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혜민국·기타 기구
惠民局은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고, 약을 제조·판매하기 위하여 설치한 官 藥局으로서 예종 7년(1118)에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판관 4명을 두었는데, 本業(醫官)과 散官 중에서 서로 差任하도록 하되, 乙科權務로서 하였다.333) 고 려는 문종대 이래 예종대까지 특히 대송관계에 있어서 의원·약품·의서 등의 교류가 빈번하여 고려 의학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혜민국의 설치는 이와 같은 의학의 발달과 위정자의 관심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고려도경≫에 보면, “普濟寺 동쪽에 藥局이 있었다”고 했는데,334) 이것이 바로 혜민국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太醫·醫學·局生 등이 있어서 날마다 그 직에 임했는데, 이는 의관으로 임명된 판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다른 물건은 모두 물물교환이었으나, 약은 간혹 錢寶로 교역했다는 것으로 보아, 국내외의 약재와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약을 조제하여 판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쉽게 의원과 약품을 접할 수 없었던 당시에 혜민국의 신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후에 고종이 예종의 혜민국 설치를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 여긴 것만 보더라도,335) 이것이 당시에 얼마나 큰 역할을 담당했는지 알 수 있다.
혜민국 역시 이후로는 다른 구료기관과 마찬가지로 제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 뒤에 충선왕은 이를 司醫署의 관할 아래 두고 활용했으나, 충숙왕 12년(1325)에 이것도 동서대비원 등과 같이 수리하도록 한 것으로 보아 그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혜민국은 공민왕 3년(1354) 惠民典藥局으로 개칭되었고, 조선시대에는 惠民署로 되었다가 고종 때 폐치될 때까지 민질의 치료를 담당하였다.
이외에 기민과 병자를 구제하기 위해 전술한 기구와는 별도로 설치한 것도 있었다. 즉 救濟都監은 예종 4년(1109) 5월 개경에 역질이 유행하여 사망자가 많이 생기고 심지어는 시체를 거리에 버리는 등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어 설치한 것이다.336) 그러므로 이 역시 병자의 치료와 빈민의 구제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유행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제도감은 상설기구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설치되었던 것으로서 충목왕 4년(1348) 3월에는 같은 목적으로 賑濟都監이, 공민왕 3년 6월에는 賑濟色이 설치되어 기민을 구제하였다. 또한 예종 원년에는 東西濟危都監이 있어서 빈민과 병자를 구휼하기도 하였다.337) 이것은 이미 동·서 두 곳에 설치되어 있던 것으로 빈민과 병자의 치료를 담당하는 기구였고, 예종 때에만 있었던 임 시기구로 보인다.
위의 여러 기관은 때로는 설치 목적대로 운영되지 못한 경우도 있으나, 그 것이 본래 기민의 구휼과 민질의 치료가 주된 임무였기 때문에 역대의 국왕과 뜻있는 관원들의 관심과 노력의 결과 고려 전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예종은 애민정책의 실현자로서 상설기구인 혜민국을, 또 때에 따라서는 구제도감·동서제위도감 등을 설치하여 빈민과 병자를 구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