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둔전과 학전·적전
(1) 둔전
가. 둔전의 설치와 운영
둔전은 변경지대나 군사상의 요충지에 설치하여 그 곳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군수에 충당하는 것과 지방의 군현에 설치하여 그 수확으로써 주로 지방관아의 운영경비에 보충하는 것의 두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문헌 기록에서 양자를 구별하는 용어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전자는 내용상 조선시대의 國屯田에 해당하며 현재 흔히 軍屯田이라 부르고 후자는 조선시대에 官屯田(州縣屯田)이라 하였으므로 이를 원용하여 관둔전으로 칭하고 있다.
고려는 국방상의 요지인 양계 지역의 군수를 마련하기 위하여 그 곳의 민전에서 수취되는 전조를 모두 군수에 충당시키는 방안을 마련하였다.1)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남도의 민전에서 거두어 들이는 전조의 일부를 양계로 운송하여 필요한 군수를 보충하기도 하였다. 龍門倉에 수납된 전조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경상도 동해안 지역의 전조가 동계에 이송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2) 그러나 이 방법은 조운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었다.0525)군수를 조운하는 이러한 불편함을 덜고 필요한 군수를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시행된 방안이 바로 둔전(군둔전)의 운영이었던 것이다.0526)둔전 운영의 목적이 조운 비용의 절감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둔전의 경작에 필요한 노동력으로 군인을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도 둔전 운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둔전의 법은 防戍 軍卒과 閑民을 동원하여 閑曠地를 둔전으로 경작함으로써 조운의 비용을 더는 것이다”고 하는 우왕 원년(1375)의 下旨나,0527) “유사시에는 병기를 잡고 일이 없을 때에는 둔전하게 하면 군량을 수송하는 비용이 절감되고 군량은 넉넉해질 것이다”고 하는 공민왕 5년(1356)의 廉悌臣의 상소,0528) “屯田法은 전투도 하고 농경도 함으로써(且戰且耕) 조운의 비용을 덜고 군량을 풍족하게 하는 방법이다”고 하는 鄭道傳의 설명0529) 등은 모두 이러한 사실을 말한다. 요컨대 둔전을 설치한 목적은 방수를 맡은 군인으로 하여금 평상시에는 둔전을 경작하여 군수를 비축하게 하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군량수송의 비용을 절감하고자 한 것이었다.
고려에서 이러한 군둔전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대체로 성종대를 전후한 시기였다고 이해되고 있다.0530) 그러나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당군이 南原에 설치하였다는 둔전이 우리 나라 최초의 군둔전으로 이해되고 있는 만큼,0531) 고려에서도 개국 초기부터 둔전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즉 당군이 남원에서 둔전을 운영한 이후 통일신라 때에도 둔전은 적지 않게 확대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0532) 후삼국의 쟁패 과정에서도 군수 조달을 위한 방법으로 적극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浿江鎭 개척을 위해 통일신라 후기에 설치되었다가 고려에 계승되어 현종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安西道의 둔전이 그 일례라 하겠다.0533)
그러므로 고려의 둔전에는 우선 통일신라시대 또는 후삼국의 쟁패 과정에서 설치되어 고려에 계승된 것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밖에도 고려가 개국된 이래 새로 설치된 둔전 또한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방상의 요지였던 동북 양계의 많은 둔전은 태조 이래 한동안 계속된 북방개척의 과정에서 새로 점령한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고려는 태조 때부터 築城·設鎭·徙民을 통해 북방을 개척하고 방수군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의 군량을 확보하는 방편으로 개척지에 둔전을 설치·운영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천강 북단의 嘉州에 있었다는 둔전이나,0534) 의종 17년(1163)에 金光中이 麟州·靜州 관내의 섬에 설치하였다는 둔전0535) 등은 모두점령 지역에서 둔전을 운영한 실례라 하겠다. 가주 둔전의 경우 그 설치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 곳에 축성이 이루어진 광종 연간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0536) 이 밖에 양계의 다른 지역에도 둔전이 설치되었을 것은 물론이다. 둔전의 관리기구로 여겨지는 東路屯田司가 靖宗代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나,0537) 서북면의 여러 성·주·진의 官馬 중에서 노쇠한 것과 없어진 것을 보충하는 데 공수전과 둔전의 수입이 쓰이고 있던 일0538) 등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동계 지역에 상당수의 둔전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동로둔전사라는 관리기구가 두어졌을 리 없고, 서북면(북계)에 둔전의 설치가 보편화되지 않았다면 주·진 관마의 보충 재원으로 둔전의 수입을 사용하는 조치가 취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둔전의 설치가 양계 지역에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리라는 것은 장성 밖에까지 둔전을 설치하였던 문종 27년(1073)의 사례에서도0539) 충분히 짐작된다.
