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세와 국가재정
고려 말의 전제개혁을 선도하였던 趙浚은 그의 상소에서 供上을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右倉 및 四庫에 각각 10만 결과 3만 결의 토지가 있어야 하고, 녹봉을 넉넉하게 지급하기 위해서는 左倉 소속으로 10만 결이 필요하며, 이 밖에도 군수용의 토지가 따로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그는 당시야말로 사전을 경기에 한정시켜 국용·녹봉 및 군수를 풍족히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역설하였다.1073) 이 같은 조준의 설명에 의거할 때, 국가의 세출재정은 크게 왕실재정 부분인 공상과 공공재정 부분인 녹봉·국용·군수의 4개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우창·좌창·사고 등에 필요하다는 토지 10만 결·3만 결의 실체는 국가수조지로서의 민전이다. 그러므로 결국 민전의 田租가 이러한 국가재정의 근간이 되었다고 하겠다. 이 밖에 公田租도 국가재정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田稅 또한 그 재원의 일부를 이루었을 것이나, 어떠한 용도로 쓰였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전조가 왕실 운영에 필요한 공상의 재원이었다는 것은 이른바「莊·處」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 때에는 공상을 위해 마련된 360개의 장·처가 있어1074) 왕실에 조세를 부담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처의 토지는 왕실소유지가 아닌 수조지, 즉 장·처민의 민전이었다고 이해되므로1075) 왕실에 부담하던 조세의 실체는 다름 아닌 전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처의 전조만이 공상의 재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수조지인 장·처와는 성질이 다른 토지, 즉 전호제로 경영되던 왕실소유지의 소작료(공전조) 또한 공상의 한 재원이 되었을 것이다. 태조의 명에 의해 궁 밖으로 나와 內庄田을 경작하였던 노비(외거노비)가 왕실 에 낸「稅」1076)가 바로 이러한 공전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공상용의 전조 및 공전조는 주로 內庄宅에서 관리하여 대부분 왕실의 이용에 충당되었으나, 궁원 또는 궁인에게 하사되기도 하고 사원에 시납되기도 하였으며, 飢民의 진휼에도 사용되었다.1077)
한편 민전의 전조가 녹봉과 국용의 재원이었다는 사실은, “使人을 파견하여 민전을 점검하고 租賦를 고르게 정하는 목적이, 국용을 두루 갖추게 하고 녹봉을 넉넉히 주고자 하는 데 있다”고 하는 충선왕의 하교에서1078)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향리들이 事審官들의 민전에서 祿轉(녹봉용의 조세)을 징수하였다가 그들로부터 사사로이 매를 맞는 경우가 많았음을 전하는 충숙왕 5년(1318)의 기사에서도1079) 민전의 전조가 녹봉의 재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녹봉으로 쓰이는 전조는 주로 左倉(廣興倉)에서 수납과 지출을 관리하였는데, 그 규모는 문종 때를 기준으로 대략 16만 석을 초과하는 수준이었다.1080) 한편 국용용의 전조는 주로 右倉(豊儲倉)에서 관장하였는데, 제사·빈객접대·기민진제 및 국가적인 대역사와 영선의 비용 등에 사용되었다.1081) 그러나 이러한 녹봉·국용용의 전조가 꼭 그 본래의 용도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 녹봉용의 전조가 국용용으로 전용되기도 하였으며, 양자 모두 국왕에 의해 사사로이 사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1082)
전조는 군수의 중요한 재원이기도 하였다. 특히 양계 지역은 군사상의 요충지였으므로 이 곳의 민전에서 수취하는 전조는 중앙으로 이송하지 않고 전액 군수에 충당되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는 개인수조지인 사전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북계에는 본래 사전이 없었고 관에서 租를 거두어 군량에 충당하였다”고 하는 기사가1083)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또 “서북면의 토지(민전)는 일찍이 수조하지 않고 防戍에 맡겼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하고 공민왕의 하지도1084)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여기서 “수조하지 않았다”고 하는 표현은 앞의 기사에 의거할 때 정말로 ‘전조를 수취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취한 전조를 중앙으로 이송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양계 지역 뿐 아니라 남도 지역의 민전에서 거둔 전조의 일부도 군수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龍門倉과 富用倉의 존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용문창의 병량을 꺼내어 領府에 지급하였다”던가,1085) 용문창의 미곡을 서북면으로 조운하여 군량에 충당시킨 사례를 전하는 기사,1086) 그리고 “戰亂·水旱에 대비한 곡물을 저장하고 있기 때문에 부용창·우창은 보통 때 열지 않는다”고 하는 설명1087) 등에서 용문창과 부용창이 군수용의 미곡을 보관하던 창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용문창은 開京에, 부용창은 洪州에 있었으므로1088) 이 곳에 보관된 미곡은 주로 남도지역에서 전조로 수취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두 창고에 보관된 군수용의 전조 역시 군량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용문창의 곡물로 경기의 飢民을 구휼했다거나,1089) 鹽州와 白州의 농민들에게 龍門倉粟 8천 석을 나누어 주었던 사례1090) 등에서 짐작되는 바와 같이 기민의 진휼에도 활용되었던 것이다. 사실 전란이 해마다 있는 것은 아니므로 평시에는 오히려 진휼곡으로 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민전의 전조 뿐만 아니라 공전조도 군수로 쓰였다. 이른바 전호제로 경영되는 둔전에서의 1/4소작료가 그것이다.1091)
<金載名>
1073)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공양왕 원년 趙浚 3次上疏.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 右倉 소속의 10만 결은 供上과 함께 國用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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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4)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창 원년 7월 趙仁沃 上疏. |
1075) | 姜晋哲, 앞의 책, 224∼235쪽 참조. |
1076) | ≪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
1077) | 周藤吉之,<高麗朝より朝鮮初期に至る王室財政-特に私藏庫の硏究->(≪東方學報≫10, 1939) 참조. |
1078) | ≪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후즉위년 11월 신미. |
1079) | ≪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
1080) | 祿俸을 관장하는 左倉과 西京大倉의 歲入이 도합 15만 7천여 석이었으며, 여기에 지방의 창고에 비축토록 되어 있던 지방관 녹봉의 절반을 합치면 녹봉용의 田租는 최소한 16만석을 넘어 서는 수준이었을 것이다(≪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
1081) | 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上, 賦典 國用. |
1082) | 金載名,<高麗時代의 京倉>(≪淸溪史學≫4, 1987) 참조. |
1083)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신우 원년 10월. |
1084)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공민왕 5년 6월. |
1085) | ≪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7년 10월 기미. |
1086) | ≪高麗史節要≫권 5, 문종 18년 2월. |
1087) | ≪高麗圖經≫권 16, 官府 倉廩. |
1088) | 위와 같음. |
1089) | ≪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1년 4월 경인. |
1090)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水旱疫癘 賑貸之制 문종 6년 4월. |
1091) | 이에 대해서는 이 책 제I편 3장 3절<둔전과 학전·적전>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