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정치현안
가) 압록강 경계문제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고 재개된 거란과의 평화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외교현안은 鴨綠江 境界(城橋)문제였다 압록강은 두 나라의 국경이 되는 자연적인 표식이었으며 평화시기에는 사신 왕래의 길목이었지만 비상시에는 적군이 넘어오는 요충이었다. 따라서 두 나라는 이곳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압록강 경계문제에 대한 연원을 보면, 고구려가 망한 뒤 압록강 유역의 대부분은 당나라가 소유한 하류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渤海에 속하였다. 그러나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뒤에는 다시 발해의 유민이 세운 定安國과 거란이 분할 소유하게 되었으며 하류는 여진족이 散居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北進政策을 추구하던 고려의 입장에서는 특히 압록강 주변에 살고 있는 여진족에 대한 초무능력이 바로 이곳의 통치권을 인정받는 방도였으므로 성종 3년 刑官御事 李謙宜를 파견하여 압록강 강안에 關城을 쌓아 여진과 거란의 동태에 적극적으로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여진의 반격으로 축성 책임자가 잡혀가고 많은 고려군이 피살됨으로써 중단되었다.680)
그 후 거란은 성종 통화 4년(986;고려 성종 5)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강 하류의 여진족까지 경략하여 이곳에 威寇·振化·來遠城을 쌓음으로써 중·하류지역 모두를 그들의 영역으로 삼았다.681) 이와 같이 압록강변에 3柵을 세워 여진과 송의 제휴 가능성을 제거한 거란은 고려에 사신 厥烈을 보내 통교 맺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거란의 이러한 요구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송과의 교류를 계속하며 거란을 고립시켰다. 그 결과 성종 12년(993;거란 성종 통화 11) 거란 성종은 東京留守 소손녕으로 하여금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이 제1차 거란의 고려 침입은 그 침략 의도가 고려영토의 영유보다는 고려와의 통교를 맺고자 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고려는 송과의 통교를 끊고 대신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거란군을 철수케 하였다. 그리고 양국 사신의 왕래를 위하여 “安北府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280리에 걸쳐 田地될 지역을 답사하고 地理의 원근을 헤아려 성을 쌓아 車馬를 통하게 하여 길이 貢覲의 길을 열게 하였다”682)고 한다. 이 싸움은 오히려 고려로 하여금 종래 여진인이 웅거하던 압록강 이동 280리에 대한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받아 북쪽의 경계가 처음으로 압록강까지 미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거란은 압록강 서쪽 5개소에 성을 구축하고,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의 적당한 성지를 조사하여 축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興化鎭·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 등의 ‘강동 6주’이다. 이처럼 고려는 거란과 합의하에 압록강 동쪽 280리를 확보하고 의주에 압록강도진을 두어 그 책임자로 勾當使를 파견하여 낮에는 백성들의 농사일을 살피고 성안으로 들어와 국경을 수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송과의 국교단절을 약속하였으면서도 여전히 송과 통교를 계속하고 있었고 여진족 기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압록강 이동의 교통로를 고려에 빼앗긴 거란은 현종 5년(1014;거란 성종 開泰 원년) 5월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재침략해 왔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거란은 내원성을 중심으로 긴다리를 만들어 압록강에 걸쳐놓고 동쪽과 서쪽에 성을 쌓아 6주의 탈취를 도모하였다. 고려는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저항하던 고려군의 기세를 꺾은 거란군은 내원성으로부터 검도동을 거쳐 의주에 걸친 긴다리를 완성하고 압록강 동쪽 고려 영토안에 保州城을 쌓았다. 나아가 宣化鎭과 定遠鎭을 공격하여 성을 쌓은 후 정원진은 宣州, 선화진은 懷化軍이라 고쳐 그들의 軍事道로 삼았다. 이것은 거란이 강동 6주를 탈취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였다.
