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민간의 의료사업
고려시대에는 제위보·동서대비원·혜민국 등 국립 의료기관이 상설되어 있어 백성들의 질환을 치료하였다고는 하나, 이 기구들이 모든 병자를 다 치료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왕족이나 민간에서 이러한 사업을 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먼저 국왕으로서 개인적으로 민질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비축한 왕은 의종이었다. 의종의 경우 국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정권의 수립을 초래케 한 인물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심약한 사람이어서 궁중의 별실 중 하나를 善救寶라 이름 짓고, 그곳에 약을 비축하여 衆疾을 널리 구하려 하였다.345) 그의 이러한 사업이 얼마나 실효를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던 의료기관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의종의 부마인 王沔은 왕족으로서 성품이 순박하고 침착했으며 글씨도 잘 쓰고 재능도 많았다. 특히 의술에 정통하여 약을 저축하여 活人하기를 일삼았다고 한다. 더욱이 많은 병자들이 그의 집에 몰려들어도 조금도 꺼리지 않고 치료해 주어 모두 탄복하였을 정도였다.346) 그의 이러한 사업은 현대의 자선사업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당시에 병자가 많이 몰려온 것은 그때가 무신집권기로서 국가의 의료기구가 제기능을 발휘하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또 蔡洪哲은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를 지낸 후 충선왕 때 司醫 副正이 되고, 뒤에 順川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는 재물을 좋아하여 관직에 있는 동안 거부가 되었으나, 사람됨이 문장에 능하고 의술을 비롯한 技藝에 재주가 있었다. 또 불교를 매우 좋아하여 일찍이 자기집 북쪽에 栴檀園을 지어 항상 승려를 대접하였으며, 또 약을 시혜하니 많은 사람이 이에 힘입어 이를 活人堂이라 하였다. 충선왕도 일찍이 이곳에 행차하여 白金 30근을 시사하여 그의 구료사업을 격려하였다.347) 충선왕의 부마인 許悰도 원나라에서 돌아온 후 의술로 많은 병자를 구했던 사람이다.348)
이상 예로 든 세 사람의 활동은 모두 가난한 병자에 대한 구료사업이었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도 비슷하였고, 시대도 왕면이 약간 앞서기는 했지만, 대 체로 무신의 집권 혹은 원의 지배로 국가가 혼란한 때였다. 이러한 혼란으로 국가에서 운영하는 의료기관은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민간의 活人事業이 그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에 의한 구료사업은 시설이나 능력에 한계가 있어 극히 일부인에게만 혜택이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근본적인 대책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려 전기에 설치되어 형식적이나마 후기까지 운영된 의창·상평창 등의 진휼기관과 제위보·대비원·혜민국·약점 등의 의료기관은 이재민과 질역자에게 식량과 약품을 진급 혹은 진대하는 본래의 기능을 비교적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의종 때를 고비로 그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고 말았다. 그 가운데 몇몇 기관은 충선왕 이후 다시 설치되었으나 전기와 같이 활발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후기에 와서 활동이 중지된 것은 고려 중기의 무신란을 고비로 하여 뒤이은 고종 때의 몽고의 침입, 여말의 왜구 등의 내우외환과 원의 수탈, 권문세가의 농장 확대 등으로 국가 재정수입이 감소된 데에 기인한다. 이로 인해 사실상 진휼·의료기관의 운영이 마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농민의 보호와 국가경제의 기반인 농업의 재생산수단을 제공한다는 실질적인 기능과 애민·휼민을 목표로 하는 王道政治의 실현이라는 형식적 기능의 달성을 위해 이러한 사회시설이 운영되었지만, 고려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문제로 인해 지속적인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孫弘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