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양부와 정방 및 서방
1) 진양부
무신정권기에 府를 처음으로 세운 것은 최충헌의 집권에서 비롯되었다. 희종 2년(1206)에 왕은 “문하시중 晋康侯 (최)충헌은 先君이 정무를 보던 때와 과인이 왕통을 계승한 초기부터 지금까지 정성을 다하여 보좌하여 큰 공업이 있으므로 부를 세워 賞典을 높일 것이다”237)라는 조서와 함께 최충헌을 진강후에 봉하고 부를 세워 興寧(府)이라 하여 소속 관원을 두게 함과 아울러 興德宮을 이에 소속시켰다.238) 이후 흥령부는 강종 원년(1212)에 晋康府라 고쳤다.239)
한편 최충헌을 이은 최우도 역시 立府하였는데 처음 고종 8년(1221)에 왕이 최우를 진양후에 봉하였으나, 그는 이를 고사하고 받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고종 21년에 또한 왕이 최우의 강화천도의 공을 논하고 부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詔書를 맞을 예물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사양하다가 마침내 晋陽侯에 봉하여지고 부를 세워 晋陽府라 하였다.240)
고려에는 公·侯·伯·子·男의 5작제가 있었는데, 爵은 주로 종실(왕족)에게 주어졌다.≪高麗史≫列傳 宗室條 첫머리에는 고려는 종실의 親을 보하여 尊者를 公이라 하고, 그 다음을 侯라 하고, 䟽者를 伯이라 하고, 幼者를 司徒·司空이라 하고, 이를 총칭하여 諸王이라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한편≪高麗史≫百官志 諸妃主府條에 의하면, 왕의 諸妃(貴妃·淑妃 등)와 諸主(院主·宅主 등)에 책봉되면 殿을 세우고 부를 두어 소속관원을 갖추었는데, 左右詹事·小詹事·注簿·錄事 각각 1인과 令史·書令史·書藝 각각 1인, 그리고 記官 2인을 두었다. 또 諸王子도 부를 두고 소속관원을 갖추었는데, 典籤·錄事·書藝 각각 1인씩을 두었다. 그밖에 왕비의 아버지와 공주의 남편도 부를 세워 전첨과 녹사를 두었다.
이렇듯 고려에서는 왕의 妃主·왕자·왕비·공주는 부를 세우고 소속관원을 갖추었으며, 종신에게는 爵이 봉하여졌다. 이러한 立府와 封爵은 重臣의 경우에도 베풀어졌던 것으로, 李資謙이 朝鮮國公에 봉하여지고 崇德府를 세웠으며, 앞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최충헌이 진강후에 봉하여지고 흥령부(후에 진강부)를 세웠고, 최우가 진양후에 봉하여지고 진양부를 세운 것은 그 예이다.
그리고 姜邯贊이 天水郡開國侯에 봉하여지고 李子淵이 慶源郡開國公, 金富軾이 開國侯, 金方慶이 上洛郡開國公에 봉하여졌으나 부를 세웠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아 그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자겸·최충헌·최우의 경우와 같이 이들도 봉작됨과 함께 부를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 러한 최충헌의 진강부 등은 공적인 기관임과 아울러 개인을 위한 기관으로서 최씨정권의 권력기구의 하나로 취급할 수 있다.
이 진강부나 진양부는 최씨정권의 지배기구로서는 강력한 존재가 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高麗史≫에 “최충헌이 정권을 오로지 함으로부터 府와 僚佐를 두고 사사로이 政案을 취하여 注擬하고 제수하였다”241)라고 하여 최충헌이 부를 중심으로 인사행정을 오로지하는 등 그것이 강력한 권력기구임을 시사하여 주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공적인 법제기관이므로 개인적으로 그 기능을 함부로 남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적인 법제기관이므로 그 소속의 인원을 함부로 증감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그 법제상의 인원으로서는 별로 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법제상의 인원은 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왕의 妃主의 부가 左右詹事 이하 모두 10인이고 제왕자의 부가 전첨 이하 3인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중신의 부는 왕비의 부의 그것을 능가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많아야 10인 이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최씨정권의 사적 권력기구로 막강한 교정도감·정방·도방 등이 있었으므로 사적 권력행사에 있어서 구태여 법제상 공기구인 부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는 합법제적 기구로서 상징적 명예의 기구로 삼았을 것이다.
