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회·경제적 지위
120)사노비 가운데에는 주인과 같이 살면서 주인의 사역에 대비하는 사람들과 주인과 떨어져서 살면서 주로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자는 솔거노비였고 후자는 외거노비였다. 솔거노비는 주인의 경리 속에서 주인에 의하여 최소한의 의식주가 해결되었을 뿐이며, 독자적인 경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공과·공역의 의무는 없었지만, 주인에 의한 노동력의 수취는 거의 기한이 없고 무제한적이었다. 또 그들에게는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동도 거의 없었다. 그들은 노비 전체 가운데에서 가장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있었다.
한편 외거노비는 그 대부분이 농경에 참여하였다. 경작토지는 대개의 경우 주인의 소유 토지였다. 이 토지를 경작하고 그 주인에게 租를 바쳐야 했지만, 그 나머지 소출은 토지를 경작한 외거노비의 몫이었다. 이 때 그들이 무는 조의 크기는 양인 전호가 무는 크기와 비슷하여 소출액의 1/2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외거노비는 그 나머지 1/2의 몫을 가지고 독자적인 경리를 세워서 스스로의 생계를 꾸려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조 이외에 주인에게 현물이나 노동력을 어떤 형태로든 별도로 냈음직하지만 잘 알 수가 없다.121) 다만 외거노비가 주인에게 지는 부담의 전체가 양인 전호가 국가에 대하여 지는 공과·공역의 부담 전체와 비교하여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주인의 간섭이나 사역을 받을 기회가 적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재화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는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노비 가운데에서 가 장 높았다. 그것은 일반 양인 전호와 견주어도 큰 손색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공노비 가운데에도 주로 국유지를 경작하는 외거노비가 있었는데, 그들은 사노비의 외거노비와 처지가 대체로 비슷하였을 것이다.
공노비 가운데 외거노비 이외의 나머지는 대체로 관아에서 주로 사령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일을 주임무로 삼았던 공노비를 供役奴婢로 부를 수 있다. 공역노비는 10여 세부터 노동력을 제공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공역노비는 일정한 급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 급료를 가지고 자신의 경리를 세워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공역노비가 받는 급료의 액수는 양인 신분으로 같은 직책에 있는 사람에 비해서는 낮은 것이었다. 이것은 공역노비가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더 적은 급료를 받았음을 말하여 준다. 그들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지위는 솔거노비보다는 높았고, 외거노비에 비해서는 낮았다. 솔거노비와 외거노비의 중간쯤에 공역노비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마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