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려 불교계의 동향
고려 불교는 정치적으로 고려라는 통일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그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태조 왕건은 고려 건국이 불법의 가호에 힘입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국운의 융성과 진호를 위하여 불법의 加被에 의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불교의 색채는 신라 이후로 계승된 것이지만 특히 태조는 10훈요의 제1조에서 “우리 나라 대업은 반드시 여러 부처님의 호위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까닭에…”라고 명문화시킴으로써 고려를 불교국가로 건설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또 같은 10훈요 제2조에서는 신라 멸망의 원인을 “사찰을 다투어 창건하여 地德을 손상시켰기 때문이라”고 하면서도 태조는 계속 개경에 10대 사찰을 비롯하여 많은 절을 창건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건설에 있어 불교의 도움을 받으려는 그의 의지는 이후 고려 왕들의 치국책에 반영되어 정치적 제도로 발전하였다. 왕사제도와 국사제도 그리고 승과에 의한 僧階制度로 나타나는 제도적 뒷받침은 고려를 불교국가로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태조 자신의 신앙심이 돈독했던 이유도 있을 터이지만, 한편 불교가 일반 백성 속에 깊숙히 뿌리박혀 있었으므로 불교를 배제하고 대중을 통치한다는 일은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 불교는 재래 토속신앙과 습합되어 전개되기도 하였다. 가령 지리도 참설·산신숭배·용신신앙같은 토착신앙이 불교에 포용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불교의 이러한 현상은 태조가 편 종교정책에서 비롯하여 고려에 뿌리깊게 퍼져 있었다. 물론 백성의 신앙형태와 지배자의 통치이념을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불교의 이와 같은 종교현상은 불교 자체가 가지는 내적 구조의 복잡성에도 연유한다. 불교의 교리구조는 단순 소박하지 않고 포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불교는 결코 자신만이 정당하다고 하는 배타적 성향을 가진 교의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시대 불교에도 그 지역의 신앙형태가 습합될 수 있었다.
고려 초 이후부터 중기의 의천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어떤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는지를 살피기 위해 우선 그 배경부터 알아보자. 불교는 원래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지역적·문화적 이질성에서 오는 상황 때문에 그 인식의 틀을 달리하며 변천하였다. 인도불교는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 그리고 밀교의 단계를 거치면서 변천하였다. 그런데 중국이라는 땅에는 이 인도의 역사적 전개와는 달리 거의 같은 시대에 초기·부파·대승불교가 전래되었다.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불교를 나름대로의 인식의 틀을 마련하여 연구했다. 그것을 敎相判釋이라 한다. 이 敎判에 의해 학파가 형성된 것은 주로 남북조시대라고 하겠다. 이 때의 학파는 涅槃宗·成實宗·地論宗·攝論宗이 주류를 이룬다. 이어 수나라 때에는 三論宗·天台宗·三階敎가 형성되고, 당대에 와서 法相·華嚴·律·禪宗·密敎·淨土敎가 종파를 형성하였다. 대부분의 학파는 수·당시대에 실천기반으로 교단을 형성하면서 소위 宗派를 이루었다. 당나라 때에는 법상·화엄·선종이 대표적 종파이다. 불교의 종파 관념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6세기 무렵 일본에도 전해져 奈良시대의 6宗, 그리고 9세기 이후의 天台宗·眞言宗이 교단을 형성하였고, 12세기 이후의 鎌倉시대는 대중불교의 종파가 형성되어 오늘까지도 배타적 종파 관념을 이룩하고 있다.
반면 우리 나라의 종파 관념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적대관계를 가지고 교리 논쟁이나 교단확대를 꾀하는 것 같은 경쟁 양태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 불교를 종파간의 갈등이라는 시각에서 일찍부터 연구되어 왔다.119)
신라시대의 불교학 연구는 대체로 학파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신라 말 중국 南宗禪이 도입되면서 기존의 교학 중심이었던 사원에 종파로서의 성격이 나타난다.
고려 초기 이후에는 대체로 曹溪, 華嚴, 瑜伽業이라는 3대업이 종파로 존재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국사나 왕사들이 대개 이 세 종파에서 책봉된 것에서 충분히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사나 왕사를 두는 것은 정치지도자가 스스로 왕법과 불법의 관계를 대등관계가 아닌 종속관계에 둠을 의미한다. 거의 모든 민중이 불교를 신앙하는 사회에서 민심을 받들어 王道政治를 편다는 전통적인 동양의 정치사상을 불교와 결합시켜 교권과 왕권의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즉 권력자인 국왕은 스승으로 왕사를 두고 그 왕사보다 우위에 국사를 둠으로써 민중을 국왕보다 존중한다는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120)
이 제도와 더불어 시행된 것이 승과제도이다. 당시의 승과는 선종과 교종으로 나뉘는데, 교종은 화엄·유가업이고 선종은 여러 산문에서 배출되는 조계업이 해당된다. 대체로 불교는 고려의 국교였음을 알 수 있고, 국교의 종파로는 3대종파가 의천 당시까지 존립하고 있었다고 하겠다.121) 종파라고 하면 교리에 대해 같은 인식을 하는 인맥의 계승과 이들 인맥이 활동하는 사원, 그리고 僧政에 나타난 형태 등에서 추정할 수 있다.
