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충선왕대의 개혁정치
원간섭기 이후 정부와 지배세력이 주도한 개혁정치는 충렬왕 20년대부터 가시화 되기 시작하였다. 토지겸병의 확대와 민의 유망 등 사회경제적 폐단이 극심한 데다가 충렬왕 측근세력의 권력독점으로 지배세력 내부에서 갈등과 대립의 현상이 드러나는 가운데, 지배세력의 일부는 민생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홍자번의 ‘편민십팔사’로 구체화되었다.
홍자번의 편민십팔사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 18개 항목으로 구성된 개혁안이다. 이 개혁안은 민생문제와 재정난의 해결을 개혁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공물의 정수·정액 외의 징수를 금지한 것이나, 유망민의 貢賦를 남은 사람들에게 부담지우는 폐단을 지적한 것, 모리배의 선납 행위를 금지하고 鹽稅를 정액 이상으로 科斂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한 것은 이를 통해 수취체제를 바로잡아 민생의 안정을 꾀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0343)
이 개혁안에서는 국가재정의 확충 방안도 모색하고 있었다. 그것은 賜給田에 대한 공부의 부과와 行役 및 새로 관리가 된 사람들에게 세를 부과하는 방안으로 제시되었다. 홍자번은 공부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亡丁·逃戶의 공부를 유민에게 전가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신 공부액의 감소를 막기 위하여 사급전을 받은 사람들에게 공부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동서 각방과 새로 임명된 행역이 거두어들인 금·은 가운데 2/3를 국용에 충당케 하고, 공로가 있거나 왕을 시종했던 인물을 제외하고 새로 관리에 임명된 사람들로부터 품계에 따라 세를 거두어 국용에 충당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방안들이 국가재정의 확충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세원이 점점 감소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임시적인 대책이 될 수는 있었다.
원간섭기 개혁정치는 충렬왕 24년(1298)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충선왕의 왕위계승은 원의 종속화 정책이 진행되는 가운데 전개된 권력투쟁의 결과였다.0344) 이미 세자시절부터 충렬왕의 측근정치에 비판적이었던 충선왕은 원의 帝位가 世祖에서 成宗으로 바뀌는 것을 계기로 충렬왕 21년부터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충렬왕과 세자인 충선왕은 왕권 장악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러한 정치상황 속에서 그 동안 국내에 자신의 지지세력을 꾸준히 형성해온 충선왕은 원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충렬왕 측근세력을 숙청하여 충렬왕의 왕권을 무력하게 만든 다음 傳位라는 형식적 절차를 밟아 왕위계승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개혁교서를 발표하였다.0345) 모두 27개 항목에 이르는 이 개혁교서0346)에서 집중적으로 지적된 폐단은 권력층의 토지점탈·유민은닉·조세불납, 지방관의 탐학 등이었다. 이 개혁안은 그 대책으로서 권력층의 불법적 토지점탈을 철저히 조사하여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리게 하고, 지방관의 중간수탈을 금지, 처벌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토지점탈 등 당시 폐단의 주체로서 ‘豪猾之徒’·‘勢要之家’와 같은 권력층을 지목하고 있는데, 이는 개혁을 통해 부왕의 측근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개혁교서 반포 후 충선왕은 차례차례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4월에는 政房을 폐지하고 인사권을 翰林院에 귀속시켰다.0347) 최씨정권의 사적기구로 출발한 정방은 무신정권 붕괴 후에도 계속 존속하면서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특히 국왕 측근세력인 신흥권력층은 이를 권력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충선왕이 정방을 폐지한 것은 인사행정의 정상화를 꾀하면서 한편으로는 충렬왕 측근세력의 재등장을 봉쇄하기 위한 개혁조치로 이해된다. 충선왕은 5월에 가서 대대적인 관제개편을 단행하였다. 이 때 관제개편에서는 원의 官號와 같은 것은 모두 바꾸는 등 원의 제도와 중복을 피한다는 원칙이 철저히 지켜졌고, 앞서 司로 격하하였던 상위 관부들을 모두 원의 제도를 적극 수용하여 院이나 府·曹로 승격시킴으로써 충렬왕 원년 이래의 기형적인 관제를 바로잡으려 하였다.0348) 아울러 재상의 수를 줄여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고 詞林院의 기능과 위상을 강화시키는 작업도 동시에 추진하였다. 재상의 감축은 정책 결정과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치권력을 국왕에게 집중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었고, 사림원의 기능을 강화한 것은 이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충선왕 즉위년의 개혁정치는 같은 해 5월에 발생한 이른바 趙妃 무고사건을 겪으면서 점차 퇴조하기 시작하였다. 조비 무고사건은 조인규의 딸인 조비가 충선왕의 원 공주출신 왕비인 寶塔實憐公主를 저주했다고 무고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궁극적으로 충선왕에게 타격을 가하고 개혁정치를 좌절시키기 위해 연출된 것으로서,0349) 이후 개혁정국은 점차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6월에는 承旨房이 복구되었으며, 7월에는 都僉議司·密直司·監察司가 복구되는 등0350) 관제가 개혁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졌다. 이같은 개혁정치의 후퇴는 곧 충선왕의 왕위 유지가 어렵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충선왕은 8월까지 입조하라는 원의 명에 따라,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원에 소환되는 형식으로 강제 퇴위되고 말았다.
