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균전제의 시행여부에 관한 문제
(1) 균전제설의 대두
고려시대의 토지제도를 연구한 초기의 학자들은 토지국유제설과 함께 균전제론도 주장하여 이 역시 오랫동안 유력시되어 왔었다. 지금 재삼 검토하여 보면 그 같은 종래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만, 그에 대해서는≪高麗史≫권 78, 食貨志 1, 田制 서문에서조차, “고려의 전제는 대략 唐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라고 해서 고려의 토지제도가 당의 分地制인 균전제를 모범으로 한 듯이 설명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의 균전제는 모든 농민에게 100畝(口分田 80畝, 永業田 20畝)의 땅을 균등하게 분급하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租·庸·調의 부담을 지우거나 府兵으로 군역에 복무시키는 제도였다. 이와 비슷한 전제가 고려에서도 시행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고려기를 다룬 사서에는≪高麗史≫식화지 전제 서문 이외에도 균전제가 시행된 것처럼 명시 내지 암시한 구절이 꽤 여럿 눈에 띄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균전제설도 대두하게 된 것이지마는, 아래에 먼저 그 사료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A-① 靖宗 7년(1041) 정월에 戶部가 아뢰기를, ‘尙州 관내의 中牟縣과 洪州 관내의 橻城郡, 長湍縣 관내의 臨津縣·臨江縣 등은 民田의 多寡와 膏塉이 균등하지 않으니 청컨대 사자를 보내어 量田하여 그 食役을 고르게 하소서(民田多寡膏塉不均 請遣使量之 均其食役)’하니 그에 좇았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② 문종 13년(1059) 2월에 尙書戶部가 아뢰기를, ‘楊州 界內의 見州는 邑을 설치한 지가 이미 105년이어서 州民의 田畝가 여러번 水旱을 겪어 膏塉이 같지 않으니 청컨대 사자를 보내어 均定하소서(州民田畝 累經水旱 膏塉不同 請遣使均定)’하니 制하여 可하다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③ 문종 13년 3월에 西北面兵馬使가 아뢰기를, ‘安北都護 및 龜州·泰州·靈州·渭州 등과 通海縣은 민전을 量給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서 肥塉이 같지 않으니 청컨대 사자를 보내어 均定하소서(民田量給已久 肥塉不同 請遣使均定)’하니 그에 좇았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B-① 충렬왕 24년(1298) 정월에 충선왕이 즉위하여 敎를 내리기를, ‘先王이 內外의 田丁을 제정하여 각각 職役에 따라 평균 분급해 민생에 資케 하고 또 國用을 지탱케 하였다(先王制定內外田丁 各隨職役 平均分給 以資民生 又支國用)’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② 공민왕 원년(1352) 2월에 旨를 내리기를, ‘祿을 무겁게 하여 士를 勸勵하는 것은 국초에는 成法이 있었으나, 중세 이후로 井地가 고르지 못함으로써(中世以降 井地不均), 公府가 점차 소모되어 관리가 염치를 기르기에 부족하니 그 절개 닦기를 바라고자 하나 어렵다. 有司는 급하지 않은 관원을 없애고 겸병하는 家를 금하여 창름을 충실하게 해 봉록을 증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高麗史≫권 80, 志 3, 食貨 3, 祿俸).
③ 신우 14년(창왕 즉위년, 1388) 9월에 右常侍 許應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臣 등이 근자에 司憲府·版圖·典法과 함께 글을 번갈아 申聞하여 先王의 均田制를 復舊할 것을 청하였사온대(請復先王均田之制), 전하께서도 윤허하시니 사방에서 들은 자가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오직 巨家 世族의 겸병자들만이 홀로 불편하게 생각하고 여러 말로 불평하여 衆聽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마는…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衆口의 번거롭고 시끄러움을 견디시고 均田의 舊制를 회복하여(復均田之舊制) 軍國의 需用이 모두 남음이 있게 하시고 사대부로 하여금 전토를 받지 않음이 없게 하시면 국가가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C-① 그 國俗이 감히 私田을 가질 수 없었고, 대략 丘井의 제도와 같은 것이었는데(略如丘井之制), 官·吏·民·兵은 등급의 高下에 따라 授田하였다(隨官吏民兵秩序高下而授之). 國母·王妃·世子·王女 이하가 모두 湯沐田을 소유하였으며, 每 150보가 1결이었다. 民이 나이 8세에 投狀射田하는데 結의 수에 차이가 있었다. 國官 이하 兵·吏·驅使·進士·工技는 일이 없으면 田에서 服勞하고 변방에서 수자리하면 給米하였다(≪高麗圖經≫권 23, 雜俗 種藝).
② 백관은 米로써 俸祿을 받고 (또) 모두 田을 지급받는데, 祿을 반납하면(致仕하면) 절반을 받고 죽으면 회수하였다. 나라에는 사전이 없고 民은 口를 계산해 授業하는데(民計口授業) 16세 이상이면 군에 충당되었다. 6軍 3衛는 항상 관부에 머물렀는데 3년마다 선발하여 (바꾸었고), 서북계의 수자리하는 (군사는) 반년마다 更代하였는데 경고가 있으면 무기를 잡고, 일이 생기면 勞役에 복무하였으며, 일이 끝나면 農畝에 복귀하였다(≪宋史≫권 487, 高麗傳).
A사료는 고려 전기인 靖宗과 문종 때의 기록으로, 민전의 多寡나 膏塉 또는 肥塉이 불균한 게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 사자를 보내 量田하여 ‘均其食役’ 하거나 ‘均定’케 했다는 것인데, 균전제를 긍정하는 논자들은 이를 민전의 양적·질적인 균등화로 이해하여 자신들 주장의 한 중요 논거로 삼았었다. 그리고 B사료는 여말 또는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의 것들로, 이전에는 균전제가 시행되었다거나 또는 그러했던 것처럼 이해하기 쉽게 주장된 기록들이다. 즉, B-③은 아예 균전제를 시행한 듯이 언급되고 있으며, ②에서는 균전제와 비슷한 井田法이, 그리고 ①에서는 田丁을 직역에 따라 평균하게 분급해 민생에 資케 하였다고 보인다. C사료는 宋側의 기록들인데, 官·吏·兵과 함께 民이 등급의 고하에 따라 援田하였다거나, 또는 “民은 口를 계산해 授田하였다”고 시술되고 있다. 균전제론자들은 이것들도 균전 사료로 생각하여 자기들의 논리를 전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고려에서 균전제가 시행되었다는 견해가 먼저 제기되었다.0901) 이어서 전반적인 균전 사료의 검토와 함께 역시 고려에서는 전국적인 규모에 걸쳐 균전제가 시행되었으나 지역에 따라 授田額이 달랐다는 이른바「地域的 均田制」라 주장되기도 하였다.0902) 그런가 하면 아예 당나라와 흡사한 방식의 균전제를 말하기도 하지만,0903) 그러나 점차 연구가 깊어지면서 이들의 주장은 잘못이었다는 쪽으로 의견이 좁혀지게 되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와 같은 균전제 부정의 논리는 어떠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