 대외정책적인 면에서도 오월이나 후당과의 외교를 통해 그 지위를 인정받는 등 유리한 국면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930년 정월 고창전투에서 왕건군에게 패한 후 전세는 역전되어 급격히 쇠퇴하였고 주변의 호족들도 다투어 후백제를 이반함에 따라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다. 이처럼 갑자기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후백제의 정치적 혼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견훤전에 의하면 그 정치적 혼란은 견훤 자식들간에 있었던 왕위쟁탈전에서 비롯된 것으로 되어 있다. 견훤은 여러 아들 중 넷째인 金剛을 사랑한 나머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이에 長子인 神劍과 2·3子인 良劍·龍劍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 때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와 무주에 도독으로 나가 있었는데 伊粲 能奐이 이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4子인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金山佛宇에 유폐시킨 후 신검을 왕위에 추대하였다.

 그러나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은 3개월 만에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였고, 이어 후백제 내에 있던 견훤의 사위 박영규도 이에 내응하여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견훤과 박영규의 도움을 얻게 된 고려측은 936년 신검군과 황산에서 결전을 벌여 승리하였다. 신검·양검·용검 3형제는 항복하였고 곧 후백제는 멸망하였다.

 이처럼 후백제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은 신검 3형제와 금강 사이의 왕위쟁탈전을 둘러싼 내분에서 비롯되었고, 거기에 견훤과 朴英規가 고려에 투항함으로써 급진전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후백제 멸망의 원인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견훤이 금강을 편애한 데서 온 형제간의 알력에만 초점을 둔 지극히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설명에 불과할 뿐 견훤이 금강을 편애한 이유, 즉 왕위를 물려 주고자 한 이유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신검·양검·용검의 3형제를 제쳐두고 금강이 견훤의 후계자로 등장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야말로 후백제의 지배세력을 둘러싼 권력쟁탈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약 반세기 동안이나 존속하였던 후백제의 지배세력은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집단들로 구성되었을 것이고, 그들간에 권력의 핵심을 둘러싸고 상호 대립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신검 3형제와 금강간의 싸움도 다만 견훤의 금강에 대한 편애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이들 형제를 둘러싼 서로 다른 정치 지배세력의 존재라든가 그 세력을 구성하였던 인물들간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후백제 내의 이러한 대립은 이미 930년의 고창전투 이전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후백제는 930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전라·충청 전지역과 경상 북부일대를 지배하에 두면서 신라와 고려를 크게 압박하고 있었다. 즉 927년에는 신라의 경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폐위시키고 대신 경순왕을 옹립하여 견훤의 괴뢰정부를 수립하였고 이에 반발하는 고려를 公山桐藪에서 대파시킴으로써 왕건은 겨우 單騎로 도망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는 후백제가 보은·회인·청주·공주·홍성 등 충청 일대와 합천·초계·의성·약목·벽진·거창 등 낙동강 일대를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930년 정월 고창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는 경상 일대에서는 영천·하양·안동·청송 등 30여 군현을, 충청 일대에서는 청주·보은·홍성 등 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고려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1, 2년 만에 갑자기 이루어진 변화였다.