충선왕 퇴위 후 고려 정국은 충렬왕 측근세력과 충선왕 지지세력 사이의 갈등과 대립으로 혼미를 거듭하였다. 충렬왕 복위 후 충선왕 지지세력은 충선왕의 재집권을 위해 韓希愈 무고사건을 연출하기도 하고, 무력을 동원하여 吳潛과 石冑를 체포하는 등 충렬왕 측근세력에 대해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맞서 王惟紹·宋邦英 등 충렬왕 측근세력은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를 瑞興侯 琠에게 개가시켜 충선왕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려 하였다.0351)
두 세력간의 권력투쟁은 충렬왕과 그 측근세력의 패배로 끝났다. 세력의 축소와 약화를 면치 못하고 있던 충렬왕 측근세력은 충선왕 지지세력의 광범위한 저항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0352) 더욱이 원의 帝位 계승분쟁이 충선왕이 지원한 武宗의 승리로 끝남으로써0353) 충렬왕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더 이상 왕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충렬왕 33년(1307) 3월 이후 왕은 유폐된 상태에 있었으며, 그 측근세력은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0354) 따라서 이 때부터 충선왕은 복위한 것이나 다름없이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왕권 장악에 성공한 충선왕은 다시 한 번 개혁정치를 시도하였다. 개혁은 관제개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먼저 대폭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개혁정치의 기반을 조성한 후, 마침내 충렬왕 34년 6월에 새로운 관제를 반포하였다. 이번의 관제개편은0355) 관부 및 관직의 대폭적인 개칭, 관부의 통폐합, 언론관련 관부와 관직의 승격 등을 지향하고 있었다. 관부의 통폐합은 충선왕 즉위년에 개편되었던 6조체제를 選部·民部·讞部의 3부체제로 전환하고, 유사기능을 갖고 있는 관부끼리 통폐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이·병·예조가 선부로 통합되어 選軍·堂後官·衛尉寺가 여기에 흡수되었으며, 호조는 민부로 개칭하여 三司·軍器寺·都鹽院을 흡수시켰고, 형조는 언부로 개칭하여 監傳色·都官·典獄署를 여기에 귀속시켰다. 관부의 통폐합에 따라 폐지된 관부는 앞의 3부에 병합된 것 외에도 給田都監 등 많은 임시관부가 혁파되어 그 기능이 유사한 관부로 흡수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관제개편은 도첨의사사·3부·사헌부·예문춘추관 중심의 정치·행정체제를 확립하고자 한 것으로서, 국가기구의 정비를 통해 행정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한편 재정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언론기구 및 문한기구의 위상을 높여 감찰기능을 강화하면서 이를 통해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해된다.
관제개편을 단행한 후 충선왕은 복위한 지 5개월 만인 11월에 복위교서를 반포하였다.0356) 이 교서를 통해 밝힌 개혁의 방향은 권력기반의 강화와 국가재정의 확보, 민생의 안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충선왕은 개혁교서에서 조세의 均定을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국용을 두루 갖추고, 녹봉을 넉넉하게 하며, 백성의 산업을 풍족케 할 것”이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토지가 권력층에 의해 탈점되고 수취체제가 문란한 현실에서 충선왕은 양전과 호구조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수취체제의 정비를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충선왕의 이러한 量田制賦 정책은 재위 기간에 완결되지는 못했지만, 충숙왕대에 가서 이른바 ‘甲寅柱案’의 성립으로0357) 가시화 되었다.