군둔전은 양계 외에 해안, 특히 동해의 연변 지역에도 설치되었다. 즉 동해안 지역은 동여진의 침략을 대비해 태조 때부터 축성과 함께 수비군의 주둔이 시작되었는데, 이들의 군수를 조달하기 위하여 연안 지역에 둔전을 설치·운영하였던 것이다. 문종이 병부 낭중 金瓊을 파견하여 동해에서 남해에 이르는 연변 지역에 성보와 농장을 개척한 일이나0540) 선종 때 興海郡의 母山津農場에 침입한 동여진을 戍卒들이 격퇴한 사례0541) 등에 보이는 농장의 실체는 다름 아닌 군둔전이었다.0542) 그리고 “前朝에서는 陰竹屯田을 두고 또 연해 주군에 모두 둔전이 있어 군량의 재원이 되었다”고 하는 정도전의 지적에서도0543) 각 처의 해안 지역에 군둔전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정도전의 설명은 주로 고려 후기의 실정을 이야기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모든 연해 주군의 둔전이 후기에 비로소 설치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으며, 그 중 일부는 적어도 고려 전기부터 있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설명한 동해 연변지역의 농장이 바로 그러한 둔전이었을 것이다. 한편 후기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전기에도 양계와 연해 주군 외의 내륙 지역에까지 군둔전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이를 시사해 주는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이처럼 군둔전은 주로 변경 지역의 개척, 즉 축성 및 설진의 과정에서 설치되어 갔으므로 개간되지 않은 황무지가 둔전 운영의 주된 대상이 되었다. 이는 앞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우왕 원년의 하지, 즉 “둔전의 법은 防戍 軍卒과 閑民을 동원하여 閑曠地를 둔전으로 경영함으로써 조운의 비용을 더는 것이다”고 하는 설명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동서 양계의 用兵이 매우 급하니 마땅히 한광지를 택하여 둔전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하는 우왕 5년의 문하부 낭사의 상소와,0544) “漢나라가 흉노를 막아낸 고사를 원용하여 亡邑의 황무지에 둔전을 설치해야 한다”고 건의한 우왕 14년의 사헌부 상소0545) 등에서도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들 기록은 모두 우왕 때의 것이므로 고려 후기에만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광지에 둔전을 설치하는 것’이 ‘屯田之法’, 즉 둔전 운영의 기본 원칙이었다고 하는 우왕 원년의 하지에 주목해 볼 때 전기의 실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고려 때만이 아니라 조선에서도 둔전은 주로 황무지의 개간을 통해 확대되어 갔다.0546) 따라서 둔전의 설치와 확대는 황무지 개간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처럼 많은 둔전이 황무지 위에 설치되었으므로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둔전의 생산성은 그 밖의 토지, 예컨대 민전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랫 동안 운영되어 가면서 그 생산성은 점차 향상되어 갔을 것이다.
