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둔전 운영의 변모
여섯 차례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으로 고려의 많은 토지는 황폐해졌다. 둔전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둔전은 당시 농장 확대에 앞을 다투던 권세가들에게 탈점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례로 앞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전라도 임피둔전은 공민왕 때에 이르러 권세가들에 의해 거의 탈점되고 말았다. 그런데 권세가들의 둔전 탈점이 비단 이 임피둔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전국의 무수한 둔전이 그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피둔전의 복구와 함께 “各道의 모든 古屯田處도 臨坡屯田의 예를 따라 처리하라”는 조치를 덧붙이고 있는 공민왕 5년의 교지가0569) 이를 잘 말해 준다. 예전에는 둔전이었으나 권세가들의 탈점으로 당시에는 둔전으로 활용되지 않던 곳을 ‘古屯田處’라 표현했던 것이다. 양계 둔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공민왕과 우왕 때에 이르러서는 많은 서북면의 토지가 권세가에게 겸병되어 있었다고 하는데,0570) 둔전이라고 해서 겸병되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임피둔전의 예에서 보듯이 남도의 둔전은 이미 권세가들의 탈점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둔전의 기능 상실은 곧 軍需의 부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부족할 군수를 보충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당시의 국가재정이 넉넉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만성적인 재정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필요한 군수를 제대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황폐화되고 탈점된 둔전을 복구시키거나 새로운 둔전을 개발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 이전까지는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對蒙抗爭이 계속되고 있던 고종 43년(1256)에 방축 공사를 통해 둔전을 개발한 사례만이 보일 뿐이다.0571) 오히려 충선왕 때에는 家戶屯田이라는 둔전의 변형이 등장하였다.0572) 이 가호둔전은 戶給屯田으로도 불리었는데, 봄에 농민들에게 종자만을 지급하고 가을에 그 몇 배를 징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둔전으로 경작할 토지의 지급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호급둔전의 복설을 논의한 조선 초기에도 계획은 세웠으나 결국 토지의 분급을 실현시키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참고된다.0573) 뿐만 아니라 농사의 풍흉을 불문하고 수취를 자행하는 등 그 약탈성이 극심하였으므로 농민이 매우 괴로워했다. 이에 따라 우왕 원년에 이르러 이를 전면적으로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0574) 그러나 가호둔전은 이미 지방관아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변해 있었으므로 단시일에 금지될 수는 없었다. 우왕 5년에 이의 금지를 다시 건의하고 있는 문하부 낭사의 상소가0575) 그러한 사정을 잘 말해 준다.
이러한 가호둔전은 각처의 일반 농민을 대상으로 시행된 것이었으므로 자연히 지방관이 그 운영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그 수입이 지방관아로 유입될 가능성도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는데, 우왕 5년의 문하부 낭사의 상소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지방관들은 빈객의 접대 비용을 비롯한 관아 운영의 경비로 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軍需를 비롯한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는데 그리 큰 보탬이 되지는 못하였다고 여겨진다. 바로 이것이 가호둔전을 폐지코자 한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이처럼 가호둔전도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공민왕 때에는 원래의 둔전을 재건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특히 당시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던 때였으므로 이에 대비한 군수의 확보는 시급한 과제였다. 둔전 재건의 노력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예전의 둔전을 복구시키고 새로운 둔전을 개발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임피둔전을 비롯한 ‘古屯田處’를 복구시키고, 연해 지역 중에서 쓸만한 땅을 골라 왜구를 막는 군졸로 하여금 경작케 하며, 권세가의 賜給田 중 비옥하여 둔전을 설치할 만한 곳에 被罪人들을 투입하여 경작하도록 한 공민왕의 조치는0576) 이러한 둔전 재건의 의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노력은 우왕 때에도 계속되었다. 우왕 연간은 왜구의 창궐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고, 북방에 대한 경계도 강화해야 했던 때였으므로 군수의 조달에 더욱 진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관원과 민을 대상으로 군량을 추렴하기도 하였으며, 공·사전의 전조를 일시적으로 군수에 전용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둔전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군의 대소에 따라 의무적으로 경영해야 할 둔전의 액수를 정해 주고 守令에게 그 운영의 책임을 지우며, 양계에는 한광지를 택해 둔전을 설치하고 청렴한 자를 파견하여 그 경영을 독려케 하는 등의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0577) 이러한 계획이 그대로 시행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당시는 군수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때였으므로 어느 정도는 실현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렇게 볼 때 고려 후기에는 양계 지역은 물론 남도의 연해 지역 및 내륙의 군현에까지 군둔전이 설치되었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臨坡(沃溝)를 비롯하여 平州·白州·江陰·禮山·陰竹(安城) 등지에 국둔전이 설치되었음을 말해 주는 기사도 보인다. 즉 조선이 개국되면서 陰竹屯田을 제외한 모든 연해 지역의 둔전이 혁파되었다고 하는데0578) 태종 때에 이르러 이들 지역의 둔전 복설이 재론되었던 것이다.0579)
이렇게 공민왕 및 우왕 때의 노력으로 적지 않은 둔전이 복구되거나 새로 개발되었지만 그 운영은 원만하지 못하였다. 둔전의 경작을 위해 평민을 사역하기도 하고, 수확량이 부족하면 경작을 맡은 戍卒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는 경작자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또 책임을 맡은 관리가 종자를 갈취하기도 하고, 경작을 독려하지 않음으로써 둔전을 황폐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둔전의 운영은 별다른 실속도 없이 민폐만을 야기할 뿐이었다.0580) 이 때문에 조선의 개국과 함께 음죽둔전을 제외한 나머지 국둔전(군둔전)은 일단 모두 혁파되었다.0581)
0569)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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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0)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신우 원년 10월·권 78, 志 33, 食貨 1, 田制 租稅 공민왕 5년 6월 下旨. |
0571) |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
0572) | “屯田煙戶米法 前朝忠宣王所設 及僞朝之季 不行”(≪太宗實錄≫권 14, 태종 7년 7월 계축). 여기서의 屯田이 戶給屯田이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李載龒, 앞의 글 참조. |
0573) | 이에 대해서는 李景植, 앞의 글 참조. |
0574)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
0575)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신우 5년 정월. |
0576)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공민왕 5년 6월 敎. |
0577)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신우 5년 정월 門下府郎舍 上疏. |
0578) | 鄭道傳,≪三峯集≫권 8, 朝鮮經國典 下, 政典 屯田. |
0579) | ≪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12월 경술. |
0580) | 鄭道傳,≪三峯集≫권 8, 朝鮮經國典 下, 政典 屯田. |
0581) | ≪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