충선왕의 재정개혁은 재정기구의 개편과 조세확충, 염법개혁으로 구체화되었다. 우선 재정기구의 개편과 신설을 통해 국가와 왕실의 재정기구를 강화하여 재원의 확보와 지출을 용이하게 하고자 하였다.0358) 충선왕은 당시 재정난의 주 요인을 권력층이 소유하고 있는 농장으로부터 수세되지 않는 데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典農司에 내린 교지에서 권력층이 점거하고 있는 사급전에서의 수세를 강조하는 한편, 녹과전·구분전을 제외한 경기 8현의 조세를 모두 조사하여 거둬들일 것을 명하였다.0359) 이는 稅收를 증대시켜 재정난을 타개하면서 한편으로 권력층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염법개혁도 추진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사찰이나 권력층이 장악해온 鹽盆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켜 그 수입을 국가재정에 보충하는 방안으로 나타났다.0360) 즉 충선왕의 염법개혁은 염의 생산부문은 물론이고 판매부문도 국가가 직접 관장하는 염전매제도의 실시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0361) 염전매제의 운영은 국가가 염호를 징발하여 소금을 생산케 하고 판매도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제대로 운영된다면 국가재정의 확충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는 권력층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개혁정책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충선왕 복위년의 개혁에서는 민생안정책도 모색되고 있었다. 개혁교서에서는 민생문제를 유발시키는 요인으로 과렴과 각종 부세의 징수, 문서변조에 의한 권력층의 토지탈점 등이 지적되었다. 이 개혁안은 그 대책으로써 과렴 때문에 처자를 판 경우는 관에서 그 값을 치뤄 부모에게 돌려주고, 적채된 부세는 1년간 징수하지 않도록 하며, 문서변조에 의한 토지탈점은 관청에서 조사를 철저하게 하여 불법자를 처벌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충선왕 복위 후의 개혁정치는 국가기구의 정비와 재정의 확보, 민생의 안정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이는 현실의 폐단을 시정하면서 충선왕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때의 개혁정치도 원의 간섭과 국내의 정치상황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선왕이 심양왕에 책봉됨으로써 지위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遼陽行省右丞 洪重喜 등이 충선왕의 내정 개혁을 빌미삼아 원에 이를 참소함으로써 원 중서성은 개혁정치에 제동을 걸어 왔다. 충선왕은 이에 따라 유배시켰던 인물들을 석방하고 혁파했던 近侍·茶房·三官·五軍을 복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후에도 원의 것과 같은 관제는 모두 고치는 조치를 취하였다.0362)
복위 후 충선왕의 개혁정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요인으로는 충선왕 자신이 원에 체류하면서 이를 추진하고자 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다. 충선왕은 복위교서를 반포한 지 채 한달도 안되어 원으로 들어간 후, 퇴위할 때까지 5년간 계속 원에 체류하면서 ‘傳旨’의 형식으로 국내 정치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왕의 체류 비용이 해마다 포 10만 필·쌀 400 석에 이르는 등 국가재정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고 권한공 등 시종신의 횡포가 노골화되고 있었다.0363) 체류비용을 낭비한다는 것도 개혁정치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전지에 의해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왜곡될 소지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개혁정치는 다시 좌절의 길을 걸으면서 충숙왕대로 넘겨질 수밖에 없었다.
0343) | 이 개혁안의 내용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盧鏞弼,<洪子藩의「便民十八事」에 대한 硏究>(≪歷史學報≫102, 1984) 및 金光哲,<洪子藩硏究-忠烈王代 政治와 社會의 一側面->(≪慶南史學≫1, 1984)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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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4) | 이 점에 대해서는 金光哲,<高麗 忠宣王의 現實認識과 對元活動-충렬왕 24년 受禪 이전을 중심으로->(≪釜山史學≫11, 1986) 참조. |
0345) | ≪高麗史≫권 33, 世家 33, 충렬왕 24년 충선왕 즉위 정월 무신. |
0346) | 이 개혁교서에 대한 분석은 李起男,<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歷史學報≫52, 1971) 참조. |
0347) | ≪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1, 選法. |
0348) | 李益柱,<충선왕 즉위년(1298) ‘개혁정치’의 성격>(≪역사와 현실≫7, 1992), 131쪽. |
0349) | 金成俊,<麗代 元公主出身 王妃의 政治的 位置에 대하여>(≪金活蘭紀念 韓國女性文化論叢≫, 1958 ;≪韓國中世政治法制史硏究≫, 一潮閣, 1985, 164∼166쪽). |
0350) | ≪高麗史≫권 33, 世家 33, 충렬왕 24년 6월 계해·7월 무술. |
0351) | 충렬왕 복위 후 전개된 그 측근세력과 충선왕 지지세력 간의 권력투쟁에 대해서는 金成俊, 앞의 책, 175∼180쪽 ; 金光哲, 앞의 글(1984), 18∼34쪽 ; 朴宰佑, 앞의 글, 8∼17쪽 참조. |
0352) | 金光哲,<충렬왕대 측근세력의 분화와 그 정치적 귀결>(≪考古歷史學志≫9, 東亞大 博物館, 1993), 302∼310쪽. |
0353) | 高柄翊,<高麗 忠宣王의 元 武宗 擁立>(≪歷史學報≫17·18, 1962 ;≪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 出版部, 1970, 297∼300쪽). |
0354) | ≪高麗史≫권 32, 世家 32, 충렬왕 33년 3월 신묘. |
0355) | 관제개편의 내용과 특징에 대해서는 朴宰佑, 앞의 글, 23∼41쪽 참조. |
0356) | ≪高麗史≫권 33, 世家 33, 충렬왕 34년 충선왕 복위 11월 신미. |
0357) | 朴京安,<甲寅柱案考>(≪東方學志≫66, 1990). ―――,<14세기 甲寅柱案의 運營에 대하여>(≪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한울, 1990). |
0358) | 朴鍾進, 앞의 글(1983), 71∼75쪽. |
0359) | ≪高麗史≫권 33, 世家 33, 충렬왕 34년 충선왕 복위 11월 신미. |
0360) |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鹽法. |
0361) | 姜順吉,<忠宣王의 鹽法改革과 鹽戶>(≪韓國史硏究≫48, 1985), 84쪽. 權寧國,<14세기 榷鹽制의 成立과 그 運用>(≪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47쪽. |
0362) | ≪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2년 10월 을묘. |
0363) | ≪高麗史節要≫권 23, 충선왕 5년 정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