한편 군둔전으로 설정된 토지는 국·공유지였다. 둔전이 주로 설치되었던 곳으로 생각되는 변경의 점령지나 개간되지 않은 황무지는 대부분 국·공유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종이 玄化寺에 시납한 안서도 둔전의 사례에서 보듯이 둔전이 국왕의 마음대로 처분되는 토지였다면 그것은 사유지일 수 없고, 사유지가 아닌 토지는 곧 국·공유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둔전은 공전의 세 유형 중에서 2과공전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군둔전이 주둔군의 군졸을 동원하여 경작하는 직영제 형태로 경영되었을 것은 물론이다. 앞에서도 소개한 바 있지만 둔전 설치의 근본 동기와 목적이 ‘전투와 토지(둔전) 경작을 겸하게 하는 것(且戰且耕)’에 있었던 만큼 둔전의 경작에 군졸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당수의 둔전은 군인의 사역을 통하여 경작되고 있었다. 부곡민의 사민이 있기 전까지의 가주 둔전이나,0547) 의종 때 김광중에 의해 인주와 정주 관내의 섬에 설치되었다는 둔전은 모두 그 곳에 주둔해 있던 방수군에 의해 경작되었을 것이다. 또 연해 둔전의 하나인 모산진 농장에서도 동여진을 격퇴시킨 수졸 이외에 특별한 둔전경작자를 찾기 어렵다. 이 직영제 경영에서는 경작에 필요한 종자와 농우·농기를 관에서 제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0548) 동계 지역 둔전의 관리기구인 동로둔전사에 다수의 耕牛가 있었던 것은0549)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군둔전은 군인에 의해 경작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둔전의 면적이 매우 넓어 경작할 군인의 수가 부족하거나 주둔지의 이동 등으로 인해 군인에 의한 직접 경작이 어려운 경우 새로운 경영형태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때 채택된 것이 바로 전호제 경영이었다고 생각된다. “西京畿 내의 河陰 部曲民 100여 호를 嘉州 南屯田所로 이주시켜 佃作케 하자”고 한 현종 15년(1024)의 도병마사 奏文에0550) 보이는 가주 둔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佃作을 단순한「토지 경작」의 의미로 해석하고, 위 기록은 둔전 경작에 부곡민을 강제로 동원시킨 직영제 경영의 한 증거였다고 이해한 견해도 있기는 하다.0551) 그러나 이 전작은 전호제 경작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 왜냐하면 비록 강제로 사민되기는 하였지만 가주로 이주한 부곡민들이 이전보다 열악한 사회·경제적 상태, 즉 직영제로 경영되는 둔전에 사역되는 존재로 전락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사민 이전에 자작 또는 소작의 어떠한 형태로든 농경에 종사하였을 것인데, 그보다 여건이 열악한 직영형 둔전의 경작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이해라고 하겠다.
따라서「佃作」은 전호제 경작의 뜻으로 해석되며, 가주 둔전도 부족민의 사민이 있은 후로는 그들을 전호로 하는 전호제 경영을 택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0552) 또 “주진의 둔전군 1대에 토지 1결씩을 지급하고 旱田 1결에서는 1석 9두 5승, 水田 1결에서는 3석을 거두되 10결에서 20석 이상을 내는 色員은 포상하고 군졸이나 백성에게서 징렴하여 숫자를 채우는 자는 죄를 준다”고 한 숙종 8년의 판문에서도0553) 군둔전의 전호제 경영을 엿볼 수 있다.