이로써 고려는 압록강 연안의 보주와 정주 두 군사거점을 거란에 빼앗긴 채 강화를 맺어야 했다. 그러나 강화 후 양국관계가 정상화되었다고 할지라도 두 나라는 압록강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정종 원년(1035) 고려는 압록강에 石城을 쌓아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였으며, 문종 때에는 거란(요)이 압록강 동안에 弓口門을 세우고 郵亭을 설치하자 이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또 거란이 의주와 선주 남쪽에 買賣院을, 정융성 북쪽에는 정찰소로 보이는 探守庵을 설치하려 하자 고려는 사신을 보내 이를 저지하였다.683)
이렇게 국경에 대한 고려의 태도가 민감해지자 거란은 국경선 확장을 제의해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양측의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거란과 고려의 경계선은 문서로 명문화되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고려는 만일의 사태를 염려하여 중추부사 李顔을 要鎭인 貴州에 보내어 비밀리에 수비하게 하고, 병마사 柳洪의 건의에 따라 兵車를 제조하여 이곳에 장치케 하였다.
이처럼 고려는 거란으로부터 압록강 동쪽지역을 확보한 후에도 한치의 소홀함이 없이 서북 압록강 국경지대를 경계하며 거란의 동향을 주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압록강에 대한 경계는 자연 거란과의 각장 설치문제와도 연관되었다.
나) 각장문제
거란이 비록 고려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강동 280리를 양보한 이면에는 그 지역에 성을 쌓아 고려의 조공로를 닦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고려 목종 8년(1005;거란 성종 통화 23)에 국경무역의 장소로 振武軍과 保州에 榷場이 개설됨으로써684) 양국간의 경제적인 접촉에 획기적인 진전을 보았다.685)
그러나 강동 6주에 대한 거란의 환부 강요는 고려의 반감을 증폭시켰으며 그것은 곧 고려의 대거란 무역정책에 있어 각장무역의 폐지를 야기시켰다. 하지만 유목생활을 하는 거란족이 국제적 지위의 향상에 따른 응분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송·위구르 등의 물자들이 필요하였듯이, 마찬가지로 고려물자도 필요하였다. 더구나 각장무역이 가져다 주는 이익에 관심이 높은 거란은송에 대해 각장설치의 확대를 요구하였으며, 고려에도 각장설치 재개를 요구해왔다. 요의 도종은 각장이 폐지된 지 거의 80년이나 경과한 선종 3년(1086;요 道宗 大安 2)에 압록강변에 각장 개설을 제의해 왔다.686) 그러나 고려는 상서우승 韓瑩을 거란에 보내 각장설치 반대의 뜻을 전하였다.687) 거듭된 고려의 각장 철회 요구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압록강에 이의 설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려는 다시 中樞院副使 李顔을 藏經燒香使로 위장하여 龜州로 보내 국경의 정황을 살피는 한편, 같은 해 9월 太僕少卿 金先錫을 요에 보내 각장설치의 철회를 요구하는 외교적인 방안을 강구하였다. 결국 거란은 고려의 강온 양면에 걸친 적극적인 각장설치 반대정책에 승복하여 사신을 보내 정식으로 각장설치 계획을 철회한다고 통고해 왔다.
여러 차례 奉狀을 올려 각장을 설치하지 말 것을 청하고 있는데 진실로 사소한 일이거늘 어찌 번다하게 하는가. 하물며 설치한 것도 아니니 힘써 마음을 편히 하여 성심을 지극히 할 것이요, 깊이 의심을 풀고 나의 뜻을 체득하라(≪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5년 11월 임신).