부를 세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 무릇 妃·主를 책봉하면 반드시 전을 세우고 부를 두어 요속을 갖추게 하였다. 문종이 관제를 정하여 부에 좌우첨사·소첨사·주부·녹사 각각 1인과 영사·서령사·서예 각각 1인과 기관 2인을 두고 殿에는 通事舍人 2인·給事 20인을 두었다. 충렬왕이 부에 丞 1인·指諭와 行首 각각 2인·牽龍 4인·侍衛軍 50인·守護員 2인을 두었고, 전에는 書題 2인을 두었다. 공민왕이 관계를 고쳐 부에 左右司尹을 두어 정3품으로 하고 승·주부·사인을 정7품, 녹사를 정9품으로 하였다. 또 혹은 左右司禁을 두고 小府에는 司尹을 두지 않았다(≪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妃主府).
㉡ 제왕자는 반드시 부를 두고 요속을 갖추었다. 문종이 관제를 정하여 제왕부에 전첨 1인으로 하되 종8품으로 하고, 녹사 1인으로 하되 종9품으로 하고, 서예 1인을 두었다. 충렬왕 34년에 충선왕이 관제를 고쳐 왕자부에 翊善 1인을 두되 정5품으로 하고 伴讀 1인으로 하되 정6품으로 하고 直講 1인으로 하되 종6품으로 하고 記室參軍 1인으로 하되 정7품으로 하였으며, 왕비의 아버지 및 공주에게 장가든 자도 또한 부를 세워 전첨과 녹사를 두었다(≪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王子府).
종실도 제왕자와 같이 봉작과 함께 부를 세웠음이 분명하나 기록에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에 자세하지 않을 뿐 부를 설치한 것은 사실이다.≪高麗史≫列傳 宗室條에 단편적으로 보이는 부에 대한 사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 大寧侯 暻(인종의 둘째 아들)…재상 崔惟淸·文公元·庾弼 등이 閤門에 엎드려 청하기를 ‘鄭叙가 대녕후와 서로 교분을 맺고 그 집에 맞이하여 유락유희하니 죄를 용서치 못할 것입니다’라 하고, 어사대도 또한 정서가 종실과 결탁하여 밤에 모여 잔치를 베푼다고 하므로 왕(의종)이 대녕부를 폐하였다(≪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大寧侯 暻).
㉡ 始陽侯 珆(원종의 둘째 아들)는 원종 4년에 이름을 하사하여 元服(남자의 성년례)을 가하고 봉하여 후를 삼았다. 부를 시양이라 하여 전첨·녹사 각각 1인씩을 두었다(≪高麗史≫권 91, 列傳 4, 宗室 2, 始陽侯 珆).
㉢ 順安公 琮(원종의 셋째 아들)은 원종 4년에 이름을 하사하여 元服을 가하고 봉하여 후를 삼았다. 부를 대녕이라 하여 전첨·녹사 각각 1인씩을 두었다. … 충렬왕 3년에 內侍 梁善·大守莊 등이 무고하기를 ‘慶昌宮主(琮의 어머니)가 그의 아들 종과 함께 꾀하여 장님 승려 終同으로 하여금 왕을 저주케 하며 공주(원나라의)에게 장가들어 왕을 삼고자 한다’라고 하므로 慶昌宮主를 폐하여 서인을 삼고 종과 종동은 섬으로 귀양보냈다가 같은 왕 11년에 소환되었고 같은 왕 21년에 부를 열고 관속을 두었다(≪高麗史≫권 91, 列傳 4, 宗室 2, 順安公 琮).
㉣ 江陽公 滋(충렬왕의 장자)는 장자였으나 공주의 소생이 아니므로 세자가 되지 못하고 충렬왕 5년에 충청도 牙州 東梁寺에 보내져 세자를 피하게 하였다가 동왕 9년에 소환되어 뒤에 봉하여 公이 되고 부를 열어 관속을 두었다(≪高麗史≫권 91, 列傳 4, 宗室 2, 江陽公 滋).