 이처럼 930년을 고비로 하여 갑자기 상황이 역전된 이유를 단순히 고창전투의 패배라고 하는 군사적인 측면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 이유는 후백제의 내분으로 여겨진다. 후백제의 내분은 930년을 전후하여 비롯되었으며 그것이 정변으로 표출된 것이 935년으로 생각된다.≪삼국유사≫ 견훤전에는 견훤과 신검 형제들간에 대고려전의 대립을 암시해 주고 있는 기록이 보인다. 즉 견훤이 왕건에게 귀부할 의사를 비치자, 신검·양검·용검 3형제가 모두 이에 불응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200) 한편 신검이 정변을 일으킨 후에 발표한「敎書」에 의하면 견훤이 초기에는 “뛰어난 무용과 지모로 그 功業이 거의 중흥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智慮가 一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갑자기 ‘智慮一失’ 하게 된 이면에는 “간신이 권세를 농락하여 (견훤을) 昏暗과 迷惑에 빠지게 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견훤이 갑자기 ‘지려일실’ 했다고 하는 것은 930년 이후의 상황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권세를 농락하던 소위 간신들이란 바로 금강을 왕위에 추대하고자 한 세력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이 당시 전투에 나가 활약하던 신검을 비롯하여 양검·용검의 3형제를 제쳐두고 나이 어린 금강을 내세워 견훤의 후계자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신검 형제들로 하여금 불만을 초래하게 하였고 결국 정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금강이 왕위에 추대된 이유를≪삼국사기≫ 견훤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즉 “넷째 아들 금강은 키가 크고 智略이 많아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해 주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실정을 옳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금강은 당시까지만 해도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신검이 935년 반란을 일으킨 후 즉위하여 내린 敎書에 의하면 금강을 가리켜 ‘幼子’ 또는 ‘頑童’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신검정변이 있기 10여 년전인 924년에는 신검과 양검은 曹物城전투에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고, 또 양검과 용검은 군사요충지인 康州(진주)와 武州(광주)의 도독으로 나가 있었다.201) 이들 3형제의 나이는 적어도 20세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12년 후인 935년 10월 금강을 ‘幼子’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연소한 어린아이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신검 3형제와 금강은 적어도 20년 정도의 나이차가 있었다고 생각되며, 금강이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아 그를 왕위에 추대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금강이 왕위에 추대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견훤에게 여러 명의 부인과 자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견훤은 광주와 전주에서 지방 호족세력과 결합하기 위해 정책적인 통혼을 했고, 그 결과 후백제 내에는 여러 외척세력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결국 신검·양검·용검 3형제와 금강은 서로 母系를 달리하는 이복형제간이며, 신검 3형제와 금강간의 왕위쟁탈전도 이들 두 외척집단간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신검 3형제와 금강이 이복형제였을 것이라는 점은 신검 3형제는 모두 성장한 어른이었던 데 비해 금강은 이들과 20년 정도 나이차가 있었다는 사실과, 신검 3형제와 금강이 그들의 이름에서도 차이가 나는 점에서 알 수 있다.202) 신검·양검·용검은 모두 후백제 초기 즉 광주정부 시절에 출생한 아들이었던 데 비하여 금강은 전주로 천도한 후에 새로 맞아들인 부인의 소생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신검 3형제의 외척세력은 광주정부 시절 견훤이 맞아들였던 ‘光州 北村의 富人女’의 집안으로 여겨지며, 금강의 외척세력은 전주천도 후 그 곳 지방세력과 결합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혼인한 전주 일대의 호족세력으로 추측된다.

 특히 신검 3형제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신검이 반란을 일으킨 직후에 내린 교서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중 견훤의 업적을 평가한 부분이 특히 주목된다. 즉 견훤이 초기에는 무용과 지모가 특출하여 백제를 크게 중흥시키게 되었는데 후에 가서는 간사한 신하들이 권세를 잡고 견훤을 昏暗과 迷惑에 빠뜨렸기 때문에 갑자기 금강을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후백제의 정치적 추이와 비교해 볼 때 대체로 사실과 부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지적한 대로 후백제는 930년 이전까지는 군사적으로 크게 우세하여 고려와 신라전에서 계속 승리하였고 주변의 호족세력들도 다투어 후백제에 내속되고 있었다. 교서에서 “백제를 중흥시키는 공업을 이룩하였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930년 고창전투의 패배 이후 전세는 역전되어 갔는데, 그 이유를 위의 교서에서는 견훤이 주위의 세력들에 의해 혼암과 미혹에 빠진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어린아이에 불과하였던 금강에게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아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는 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으며, 새로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금강의 외척세력―신검의 교서에 의하면 ‘권세를 농락한 간신’들―이 그를 옹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신검과 금강과의 대립은 신검 3형제를 중심으로 한 그의 외척세력과 930년 이후 새롭게 대두된 정치세력, 즉 금강의 외척세력간의 권력쟁탈전이었다고 하겠다.

200)이러한 내용은≪三國史記≫ 견훤전에만 보이고,≪三國遺事≫ 견훤전이나≪高麗史≫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201)≪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7년 7월.
202)신검·양검·용검은 모두 ‘劍’자가 들어 있어 후백제 초기 고려군과의 전투에 참여했던 자신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데 비하여, 金剛은 불교적 색채가 강한 이름을 갖고 있다. 이는 견훤 말기 견훤의 불교사상과도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