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충숙왕대의 개혁정치
충숙왕대 개혁정치는 왕 5년(1318)과 12년 두 차례에 걸쳐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도 계속해서 개혁정치가 표방되고 있었다는 것은 그 동안의 개혁이 성과가 없었거나 아니면 당시 정치 현실이 개혁을 표방해야 할 상황이었음을 뜻한다. 충숙왕대 초기의 왕권은 실질적으로 충선왕에 의해 행사되고 있었다. 충선왕은 상왕의 위치에 있으면서 관료의 임면 등 인사권을 행사함은 물론,0364) 전지를 통해 정치운영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위초 충숙왕은 이같은 정치상황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왕은 꾸준히 지지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0365) 특히 충숙왕 3년에는 濮國長公主와 혼인함으로써0366) 원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제 충숙왕으로서도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만 했다. 마침 충선왕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田案을 바탕으로 공부를 수취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고 있었다. 貢賦의 불균등 현상이 드러나고 있었고,0367) 州縣에서는 공부의 액수를 채우기 위하여 荒田에서 은과 포를 징수하는 사례가 나타났으며, 권력층이 조세를 납부하지 않음으로써 향리와 백성이 이를 부담하는 폐단이 발생하였다.0368)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되었던 정책이 오히려 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사업을 주관했던 蔡洪哲은 불법으로 민전을 탈취하여 부를 축적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0369) 충숙왕은 이같은 정책의 난맥상과 충선왕 측근세력의 비행을 비판하면서, 이를 자신의 왕권 회복에 활용코자 하였다. 量田制賦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폐단을 바로잡겠다는 데 대해 충선왕으로서도 저지할 명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숙왕은 민간의 폐단을 조사하기 위해 언관을 파견하면서, 곧 바로 개혁교서를 발표하였다.0370) 충숙왕 역시 개혁정치의 표방을 통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모두 14개 항목으로 구성된 충숙왕 5년(1318)의 개혁교서에서는0371) 지방관과 공물 징수관의 비행, 권력층의 납세거부·전민탈점·고리대 행위, 향리의 避役으로 말미암은 민의 부담 등 현실적 폐단이 지적되었다. 개혁교서는 이러한 폐단에 대해 지방관의 비행 금지와 처벌, 납세 거부자의 철저한 조사를 지시하고 공신 賜田의 경우 정액 이상의 것은 환수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토지 탈점자는 유배 등에 처하고 농장에 투탁한 예속민은 추쇄하며, 其人이 모두 도망한 고을의 역은 면제한다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충숙왕은 개혁교서 발표 후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除弊事目所를 설치하였다.0372) 이는 곧 察理辨違都監으로 개칭되었는데, 충숙왕이 직접 그 이름을 지을 정도로 왕의 개혁의지는 매우 확고했던 것 같다. 이 기구는 권력층이 점탈한 田民을 조사하여 본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개혁활동은 당시 중외가 크게 기뻐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0373)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충숙왕의 개혁정치도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찰리변위도감이 곧 폐지되었다는 것은 충숙왕의 개혁정치가 위기를 맞고 있음을 뜻한다. 이 기구는 이후 충숙왕 8년(1321)까지 몇 차례에 걸쳐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는데, 폐지의 배경에는 항상 충선왕과 그 측근세력의 반발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찰리변위도감의 이러한 置廢 과정이야말로 이 시기 개혁정치가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충숙왕 7년 12월 충선왕이 吐蕃에 유배되면서부터 개혁은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먼저 政房의 구성원을 개편하고 동왕 8년 정월에는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충선왕 지지세력을 정부에서 추방하는 한편, 권한공·채홍철·金廷美·李光逢·裴廷芝를 체포, 유배하는 등 충선왕 측근세력의 핵심인물들을 숙청하였다.0374) 아울러 폐지되었던 찰리변위도감을 다시 설치하여 충선왕 측근세력이 점탈한 전민을 변정하는 등 그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작업도 함께 추진하였다.
