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조물품과 국가 재정
(1) 수조물품
토지를 경작하여 생산된 수확물의 일부를 수조권자인 국가나 개인에게 내는 것이 전조(민전조)였으므로 전조로 수취되는 물품이 곡물이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수전과 한전의 산물이 달랐던 만큼 전조로 내는 곡물에도 차이가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우선 한전에는 콩·팥을 비롯한 콩류와 보리·밀 등의 맥류, 그리고 기장·조 등 여러가지 품종이 재배될 수 있었으므로 전조로 수취하는 곡물 또한 매우 다양하였을 것이다. 과전법 규정에서 한전의 수조 물품을「잡곡」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같은 과전법에서 私田主(수조권자)가 국가에「세」라는 명목으로 내야 할 물품을 한전의 경우「黃豆」로 규정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잡곡 중에서도 황두가 그 기준이 되었다고 여겨진다.1062)
한전과는 달리 수전에서는 주로 벼가 재배되었으므로 미곡류가 주된 수조물품이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는데, 문제는 그것이 일차 도정을 한 米穀(쌀)이었는가 아니면 도정을 하지 않은 皮穀(稻)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곡으로 수취하면 보관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므로 피곡이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1063) 역시 미곡이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1064) 이러한 사실은, 우선 주현의 조세를 조운할 때 기한 안에 배를 띄우면 배의 파손으로 적재된 미곡을 잃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거나,1065) “예전에는 稅米 1석에 耗米 1승을 거두었으나 이제부터는 稅米 1斛에 7升을 거두어야겠다”고1066) 하는 조운 관계 기사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좌창으로 수납되는 米·粟·麥 13만 9천여 석을 녹봉으로 지급하였다”든지,1067) “좌·우창이 稅穀을 수납하면서 계량을 불법으로 행하여 납입하는 미 1석에 2두 이상을 더 받았다”고1068) 하는 녹봉 및 국용 관련 기록도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창고의 곡물 보관과 관련하여 徐兢이 “고려의 창고는 積苫法으로 미곡을 저장하여 통풍이 잘 되기 때문에 비록 여러 해가 지나더라도 그 미(쌀)는 새 것과 같다”1069)고 한 설명에서도 수조 곡물이 주로 미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조만이 아니라 개인수조지의 전주(수조권자)가 국가에 내는 전세도 수전에서는 미곡으로 수취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1결당 7승 5합의 미를 내게 한다”고 하는 문종 23년의 전세 규정과, 수전 1결에서 백미 2두를 납세케 한 과전법 규정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전조를 미곡으로 받은 이상 전세를 미곡으로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1070)
이처럼 전조·전세의 주된 수취 곡물은 미곡과 황두를 비롯한 잡곡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布나 銀으로 이를 대신할 수도 있었다. 조운이 불편한 경상도의 산간 지역에 대해서는 명주·솜 등의 포로 조세를 대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1071) 그리고 황무지에서 은이나 포를 전조로 징수하여 貢賦의 액수를 채우는 수령들이 적지 않다고 염려한 충렬왕 5년(1279)의 下敎에서는1072) 布類 뿐 아니라 銀도 전조로 수취되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은과 포는 곡물과 함께 화폐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곡물의 대납 물품이 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1062)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科田法 規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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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3) | 今堀誠二, 앞의 글. 논거는 다르지만 呂恩暎도 같은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앞의 글, 1987). |
1064) | 金容燮,<高麗前期의 田品制>(≪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
1065) |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漕運 序. |
1066)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문종 7년. |
1067)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序. |
1068)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명종 6년. |
1069) | ≪高麗圖經≫권 16, 官府 倉廩. |
1070) |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사유지와 국·공유지에서의 소작료인 私田租·公田租 역시 田租·田稅의 경우와 같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
1071) | 姜晋哲, 앞의 책, 261∼263쪽. |
1072)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