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시과 체제 하의 토지지배관계에 수반된 몇 가지 문제
1) 토지국유제설의 문제
(1) 토지국유제설의 대두
한국의 토지제도를 다룸에 있어 가장 많은 논의가 되어 온 문제 중의 하나는 토지 국유의 원칙에 관한 것이었다. 종래 우리나라의 토지제도에 대해서는 동양의 여러 나라가 대개 그러했던 것처럼 전국의 토지가「公田制」위에 성립되어 모든 토지는 국가의 공유에 귀속하였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오랫동안 유력시되어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토지가 국가의 공유에 귀속하였다는 토지국유제론은, 고찰해 보건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향에서 유래되었던 것 같다. 그 하나가≪詩經≫의 小雅 北山에 나오는 바 “넓은 하늘 아래에 王土 아닌 것이 없고, 그 땅 내의 (사람들은) 王臣 아님이 없다[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고 한 동양의 전통적 王土思想과 관련하여서였다. 뒤에 더 설명하듯이 이 왕토사상은 신라나 고려·조선사회의 현실과는 좀 차원이 다른 것이었는데, 그러나 당시의 政論家들은 그에 근거하여 토지의 공유를 주장하는 일이 많았고, 그것이 오늘날의 학자들에게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토지국유제 이론이 나오기에 이르른 것이다.0863)
다른 하나는 한국의 토지제도에 관해 처음으로 체계적인 저술을 낸 和田一郎의「公田制=土地國有制」주장이었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일제가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위해 조선총독부를 앞세워 단행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의 실무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업무상의 필요에 따라 한국의 토지제도를
조사하여≪朝鮮土地·地稅制度調査報告書≫를 낸 일이 있었다. 이 때가 1920년인데, 그는 여기에서, 삼국이 성립하기 이전 한국의 토지제도는 원시적인 部族共産制의 형태였으며, 이는 삼국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 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재래의 부족적 공산제가 공전제도로 발전하였는데, 이 공전제도는 원시 이래의 토지공유제를 국가적 규모로 확대한 것으로서 그 제도 아래서의 모든 토지는 공유·국유였으며 사유는 인정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물론 각종 명목으로 토지가 지급되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收租權-관료의 경우-, 혹은 耕作權-농민의 경우-의 지급일 뿐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국가에 귀속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같은 통일신라기의 공전제도가 비록 얼마간의 성격상 차이는 보인다 하더라도 기본틀은 변함이 없이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공전제도 안에서도 私田이라는 명목의 토지는 존재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公田의 범주 내에서 수조권이 위임된 토지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말에 이르러 이 사전의 범위가 확대되고 그 성격도 사유지적 의미를 많이 지니게 되어 공전제도는 한 때 붕괴될 위기에 처하였으나, 결국은 개혁파에 의해 사전 혁파가 이루어져 그 위기는 일단 극복되었다. 따라서 그 결과로 새로이 제정되는 과전법을 그는 공전제도로의 복귀로 이해하고 있다. 당시에는 사유지로서의 민전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 민전 역시 공전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는 사전을 불법적으로 사유지화한 것으로서, 이로써 공전제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도 있다.0864)
이러한 토지국유제론은 그 뒤 이 방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같은 논리 위에서 각 연구가 진행되었다.0865) 어떤 연구자는 토지소유의 구체적 내용을 관리처분권과 수조권·경작권으로 나누어 고찰함으로써 한 걸음 진전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0866) 하지만 그 경우에도 국가에 귀속하는 관리 처분권이 私人에게 소속된 後二者보다 훨씬 우월한 위치에 있었으며, 이 우월적 권능을 매개로 하여 토지의 공유, 즉 국유제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한 점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한편 토지국유제론은, 유물사관이 말하는 “아시아사회에 있어서 사적 토지 소유는 결여되어 있고 조세와 지대는 일치하며, 따라서 국가는 최고의 지주”라고 한 명제에서 기인한 바도 있는 것 같다.0867) 이와 같은 입장에서 삼국시대 이래 우리 나라의 토지제도는 국유제로서 고려왕조에서도「集權的 公田制」가 시행되었으며, 그리하여 전시과체제 또한 그 같은 집권적 토지국유의 기반 위에 존립하였다고 보았다. 사전이 존재하였지만 그것은 역시 수조권을 인정한 데 지나지 않았고 소유권은 오직 국가에 귀속하여 국가만이 최고의 지주라 이해하였던 것이다.0868)
이렇게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전개된 토지국유제론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학계를 풍미하여 별다른 의심없이 사실로서 받아 들여져 왔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여 보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견해였던 것 같다. 토지국유제론에 대한 비판은 대략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거의 극복된 단계에 와 있는 듯싶거니와, 그러면 이제부터 그 내용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살펴 보기로 하자.
0863) | 李佑成,<新羅時代의 王土思想과 公田>(≪趙明基華甲紀念 佛敎史學論叢≫, 1965, 218쪽;≪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3∼4쪽). |
---|---|
0864) | 和田一郎,≪朝鮮土地·地稅制度調査報告書≫, 1920. 이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논문에 잘 소개되어 있다. 旗田巍,<朝鮮土地制度史의 硏究文獻-朝鮮總督府(和田一郞擔當),「朝鮮의 土地制度及地稅制度調査報告書」를 中心으로->(≪아시아·아프리카 文獻調査報告≫55-中國·東아시아-, 1964;≪朝鮮中世社會史의 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289∼304쪽). 姜晋哲,<「土地國有制說」의 問題>(≪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330∼331쪽. |
0865) | 그 논저들을 들면 아래와 같다. 旗田巍,<高麗朝에 있어서의 寺院經濟>(≪史學雜誌≫43-5, 1932). 周藤吉之,<麗末·鮮初에 있어서의 農莊에 대하여>(≪靑丘學叢≫17, 1934). 今掘誠二,<高麗賦役考覈>(≪社會經濟史學≫9-3·4·5, 1939). 麻生武龜,≪朝鮮田制考≫(朝鮮總督府 中樞院, 1940). 周藤吉之,<高麗朝부터 朝鮮初期에 이르는 田制의 改革-特히 私田의 變革過程과 그의 封建制와의 關聯에 대하여->(≪東亞學≫3, 1940). 有井智德,<高麗朝初期에 있어서의 公田制-特히 均田制를 中心으로->(≪朝鮮學報≫13, 1958). |
0866) | 深谷敏鐵,<鮮初의 土地制度 一斑-이른바 私田法을 中心으로->(≪史學雜誌≫50-5·6, 1939. ――――,<私田法으로부터 職田法으로-鮮初의 土地制度一斑->(≪史學雜誌≫51-9·10, 1940). ――――,<朝鮮의 土地慣行「並作半收」試論>(≪社會經濟史學≫11-9, 1941). ――――,<朝鮮에 있어서의 近世的 土地所有의 成立過程-高麗朝의 私田으로부터 李朝의 民田으로->(≪私學雜誌≫55-2·3, 1944). ――――,<高麗時代의 民田에 대한 考察>(≪史學雜誌≫69-1, 1960). |
0867) | 姜晋哲, 앞의 글, 341∼342쪽. |
0868) | 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改造社, 1937), 47∼5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