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창
우리 나라의 진휼제도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 이 고구려 고국천왕 때의 진대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 확충·보완되었다.
진휼기구의 설치는 재난이나 질병을 당한 사람들에게 쌀·종자·소금·의복·간장 등의 생활필수품과 약품을 진대 혹은 진급하여 재난을 극복하게 하는 실질적인 기능과 함께 정치·도덕적인 애민·휼민의 의지를 실천한다는 정책적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적 기능이 왕을 비롯한 지배자로 하여금 사면을 행하게 하고, 기우제 등 각종 기도행사를 베풀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이러한 기구를 설치하기도 했는데, 태조의 흑창 설치가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곧 태조는 즉위후 즉시 흑창을 설치했는데,298) 이것은 백성을 구휼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후삼국의 혼란기에 민심을 수습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더 강한 것이 아니었나 한다. 어떻든 처음 흑창을 설치할 때의 진의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이것은 고려시대 진휼기구의 효시가 되었고, 의창으로 개칭하여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존속하면서 궁민을 진휼하였다.
의창은 본래 중국의 제도로서 그 기원은 周나라에까지 올라갈 수 있으나,299) 隋·唐시대에 완성을 본 진휼기관이다.300) 즉 隋文帝 開皇 5년(585) 長孫平의 건의로 각 州에 의창을 설치하였으며, 당은 太宗 貞觀 2년(628)에 戴冑의 건의에 의해 주·현에 의창을 설립하여 빈민을 진휼하도록 하였다.301)
고려는 태조가 즉위하면서 바로 의창을 설립하였으나 그 규모나 설치지역, 진휼한 내용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후 성종은 5년(986) 7월에 흑창에 쌀 1만 석을 더 보태고 그 이름을 의창이라 고침으로써 이것을 확충·정비하였다. 이어 성종은 주·부에도 이를 설치하기 위하여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주·부의 人戶의 다소와 창곡의 數目을 조사·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302) 이 때 주·부에 설치한 의창의 수와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인호와 창곡을 조사케 한 것으로 보아, 지방에 따라 차등을 두어 설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의창은 성종대에서부터 현종 때까지 점차 정비되었다. 이 기간은 고려 초 기 중앙과 지방의 제도가 정비되던 시기였고, 특히 성종은 崔承老를 비롯한 여러 문신들의 건의에 따라 유교적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던 때였으므로, 의창·상평창과 같은 진휼제도가 정비되고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303)
특히 현종 14년(1023) 9월에는<義倉租收取規程>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公田을 3등급으로 나누어 田丁 수에 따라 의창곡을 징수·확보하도록 한 것 이다. 그 내용을 보면, 1科公田은 結당 租 3斗, 2科公田과 궁·사·원 및 兩班田은 결당 조 2두, 3科公田과 軍人戶丁 및 其人戶丁은 결당 조 1두씩을 부담하도록 한 것이다.304)
이렇게 의창곡을 징수하게 된 것은 태조 때에는 개경에, 성종 때에는 주·부에 의창을 설치하였으나, 현종 때에는 현에까지 확대되어 일반 조세 수입만으로는 이를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의창곡을 징수했다고는 하지만, 뒤에는 이것이 규정대로 징수되지 않았던 것 같다. 즉 인종 때에 이르면 의창에 미곡의 축적이 적어 官穀을 비축하도록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305)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의창에는 주로 곡식을 저장하였지만, 이외에 포·소금·간장·된장 등도 저장하여 기근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물품으로 진휼하는 데는 진대와 진급의 두 가지가 있었다. 진급은 무상으로 분급하는 것이고, 진대는 양식과 종자를 나누어주고 이를 가을에 환납토록 하는 유상분급을 말한다. 그러나≪高麗史≫에 보이는 대부분의 진휼 사례에서는 이를 구별하기가 어려운데, 그것은 양자를 엄격히 구분해서 행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진대의 경우 환납할 때 利息을 취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진휼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폐단이 발생하여 고리대로 전락하였다는 견해도 있으나,306) 고려 전기 의창곡은 환납할 때 이식을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07)