즉 여기서의 둔전군은 대체로 둔전 경작을 위해 모집된 자소작농이었을 것이며, 한전·수전에서 ‘거둔다’는 1석 9두 5승과 3석은 각각 그 곳에서의 수조액이었다고 여겨지는데,0554) 이러한 둔전에서의 수조는 그것의 전호제 경영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물론 1석 9두 5승과 3석을 한전·수전의 생산량으로 간주하고, 이 둔전은 둔전군의 사역을 통한 직영제로 경영되었다고 하는 이해도 가능하다.0555)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1결의 생산량이 당시의 일반적인 토지생산량에 비해 너무 적다는 의문과, 직영제로 경영하면서 굳이 隊를 나누어 토지를 분급하는 복잡한 절차를 취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를 안고 있어 수긍하기 어렵다. 이처럼 전호제 경영을 택한 둔전도 적지 않았는데, 주로 자기의 민전을 경작하며 둔전 근처에 거주하던 민을 전호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민을 통해 확보하기도 하였다.0556) 특히 양계의 신개척지에 설치된 둔전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고 생각된다. 앞서 소개한 바 있지만 하음 부곡민을 가주의 둔전에 이주시킨 것도 사민을 통해 전호를 확보한 하나의 실례일 것이다. 이렇게 전호제로 경영된 둔전의 소작료가 군수로 쓰였을 것은 물론인데, 둔전은 국·공유지였으므로 그 수조율(소작료율)은 수확의 1/4이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숙종 8년(1103)의 판문에 나타난 둔전의 수조액이 1/4수조를 규정한 성종 11년(992) 판문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는 데에서도 충분히 짐작된다.0557)
그런데 둔전이 어떠한 관리체계로 운영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동계 지역 군둔전의 관리기구로 보이는 동로둔전사의 존재가 확인되므로 북계 지역에도 이와 비슷한 기구가 설치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국초 이래 둔전 개발이 활발히 전개되었다고 여겨지는 양계에는 군둔전의 경영을 주관하는 별도의 기구가 설치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렇지만 이 둔전사가 행정체계상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며, 아울러 해당 지역의 지방관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둔전의 운영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남도에 설치된 군둔전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후기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전라도 臨坡屯田이 근래에 권세가들의 賜給을 빙자한 奪占으로 거의 없어졌으니, 都評議使司로 하여금 특별히 屯田官을 설치하고 여러 세력가들이 탈점한 것을 모두 복구토록 하라”는 공민왕 5년의 교지가0558) 주목된다. 즉 임피 둔전을 복구하기 위해 둔전관을 ‘특별히 설치하였다’고 했으므로 그 이전에는 둔전관을 비롯한 별도의 관리기구나 관원은 없었다고 하겠으며, 따라서 당시까지 둔전을 관리해 왔던 실체는 그 곳의 지방관이었을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군둔전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또 다른 둔전이 있었다. 지방 관아의 운영경비를 보충해 주던 官屯田이 그것이다. 이 관둔전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숙종 4년의 일인데, 각 주·부·군·현이 5결씩을 운영할 수 있었다.0559) 초기에는 없었던 관둔전이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설치된 배경으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먼저 지방의 관아가 확보해 둔 소유지가 있었기 때문에 관둔전 운영을 인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고려는 국초 이래 국가적인 차원에서 토지 개간을 적극 권장하여 왔으므로 그 동안 관이 주체가 되어 개간한 뒤 비공식적으로 운영해 온 토지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관둔전의 설치를 허락한 숙종 4년의 조치는 이러한 토지의 운영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절차라 하겠는데, 다만 백성을 사역하고 민전을 침탈하는 등의 폐단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그 규모를 5결로 제한하였다는 이해이다. 다음으로 지방 관아의 재원을 증가시켜 주고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을 줄임으로써 국가재정을 보다 충실히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당시는 여진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한 시기였으므로 충분한 군수의 확보가 필요했다고 한다.0560) 사실 숙종은 관둔전의 설치를 허락한 직후 그 동안 左倉에서 지급하던 外官祿을 公須租로 대체시키는 조치를0561) 취하였는데, 이는 관둔전의 수입이 외관록으로 빠져 나가는 공수조를 충분히 보충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설치된 관둔전이 국·공유지였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는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南原府使가 되어 향리들의 농간을 제거하고 직접 둔전의 운영을 관장함으로써 상당량의 쌀과 콩을 얻었다는 공민왕 때의 李寶林의 사례라든지0562) 조선 초기의 예로0563) 미루어 볼 때 노동력을 동원하여 관이 직접 경작하는 직영제로 경영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때 주된 노동력원은 관노비였는데, 일반 백성을 사역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의 일이지만 평민을 관둔전 경작에 동원하였다가 지방관이 付處된 사례라든지,0564) 관둔전 경작에 있어 촌민의 사역을 금지시키는 규정이≪經國大典≫에까지 올라 있는 것을 보면0565) 백성의 사역을 통한 관둔전의 경영은 고려 이래 오랫 동안 지속되어 온 폐단이 아니었을까 한다. 