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신분제도의 성격
고려의 사회구성원은 누구나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이행하도록 기대되었다. 그 역할은 흔히 役으로도 일컬어졌는데 씨족을 기본 단위로 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역할은 대대로 세습되었다. 동일한 사회적 역할을 세습적으로 수행하는 무수한 씨족들을 묶어서 편성한 것이 신분계층이었다. 이 때 편성의 단위가 된 것이 班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신분계층이 다 반으로 편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편성된 신분계층은 대개가 지배계층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신분제도가 지배계층 위주로 그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는 점에서 고려 신분제도를 班體制로 이해하여 큰 무리는 없다. 여하튼 신분계층이 저마다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러한 역할에는 귀함과 천함이 기준이 되어 높고 낮은 차이가 있었다. 어느 것은 귀하고 어느 것은 천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차이가 두어졌다는 뜻이다. 그 차이에 따라서 어떤 역할은 사회적 특권(권리)으로서의 의미가 제약(의문)으로서의 그것보다 크기도 하고 어떤 역할은 그 반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회적 특권이나 제약의 크기에 따라서 신분계층의 사이에 차등이 두어졌다. 신분계층마다 신분상 지위가 다르게 나타났다는 뜻이다. 신분계층 사이에는 장벽이 놓여서 서로 넘나들 수 없게 되었다. 신분계층은 제각기 서로 다른 신분상 지위에서 그것이 사회적 권리를 뜻하건 반대로 의무를 의미하건 저마다 나름대로 부과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여야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분사회의 안정과 유지에 기여한다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고려의 신분제도가 시행되는 데 있어서 위정자들이 각별히 유의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신분계층 사이에 장벽을 세우고 이를 지키는 일이었다. 위정자들은 신분계층 사이의 이동을 억제하고 각별히 낮은 신분 계층이 높은 신분계층으로 상승하는 것을 막는 일에 신경을 썼다. 신분이동의 억제 특히 신분상승의 방지는 하나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의 적용에 있어서 철저하기로 유명한 것은 신라였다. 골품제도의 시행에 있어서 진골에서 6두품으로 내려오는 예는 더러 있었지만 6두품이 진골로 올라가는 경우는 없었다. 고려라고 해서 그 원칙이 가볍게 다루어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원칙에 반대되는 현상들이 고려의 경우에는 많았다.다음에 드는 것은 그에 관한 비근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樂工으로서 3, 4명의 아들이 있는 경우에는 한 아들로서 業을 잇게 하고 그 나머지는 注膳·幕士·驅史에 속하게 하였다가 陪戎副尉·校尉에 옮기되 耀武校尉에 이르러 한정시켜라(≪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限職 문종 7년 10월 判).
신분이동의 억제나 신분상승의 방지라고 하는 원칙대로라면 악공의 3, 4명이나 되는 아들들은 모두 父業을이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위의 사료 는 오직 한 아들만을 위의 원칙에 맞게 조치하였을 따름이다. 나머지 2∼3명 의 아들들은 雜類가 되고 더 나아가 요무교위로 한정하여 武散階로 나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高麗史≫의 위와 같은 限職條만 보아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한직의 규제를 받는 대부분의 신분계층은 실제에 있어서 品官이 되어 관인계층으로 나아가서는 안되는 사람들이었다. 예컨대 잡류는 그저 吏族으로 있으면서 吏職을 세습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공장·승려·군인·부곡리 등의 예가 역시 모두 그러하였다. 신분이동의 억제나 신분상승의 방지라고 하는 원칙에서 말하면 그들은 한직이라는 것부터가 무의미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직제도가 시행된 것은 바로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하여서였다. 사실 과거제도나 選軍制度도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122) 결국 신분이동의 억제나 신분상승의 방지가 중요하였듯이 그 허용도 역시 그러하였으며, 전자가 원칙으로서 중시되었듯이 후자도 또한 그러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원칙이 신분제도의 운용에 동시에 적용되고 있었다는 점이 고려의 신분제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첫번째로 중요한 사실이다. 그런데 고려의 위정자들은 서로 모순되는 두 원칙을 충돌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이 둘이 균형과 타협과 조화의 관계에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들은 신분이동을 억제하고 신분상승을 방지하는 원칙을 우선으로 삼았으며 그것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이 원칙에 훨씬 더 기운 상태에서 신분이 둘 사이에 조화의 관계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 점이 고려신분제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번째로 중요한 사실이다.
한직제도를 운용해서 잡류·승려·군인·공장·부곡리의 자손들에게 어느 선까지는 관직에 나아가게 하였지만, 각각의 신분계층을 떠나서 그렇게 된 사람들이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렇다고 간직에 나아간 그들로부터 관인계층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과거제도나 선군제도의 운용에 있어서도 비슷한 설명이 가능한 것은 물론이다.
요컨대 고려의 신분제도는 신분상승을 방지하는 원칙과 그것을 허용하는 원칙이 동시에 적응되어 시행된 제도였다. 두 원칙은 본래 서로 모순되는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조화와 균형의 관계에 있었다 이 조화와 균형은 신분상승을 억제하는 원칙에 압도적인 비중을 두면서 이루어졌다. 신분상승을 억제하는 원칙에 훨씬 더 무게가 두어진 속에서 이루어진 균형이었고 조화였던 것이다. 이러한 균형과 조화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사회적으로 평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고려의 신분제도였다. 무신란의 발생은 바로 이러한 균형과 조화의 관계에 틈이 생겨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러한 관계에 기초한 사회적 평형에 동요가 생겨났음을 뜻한다. 그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班體制의 이완이었다.
<洪承基>
122) | 李基白은 고려의 신분제도가 세습제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비교적 유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身分의 변동이 부단히 행해지고 있었음도 설명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주로 과거제도와 관련지어 鄕吏와 그리고 選軍制度와 관련지어 軍人의 경우를 설명하였다(李基白,<高麗時代 身分의 世襲과 變動>, 앞의 책, 971, 96∼99쪽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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