의천 당시에는 화엄종·유가종·조계종 등의 3대종파가 존재했었다. 먼저 화엄종은 중국에서 賢首 法藏이 대성하였고, 신라 화엄학은 신역 80권≪華嚴經≫에 기초한 義湘의 화엄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라 말 해인사의 화엄교학은 남·북악파로 나뉘고 고려 광종대에 북악파에 속한 화엄종에서 均如가 배출되었다. 균여는 남북악으로 분열된 종지가 모순됨을 개탄하고 이를 통일하였다.122) 그가 지은<普賢十願歌>는 詞腦歌로 지은 것으로서 보현보살의 行願사상을 대중에게 고취시킨 것으로 유명하다.123) 그러나 균여의 행적에 나타난 신비적 요소는, 화엄종을 재창출하려던 그의 의지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결국 의천의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유가종은 중국 현장의 제자 慈恩 窺基를 중심으로 성립한 법상종 계통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順璟이 유가를 계승하였으며124) 고려 현종대 왕실의 지원으로 玄化寺가 창건되면서 뚜렷한 기록이 나타난다.125) 이 유가교단의 전성기에 의천은 興王寺의 주지로 활약하며 유식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조계종은 중국에서 달마를 초조로 하여 제6조 혜능에서 전개한 南頓禪에서 비롯하는데, 신라 말 이후 도입된 9산선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선종의 우리 나라 명칭이다. 선종이란 원래 律院에 속하였는데<百丈淸規>가 만들어지면서 독립하게 되고, 나중에는 법당만 꾸미는 제도를 만들면서 臨濟禪院이 독립된다.126) 선문의 가풍에 의한 5가 7종의 분파가 이루어지면서 선종이 형성된다. 우리 나라 선종은 가풍에 의한 종맥보다 선사의 인맥을 더 중요시하는 특색을 가진다.127)
가풍을 중요시하는 중국 선종은 “문자를 세우지 않고 가르침밖에 따로 전하는 바가 있다(不立文字 敎外別傳)”라는 교판을 가지고 당 말 5대의 난세에 존립하고 있었다. 특히 이 시대에 남당의 외호를 받으며 종풍을 드날린 선승이 바로 法眼 文益이다.128) 그는<宗門十規論>을 지어 선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는데, 주로 가풍에만 집착하여 理와 事가 둘이 아닌 관계의 부처님의 본뜻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하였다.129) 그의 종파를 법안종이라고 하는데, 선객과 학인의 결점을 보완하여 선과 교의 융합을 지향한 것이다.
이 선법을 익히고 중국에서 귀국한 이가 고려의 英俊(932∼1014)130)과 智宗(930∼1018)이다. 당시 법안종의 성격은 문자를 무시하고 경전을 도외시하는 교판이 아니고 오히려 교학을 포용하고 있다. 의천이 지향했던 불교는 이러한 선종의 사상적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19) | 金映遂,<五敎兩宗에 對하야>(≪震檀學報≫8, 1937 ;≪韓國曹溪宗의 成立史硏究≫, 民族社,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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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 許興植,<國師·王師制度와 그 機能>(≪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427쪽. |
121) | 黃壽永,<高麗僊鳳寺大覺國師碑陰記>(≪韓國金石遺文≫, 一志社, 1978), 470쪽. |
122) | 赫連挺,<均如傳>(≪韓國佛敎全書≫4, 東國大出版部, 1982), 512쪽. |
123) | 金雲學,≪新羅佛敎文學硏究≫(玄岩社, 1970), 303∼330쪽. |
124) | 李鍾益,<韓國佛敎諸宗派成立의 역사적 고찰>(≪佛敎學報≫16, 1979), 29∼58쪽. |
125) | 崔柄憲,<고려중기 玄化寺의 창건과 法相宗의 융성>(≪高麗中後期佛敎史論≫, 民族社, 1989), 101쪽. |
126) | 關口眞大,≪禪宗思想史≫(李永子 譯, 文學生活社, 1987), 214∼216쪽. |
127) | 高翊晋,<新羅下代의 禪傳來>(佛敎文化硏究院 編,≪韓國禪思想硏究≫, 1984), 56쪽. |
128) | 鈴木哲雄,≪唐五代の禪宗≫(大東出版社, 1983), 261∼263쪽. |
129) | 關口眞大, 앞의 책, 231∼232쪽. |
130) | 李能和,≪朝鮮佛敎通史≫下 (新文館, 1918), 334쪽. 金杜珍,<高麗光宗代 法眼宗의 등장과 그 성격>(≪高麗初期佛敎史論≫, 民族社, 1986). 許興植,<靈巖寺寂然國師碑>(앞의 책), 62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