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노비
(1) 신분상 특성
114)115)고려의 노비가 남에게 소유되어 매매·증여·상속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일찍이 밝혀진 바 있다.116) 그것은 노비의 법제상 지위가 재물로 간주되었음 을 뜻한다. 재물로 간주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노비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노비만이 가지는 특성이었고, 그 가운데에서는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바로 노비는 천인이었다. 그러나 노비가 반드시 재물로 간주되기만 하였던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국민으로서의 지위도 동시에 노비에게 인정되었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노비의 신분상 특성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런데 노비는 소유주에 따라서 사노비·공노비·사원노비로 나누어졌다. 이들 각자의 신분상 특성은 달랐다. 이 셋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사노비와 공노비였다. 여기서는 이 둘을 나누어서 검토하는 일이 유익할 것이다.
사노비는 주인의 호적에 부적되어 종파 및 그 소생의 이름과 나이, 전래의 변별, 그리고 奴妻·婢夫의 양천이 파악되었다.117) 이러한 방식에 의하여 사노비가 주인소유의 노비 신분임이 확인되었다. 솔거노비의 경우는, 부적되어 있는 주인의 호적이 그의 현거주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외거노비는 그의 현거주지를 확인시켜 주는 별도의 호적이 현거주지에도 있었다.118) 한편 사노비는 이름만이 있었을 뿐이고 姓은 없었다. 그리고 사노비에게는 국가에 대한 公役의 의무가 없었다.
사노비의 신분 귀속은「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서 부모 가운데 한 쪽이라도 노비이면 그 소생은 노비가 되었다. 사노비에 대한 소유권은 賤者隨母法에 따라서 어머니의 소유주에 귀속되었다. 다만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의 소유주에게 귀속되었을 것이다. 한편 사노비에게는 법적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리고 사노비는 주인이나 다른 사람에 의하여 기도되는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법의 보호도 받았다.
사노비의 주인에 대한 배반은 용납되지 않았다. 사노비의 도망·訴良, 주인에 대한 경멸·모욕·반항·모함·무고 따위가 주인에 대한 배반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사노비의 주인에 대한 복종이 거의 절대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주인의 범죄조차도 사노비는 고발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러나 주인이 반역과 같은 중대한 범죄를 모의하였을 때에는 반대로 그것을 고발하는 것이 사노비의 의무였다. 이것은 국왕의 통치를 받는 국민으로서의 지위가 사노비들에게 최소한도나마 인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공노비는 전쟁 포로에서 얻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반역·적진투항·이적행위와 같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그의 가속 및 사노비가 관몰됨으로 해서 발생하였다. 범죄행위가 계기가 되어 귀족층에서 공노비가 되는 일이 흔히 있었다는 점은 주목이 된다. 이것은 사노비가 대체로 경제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양인계층에서 주로 보충되었다는 점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공노비는 누구나 독자적인 경리를 가지고 독립된 가계를 꾸려 나갈 수가 있었다. 사노비의 대표적인 존재인 솔거노비에게는 자신의 독자적인 경리가 없었다. 이 점에서 공노비는 전반적으로 보아서 더 나은 처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공노비는 값이 정해져 있지도 않았고 실제로 매매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이 사실은 사노비의 경우와 크게 다른 점이다. 이 점에서 말한다면 공노비는 같은 노비이기는 했지만 사노비에 비하여 보다 높은 신분상 지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그러한 차이가 본질적인 것일 수는 없다. 사노비가 적몰되어 공노비가 되거나 공노비가 사급되어 사노비가 되는 예가 드물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공노비는 10여 세 정도의 연령층에서 실질적 부담을 지기 시작하였다. 이 점에서 일반 양인농민보다 그 부담의 기간이 길었다. 공노비는 丁의 연령층이 끝나는 59세까지 부담을 졌다가 60세의 연령층에 이르면 거기서 벗어났다.119) 이 점에서는 무기한 부담을 져야 했던 사노비와 비교하여 공노비가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분상의 특성을 가지고 사노비와 공노비의 신분상 지위를 비교하여 보면 전반적으로 공노비의 경우가 보다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둘 사이에 본질적인 격차가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또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에 따라서 그들 사이에서도 여러 유형으로 나뉘어질 수가 있고, 그에 따라 그 각자가 누리는 신분적 지위가 다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몇 가지 특성만 가지고 일률적으로 그들의 신분상 지위를 견주어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지는 대목들도 있다.
114) | 고려 노비에 관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今石二三雄,<高麗朝に於ける奴婢について>(≪桑原記念東洋史論叢≫, 1930). 龜田敬二,<高麗の奴婢に就て>(≪靑丘學叢≫26·28, 1936·1937). 周藤吉之,<高麗末期より朝鮮初期に至る奴婢の硏究>(≪歷史學硏究≫9-1·2·3·4, 1939). 李相佰,<‘賤者隨母’考―良賤交婚出生者의 身分歸屬問題―>(≪震檀學報≫25·26·27, 1964). 洪承基, 앞의 글(1975). 林英正,<麗末 農莊人口에 대한 一考察>(≪東國史學≫13, 1976). 金世潤,<高麗後期의 外居奴婢―所謂 ‘李太祖戶籍’을 중심으로―>(≪韓國學報≫18, 1980). 洪承基, 앞의 책(1983). 李載昌,<寺院奴婢考>(≪黃義敦先生古稀記念 史學論叢≫, 1960). 여기서는 노비를 대표할 수 있는 공노비와 사노비를 중심으로 설명하겠는데 주로 위의 필자의 글에 의거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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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 洪承基, 위의 책 참조. |
116) | 龜田敬二, 앞의 글, 100∼124쪽. |
117) | 외거노비가 주인의 호적에 부적됨이 없이 독립해서 호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金世潤, 앞의 글, 65쪽). |
118) | 金錫亨,≪朝鮮封建時代 農民의 階級構成≫(과학원출판사, 1957), 86쪽. 武田幸男,<朝鮮の律令制>(≪岩波講座 世界歷史≫6, 岩波書店, 1971), 74쪽. 洪承基, 앞의 책, 21쪽. |
119) | 이 점은 일찍이 今石二三雄, 앞의 글에서 주목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