이와 같은 고려의 압록강 경계에 대한 끈질긴 감시와 요구로 거란은 어떠한 시설물도 설치할 수 없었으며 이로써 양국 사이에는 고려의 의도대로 거란 멸망 때까지 각장이 개설되지 않았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간의 각장설치는 통화 23년부터 소위 제2차 침입이 시작된 통화 28년(고려 현종 원년)까지 약 5년 동안만 존속된 것으로 이해된다. 거란의 각장포기는 고려의 거란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688)
그런데 고려가 거란과의 각장무역을 거부한 것에 대하여 인접한 국가이며,그것도 정치적으로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처지임에도 각장무역이 성립되지 않은 현상에 대하여 “고려의 지난친 반응으로 거란과의 보다 나은 경제적 이익 내지 성과가 없게 되었다”고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고려가 이렇게 각장설치를 반대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앞에서 살폈듯이 수교초 고려는 거란이 압록강 방면 강동 6주를 할양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거란에 많은 進奉使를 파견하는 한편, 보주지역에 각장을 설치하며 거란과의 우호를 꾀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689) 그러나 강동 6주문제로 수차례에 걸친 거란 침입을 경험한 고려였으므로 압록강 어구에 각장이 설치됨으로써 발생할 수도 있는 분쟁의 화근을 막자는 의도에서 이를 거절한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더욱이 당시 고려의 대외무역은 이미 송과의 경제교류에서 상당한 부분이 채워졌기 때문에 거란과의 각장무역의 중요성은 그리 높다고 보여지지도 않는다.
다) 원병 요청문제
통교 후 거란은 고려가 그들의 제후국임을 내세워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군대파견을 요청하였으나 고려는 번번이 이를 거절하였다. 물론 당시 여·요관계는 분명 거란이 우위에 서는 사대외교 관계였다. 그러나 이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 외교노선이었으므로 고려는 거란을 위하여 고려의 군대를 파견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거란과의 싸움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현종 20년(1029) 9월 요의 동경장군 渤海人 大延琳이 동경지방 주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바로 興遼大府丞 高吉德을 고려에 보내 건국을 알리는 동시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 이에 형부상서 郭元은 이 기회에 요가 점거하고 있는 압록강 이동의 보주와 선주를 탈취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결국 이 의견은 崔土威와 徐訥·金猛 등의 신중론으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거란과 통교를 맺고 있으면서도 고려는 압록강유역 확보를 위한 전쟁준비를 계속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 예종 10년(1115) 11월 여진의 공격을 받은 거란 천조제는 몇차례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해 왔다. 그럼에도 고려의 반응이 없자 그들은 다시 利州管內觀察使 耶律義·大理少卿 孫良謨를 보내와 다급한 사정을 알리고 發兵을 독촉하며 匹段 등의 예물을 보내 왔다. 하지만 실리적인 입장에서 이웃 나라를 위해 한 번도 원병을 파견하지 않았던 고려였던 만큼 기울어가는 거란을 위해 군대를 파견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거란 사신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바로 귀국해 버렸다.
이렇게 거란사신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고려는 보다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秘書校書郎 鄭良稷을 安北都護府 아전이라고 거짓 칭하고 요의 東京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정보를 통해 요의 전진기지인 내원과 파주(보주) 2성이 금의 공격을 받아 식량이 다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려는 겉으로 식량원조를 제의하는 한편 거란에 대한 싸움 준비를 추진하였다. 전술하였듯이 보주와 선주의 두 요충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잊어버린 적이 없던 고려였으므로, 마침 이곳이 금군의 공격을 받아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로 이 때가 거란으로부터 보주를 되찾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거란의 정삭을 중지하고 거란과의 일전을 서둘렀다.690)
680) | ≪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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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 | ≪遼史≫권 38, 志 8, 地理志 2, 東京道 來遠城. |
682) | ≪高麗史節要≫권 2, 성종 13년 2월. |
683) | ≪高麗史≫권 95, 列傳 8, 朴寅亮. |
684) | ≪遼史≫권 14, 本紀 14, 聖宗 統和 23년 2월 병술 및 권 60, 志 29, 食貨志 下. |
685) | 李龍範,<麗丹貿易考>(≪東國史學≫3, 1955) 참조. |
686) | ≪高麗史≫권 10, 성종 3년 5월 병자. |
687) | ≪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5년 2월 갑자. |
688) | ≪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6년 8월 을사. |
689) | ≪遼史≫권 14, 本紀 14, 聖宗 統和 23년 2월 병술 및 권 60, 志 29, 食貨志 下. |
690) | 三上次男,<金初における麗金關係-保州問題■中心として>(≪歷史學硏究≫9-4, 1939)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