진휼대상은 罹災民·飢民·疾疫者·鰥寡孤獨·孝子順孫·義夫節婦·戰亡將卒의 가족·投化人 등이었고, 진대한 물품은 대부분이 곡물이었지만, 그외에 도 소금·간장·포·된장 등도 분급하였다. 곡물의 경우 분급한 양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춘궁기에 양식과 종자로 주어졌는데, 무상으로 지급된 것 이외에는 가을에 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러한 진휼방법은 기근을 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농업의 재생산 수단을 제공해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진휼지역은 지난해에 수재나 한재를 당하거나 兵亂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지역이 그 대상이 되었으며, 시기는 대체로 춘궁기였다.308)
의창은 고려 전기에는 그런대로 잘 운영되었으나, 인종 때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 그리고 의종 때의 무신의 집권 등 국내의 정치적 혼란과 이어 벌어진 몽고와의 전쟁은 이러한 진휼기관의 운영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더욱이 1/3의 이식이 인정되는 고려의 公私借貸는 관리들로 하여금 부당하게 농민들로부터 이익을 취하도록 해주어 무이식의 의창제는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종 5년(1127)에 내린 칙서에서 “관곡의 저축에 힘써 백성의 구휼에 대비하라”, “濟危寶·大悲院은 축적을 많이하여 질병을 구하라”, “관고의 썩은 곡식을 강제로 나누어 주고 이식을 취하지 말라”는 등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309)
결국 관곡을 비축해서 빈민을 구하라 한 것은 백성을 구휼할 의창미가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고, 이후 무신의 난과 몽고의 침입으로 국가의 재정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의창은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충렬왕 22년(1296) 洪子藩이 의창의 재설치를 건의한 것으로 보아310) 이 때 이미 의창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국가의 재정상태는 의창의 운영을 어렵게 만들었다. 곧 충선왕은 有備倉과 典農司 등의 구휼기관을 설치하였으나,311) 이것도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후 공민왕 때에서 우왕에 이르기까지 지방관에 의해 의창 이 일부 지역에 설치되었고, 공양왕 때에 전국에 다시 의창이 설치되어,312) 조선시대 의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초 흑창으로 시작한 의창은 구휼기관으로서 빈민을 구휼하는 실질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지배계층의 정치적 명분을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의창은 고려 전기에는 재해를 당하거나 스스로 존립할 능력이 없는 궁민에게 무상 또는 유상으로 물품을 진급 또는 진대하는 기본적 기능을 유지하였지만, 중기 이후 점차 붕괴되어 충렬왕 이전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의창은 다시 고려 말기 지배계층에 의해 부활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다.
298) | 태조는 918년 6월에 즉위했는데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병진), 이 해 8월에 호랑이가 흑창 담 안에 들어와 이를 쏘아 잡았다(≪高麗史≫권 54, 志 8, 五行 2, 태조 원년 8월 무진)고 한 것으로 보아 즉위하면서 즉시 흑창을 설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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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 ≪十三經注疏≫周禮 16, 地官 司徒 下. |
300) | ≪隋書≫권 24, 志 19, 食貨, 開皇 5년 5월. |
301) | ≪舊唐書≫권 49, 志 29, 食貨 下, 貞觀 2년 4월. |
302)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성종 5년 7월. |
303) | 朴鍾進,<高麗前期 義倉制度의 構造와 性格>(≪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428쪽. |
304)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현종 14년 9월. |
305)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인종 5년 3월. |
306) | 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改造社, 1937), 573쪽. |
307) | 林基形,<義倉攷>(≪歷史學硏究≫Ⅱ, 全南大 史學會, 1964), 78∼79쪽. 朴鍾進, 앞의 글, 431∼432쪽. |
308) | 朴鍾進, 위의 글, 430∼431쪽. |
309) | ≪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5년 3월 무오. |
310)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
311) | 朴鍾進,<忠宣王代의 財政改革策과 그 性格>(≪韓國史論≫11, 서울大 國史學科, 1983), 85∼90쪽. |
312)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공양왕 원년 12월·3년 4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