충선왕 토번유배 후의 개혁정치도 원의 명에 따라 곧 충숙왕이 입조함으로써0375)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이 때 충숙왕의 입조는 元 英宗이 즉위하여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고려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원의 통상적인 외교 관행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입조 후 상황은 충숙왕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瀋王 暠를 즉위시키려는 심왕파의 책동으로 충숙왕은 원에 억류당하였다. 심왕 호는 충선왕의 형인 江陽公 滋의 아들이다.0376) 충선왕은 고려 왕위에서 물러난 후 충숙왕 3년에 심왕 자리를 호에게 물려주었다.0377) 이 때문에 고려 정치세력 가운데는 심왕 지지세력의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게다가 충숙왕에게 숙청당했던 충선왕 측근세력의 상당수가 심왕파에 가담함으로써 심왕파는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0378) 이렇게 세력기반을 강화하고 있던 심왕파는 마침내 입조한 충숙왕을 원에 억류시킨 후, 심왕 호를 고려 왕위에 즉위시키는 작업을 끈질기게 추진하였다. 심왕파는 충숙왕을 참소하여 원의 지원을 봉쇄하는 한편, 원 중서성에 심왕의 즉위를 요청하기 위하여 관료들의 서명작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0379)
그러나 심왕파의 책동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원으로서는 심왕파와 충숙왕파 간의 대립 자체가 그들의 고려에 대한 종속정책에 부합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심왕을 즉위시킬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충숙왕 10년(1323) 9월에 가서는 帝位가 泰定帝로 바뀜으로써 영종의 지원을 받았던 심왕파의 책동은 더 이상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리하여 충숙왕은 마침내 11년 정월, 원으로부터 국왕의 印章을 돌려받아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비록 충숙왕의 귀국은 1년 뒤에야 이루어졌지만, 거의 3년 동안 정지당했던 왕권을 다시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충숙왕은 귀국한 지 5개월 만인 동왕 12년 10월에 다시 한 번 개혁교서를 발표하였다.0380) 이미 개혁정치를 주도한 바 있는 충숙왕으로서는 개혁의 표방이야말로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 동안 몇차례의 개혁정치에도 불구하고 민생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의 표방은 민의 지지를 모을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모두 31개 항목 정도 확인되는 이 개혁안은0381) 당시 사회 여러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던 폐단을 지적하고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정치·행정분야에서는 관리의 비행과 郡縣의 무원칙한 승격으로 말미암는 폐단이 지적되었다. 경제분야에서는 토지점탈과 인구의 은닉, 鹽戶의 도망, 고리대의 성행에 따른 폐해가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사회분야에서는 향리의 피역, 호적의 위조, 賤男과 良女의 혼인문제, 惡少輩의 횡행에 따른 폐단 등이 지적되었다. 군사분야에서는 驛路의 쇠락, 군현별 軍額의 불균형, 군인의 열악한 처지가, 문화분야에서는 학교의 중흥과 箕子祠·圓丘·籍田 등 祀典의 정비가 강조되었다.
개혁교서는 당시 사회 여러 부문에서 드러나고 있던 폐단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는 점에서 폐단이 현실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결 방안은 매우 미흡한 것이었다. 토지점탈이나 수취체제의 문란, 민의 유망, 사회기강의 해이는 당시 권력구조와 토지지배관계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그 대책은 감독의 강화나 금지와 처벌, 그리고 추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안 자체가 당시 사회모순을 해결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충숙왕 12년의 개혁정치는 기존의 정치기구, 특히 언론기구를 통해 추진되었다. 그래서 충숙왕은 金開物과 같은 개혁적인 인물을 사헌지평에 임명하는 등 개혁정치의 추진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0382) 그러나 충숙왕은 개혁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손상시킬 수 있는 소지가 있을 때에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김개물이 당시 비행을 일삼고 있던 張世를 체포하려다 측근세력인 王三錫의 저지로 실패하고 있는 데서0383) 알 수 있다. 충숙왕도 측근세력을 기반으로 왕권을 유지,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측근세력이 개혁의 대상이 될 때에는 오히려 이를 저지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기반의 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이 크게 작용하고 있던 충숙왕 12년의 개혁정치는 추진과정에서부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0364) | <崔宰墓誌銘>(金龍善 編著,≪高麗墓誌銘集成≫, 翰林大, 1993), 595∼59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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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5) | 鄭希仙, 앞의 글, 10∼12쪽. |
0366) | ≪高麗史≫권 89, 列傳 2, 后妃 2, 濮國長公主. |
0367) | ≪高麗史節要≫권 24, 충숙왕 5년 5월. |
0368)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
0369) | ≪高麗史≫권 108, 列傳 21, 蔡洪哲. |
0370) | ≪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숙왕 5년 5월 신유. |
0371) | 이 개혁 교서의 내용 분석은 姜順吉,<忠肅王代의 察理辨違都監에 대하여>(≪湖南文化硏究≫15, 全南大, 1985) 참조. |
0372) | ≪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숙왕 5년 5월 병자·6월 무오. |
0373) | ≪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拶理辨違都監. |
0374) | ≪高麗史節要≫권 24, 충숙왕 8년 정월·2월. |
0375) | ≪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8년 4월 정묘. |
0376) | ≪高麗史≫권 91, 列傳 4, 宗室 2, 江陽公 滋. |
0377) | ≪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숙왕 3년 3월 신해. |
0378) | 鄭希仙, 앞의 글, 22∼23쪽. 金塘澤,<高麗 忠肅王代의 瀋王 옹립운동>(≪歷史學硏究≫12, 全南大, 1993), 367∼376쪽. |
0379) | ≪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9년 8월 병술. |
0380) | ≪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12년 10월 을미. |
0381) | 이 개혁안의 내용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金光哲,<高麗 忠肅王 12年의 改革案과 그 性格>(≪考古歷史學志≫5·6, 1990) 참조. |
0382) | <金開物墓誌銘>(≪高麗墓誌銘集成≫), 461∼462쪽. |
0383) | ≪高麗史≫권 106, 列傳 19, 金晅 附 開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