위의 사례들 가운데 1에서 왕의 諸妃와 諸主는 반드시 전을 세우고 부를 두도록 되어 있으며, 여러 왕자도 반드시 부를 세우도록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2에서 종실은 봉작과 함께 부를 세웠음을 알 수 있으나, 어떠한 처벌을 받게 되면 봉작의 삭탈과 함께 그것이 폐지되었음도 알 수 있다 (2∼㉠㉣).
원훈중신의 부를 세운 것에 관한 사례를 들어보면 앞에서도 들은 것과 같이 강감찬이 천수군개국후에 봉하여졌고, 이자연이 경원군개국공, 김부식이 개국후, 김방경이 상락군개국공에 봉하여졌으나, 부를 세웠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자겸·최충헌·최우 등은 봉작과 함께 부를 세웠다는 것이 기록에 보인다. 이것을 열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3. ㉠ 이자겸을 책봉하여 亮節翼命功臣·領門下尙書都省事·判吏兵部事·知西京 留守事·朝鮮國公 食邑八千戶 實封二千戶로 하고 부를 崇德이라 이름하여 소속 관원을 두고 宮을 懿親이라 하였다(≪高麗史≫권 129, 列傳 40, 叛逆 1, 李資謙).
㉡ (1) 희종 원년에 최충헌에게 特進訏謀逸德安社濟世功臣·門下侍中·晉康郡開國侯 食邑三千戶 實封三百戶를 제수하였다(≪高麗史≫권 21, 世家 21, 희종 원년 12월 및 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2) 희종 2년에 詔하기를 ‘문하시중 진강후 최충헌은 先君이 정무를 보던 때와 과인이 왕통을 계승한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다하여 보좌하여 큰 공업이 있으니 부를 세워 상격을 높일 것이다’라 하고 禮司와 추밀원에 명하여 도감을 세우고 사신을 보내어 충헌을 책봉하여 진강후를 삼고 부를 세워 흥녕이라 하여 소속 관원을 두고 흥덕궁을 이에 소속시켰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3) 왕이 (최)충헌에게 中書令·晉康公을 더하니, 충헌이 사양하고 받지 않 았다. 이듬해 (희종 3년)에 다시 중서령·진강공을 삼으니, 충헌이 말하기를 ‘公이란 5등의 우두머리요, 중서령은 人臣의 극입니다’라고 하며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4) 왕(강종)이 (초)충헌의 흥녕부를 고쳐 진강부라 하였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高麗史節要≫권 14, 강종 원년 1월).
㉢ (1) (고종) 8년에 최우를 진양후에 봉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2) (고종) 21년에 왕이 최우의 강화로 천도한 공을 논하여 후에 봉하고 부(진양부)를 세우고자 하자 백관이 모두 그 집에 가서 하례하였다. 이에 최우가 조서를 맞을 예물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하며 사양하자, 州郡에서 다투어 선물을 보내므로 드디어 봉하여 晋陽侯를 삼았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3) (고종) 29년에 최우에게 식읍을 더하고 작을 올려 公(진양공)을 삼았 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 (1) (고종 37년) 강화의 중성을 쌓은 공으로 왕이 최항을 문하시중을 삼고 진양후에 봉하여 부를 열게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沆),
(2) (고종 38년) 왕이 최항을 후에 봉하고 부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또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沆).
(3) (고종 40년) 왕이 최우에게 작호를 더하게 하고 최항에게는 후에 봉하 고 부를 세우게 하며 그의 죽은 어머니에게는 봉작을 더하게 하였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沆).
(4) (고종 41년) 왕이 조를 내리기를 ‘시중 최항은 가업을 계승하여 임금을 바르게 하고 난을 제안하였으며…진실로 세상에 드문 큰 공을 세워 짐이 크게 칭찬하는 바이니 그 有司로 하여금 부를 열고 식읍을 더 봉하고 죽은 어머니에게 봉작을 더하고 두 아들에게 벼슬을 높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최항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沆).
위의 ㉠은 이자겸의 사례가 되고 ㉡은 최충헌의 사례가 된다. 한편 ㉢은 최우의 사례가 되고 ㉣은 최항의 사례가 되나, 최항의 ㉣(3)을 보면 封爵立府가 행해졌으나 다음 기사인 ㉢(4)를 보면 최항은 끝내 봉작입부를 사양하여 받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