설치할 때부터 관둔전의 규모를 5결로 제한시킨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관둔전의 규모를 제한하지 않으면 지방관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이의 확대에 나섰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개발은 물론 경작 과정에서도 민의 사역이 불가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둔전이 지방 관아의 운영경비를 보충하는 하나의 재원이었으며, 다같이 국·공유지로서 2과공전이었다는 점에서는0566) 지방관청의 공해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나 양자는 그 형성과정과 경영방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지방관청의 공해전이 주로 통일신라 말 이래의 국·공유지 위에 설정되어 전호제 형태로 경영되었다고 이해되는 데0567) 비하여, 관둔전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지방 관아가 주체적으로 개간한 토지로서 관노비의 사역을 통한 직영제로 경작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관둔전을 굳이 공해전과 구분하여「둔전」으로 칭한 이유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 형성과정과 경영방식이 공해전보다는 군둔전과 유사했으므로 둔전에 포함시켰다고 생각된다.0568)
0525)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공민왕 5년 6월.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신우 원년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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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 安秉佑,<高麗의 屯田에 관한 一考察>(≪韓國史論≫10, 1984). |
0527)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
0528) | 위와 같음. |
0529) | 鄭道傳,≪三峯集≫권 8, 朝鮮經國典 下, 政典 屯田. |
0530) | 和田一郎,≪朝鮮土地地稅制度調査報告書≫(朝鮮總督府, 1920), 36∼37쪽. 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改造社, 1937), 91쪽. |
0531) | ≪舊唐書≫권 84, 列傳 34, 劉仁軌. ≪新增東國輿地勝覽≫권 39, 南原都護府. |
0532) | 白南雲, 앞의 책, 5쪽. |
0533) | 이에 대해서는 安秉佑, 앞의 글 참조. |
0534) | ≪高麗史節要≫권 3, 현종 15년 정월. |
0535) | ≪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9년 3월. |
0536) | 安秉佑, 앞의 글. |
0537) | ≪高麗史≫권 6, 世家 6, 정종 8년 4월 임인. |
0538)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馬政 인종 23년 判. |
0539)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문종 27년 4월. |
0540)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城堡 문종 즉위년. |
0541) | ≪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원년 6월 임오. |
0542) | 白賢珠,<高麗時代 屯田의 硏究>(延世大 碩士學位論文, 1973). |
0543) | 鄭道傳,≪三峯集≫권 8, 朝鮮經國典 下, 政典 屯田. |
0544)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
0545) | 위와 같음. |
0546) | 李載龒,<朝鮮初期 屯田考>(≪歷史學報≫29, 1965). 李景植,<朝鮮初期 屯田의 設置와 經營>(≪韓國史硏究≫21·22, 1978). |
0547) | ≪高麗史節要≫권 3, 현종 15년 정월. |
0548)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
0549) | ≪高麗史≫권 6, 世家 6, 정종 8년 4월 임인. |
0550) | ≪高麗史節要≫권 3, 현종 15년 정월. |
0551) | 姜晋哲, 앞의 책, 244쪽. |
0552) | 安秉佑, 앞의 글. |
0553)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
0554) | 安秉佑, 앞의 글. 金載名,<高麗時代 什一租에 관한 一考察>(≪淸溪史學≫2, 1985). |
0555) | 姜晋哲, 앞의 책, 246∼247쪽. |
0556) | 이에 대해서는 安秉佑, 앞의 글 참조. |
0557) |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 제Ⅱ편 1장<조세>참조. |
0558)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
0559) |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
0560) | 安秉佑, 앞의 글. |
0561)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外官祿 숙종 6년 2월. |
0562) | 李 穡,≪牧隱文藁≫권 1, 記, 南原府新置濟用財記. |
0563) | “大典屯田條 留守府牧官大都護府 各二十結…令人吏官奴婢耕種 以補公須衙祿”(≪世祖實錄≫권 37, 세조 11년 11월 신해). |
0564) | ≪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7월 갑오. |
0565) | ≪經國大典≫권 2, 戶典, 務農. |
0566) | 旗田巍,<高麗の公田>(≪史學雜誌≫77-4, 1968). |
0567) | 이에 대해서는 이 책 제I편 3장 2절<공해전>참조. |
0568) | 安秉佑, 앞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