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민간무역
사적인 민간무역은 공적인 조공무역에 비하여 훨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양국 사절의 내왕한 횟수와 송 상인의 내항 횟수를 비교하여 보면 알 수 있다. 사절의 내왕은 고려 광종 13년(962)부터 명종 3년(1173) 사이에 고려의 사신이 송에 간 것이 약 60회이며, 송의 사신이 고려에 온 것이 약 30회이다. 한편 송 상인의 내항 횟수는 고려 현종 3년(1012)부터 충렬왕 4년(1278)까지 약 120여 회에 달하였고, 내항한 송 상인의 총인원도 약 5천명 에 달하였다.602)
송과의 민간무역은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빈번하였는데, 특히 문종 때 가장 활발하였다. 문종 때는 고려 전시기를 통하여 정치가 안정되고 문물제도가 크게 갖추어졌으며 국력이 또한 강성하여 태평스런 시기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송은 이 시대가 신종 때에 해당되며 앞에서 지적한 대로 송에서는 산업이 크게 발달하던 때였다. 신종 때는 주조된 銅·鐵錢이 매년 600여 만 관에 이를 정도였고, 이 동전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는 물론 南洋·印度洋, 멀리는 아프리카 동해안의 여러 나라에서 사용할 정도였다.603) 송상의 고려 출입이 잦아짐에 따라 송상 가운데는 고려에 귀화하여 여송무역에 활약하는 자도 나타나게 되었다.604)
이처럼 활발하던 양국의 민간무역은 남송에 이르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송이 금에 대한 대책으로 고려와 함께 금에 대항하려는 聯麗制金策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왔으나 고려는 중립적인 태도로 적극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려에 대한 송의 감정은 점차 악화되어 남송 고종 때에는 고려의 태도를 의심하여 고려와 통교를 꺼렸으며 때로는 고려사신이 간첩행위를 하지 않나 의심할 정도였다.
이러한 영향은 다시 민간무역에도 나타나게 되어, 송 조정에서는 상인들이 동전을 가지고 고려에 가는 것을 금지하며 고려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605) 이러한 국가 차원의 제재조치와 남송의 국제적 위상이 약해짐에 따라 상인들의 활동도 위축되었다. 그 결과 고려 명종 재위 27년 동안에 송과의 무역은 3회에 불과하였으며, 신종 7년간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희종 7년간에는 1회, 고종 46년간에는 2회, 원종과 충렬왕 때에는 각각 1회씩 보일 뿐이다.
한편 고려에서도 이즈음에는 송 상인에 대하여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고 억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려사≫에는 원종 때 濟州는 해외의 巨鎭이기 때문에 송상과 島倭가 아무 때나 내왕하니 마땅히 防護別監을 보내어 비상사태에 대비할 것을 조정에서 의논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606) 또 송상 陳文廣등이 大府寺와 內侍院의 횡포에 의해 그들이 가져온 명주실·비단 등 6천여 필의 물품을 빼앗기고 당시의 실력자 金仁俊에게 호소하였으나, 김인준 역시 태부시와 내시원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는 기사도 보인다.607) 이로써 당시 송상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또 무역의 성쇠 역시 國運에 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 상인에 의한 민간무역이 일찍부터 행하여져, 서북으로는 요·금과 互市를 행하고, 동남해로로는 日本과 통하였다. 특히 중국과는 태조 때부터 활기를 띠어 고려상선이 後唐 등주(山東)에서 市易을 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서는 고려 상인의 활동은 문헌상에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송사≫에 보이는 고려의 海船이 자주 명주·등주에 표착하였다는 기사를 통하여 고려인에 의한 민간무역이 행하여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고려 상인의 송과의 민간무역이 활발하지 못하였던 까닭은 고려가 개국초부터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富를 중앙에 집중시키도록 통제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중앙의 왕실과 귀족들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물건으로도 그들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양국 무역품의 종목은 민간무역품도 관영무역품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고려에서 송의 수입품을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은 왕실과 귀족뿐이었으며,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통한 공무역이나 사무역은 이러한 특수계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대송 수출품과 수입품은 대개 다음과 같다. 먼저 고려에서 송에 수출한 것은 金·銀·金銀器具·花文綾羅·細苧·生布·人蔘·文皮(豺皮·海豺皮·貂皮 등)·白紙·香由·松子·花文席·螺鈿·長刀·紙·筆·墨·扇 등을 들 수 있다.
송으로부터의 수입품은 衣帶·鞍褥·彩緞·漆匣·玉·犀·金銀器·金箔·茶·香料·藥材·瓷器·書籍·書畵·樂品·貨幣 등이었다. 수입품 가운데 특이한 것은 그 물품이 모두가 중국산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서남아시아의 물산도 있었다. 이것들이 송상에 의하여 고려로 중계무역이 이루어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송상이 고려조정에 바친 물품 가운데 향약·침향·미각·상아·공작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서남아시아의 물품으로 당시 아라비아·자바·三佛齊(팔렘방) 등 여러 나라 상인에 의하여 광주·천주·명주·항주 등지에 들어온 것을 송상이 다시 고려에 싣고 와서 물역을 청하였던 것이다.
<羅鍾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