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신진사대부의 성장기반
원의 종속구조가 본격적으로 자리잡는 충렬왕대에는 기형적인 권력구조가 등장하고 정치운영이 파행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국왕의 지원을 받는 측근세력은 최고 권력층으로 등장하였으며 당시 관료집단도 측근정치에 타협하면서 그 지위를 유지·강화하려는 세력과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는 세력으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이는 세족출신뿐만 아니라 신흥관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충렬왕대 관료집단 가운데 일부는 측근정치기구인 必闍赤에 참여하거나, 征東行省官이나 殿試門生으로 선발되어 충렬왕의 측근정치에 협조하고 있었다.0472) 이들은 대부분 향리출신이든지 士族으로 등장한 지 얼마되지 않은 한미한 가문출신들이었다. 충렬왕은 이들이 과거합격자로서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그 가문배경이 문벌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왕권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적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권력층의 권력독점과 정치운영의 파행성이 심화되기 시작하자, 이러한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개선하는 데 주력한 관료들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대간직에서 활동했던 신흥관료들로서 충렬왕의 파행적인 정치운영과 측근세력의 불법적 권력 행사에 비판적이었던 대다수 관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물론 권력층에 대한 비판이 개별적으로 행해짐으로써 정치세력을 형성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비판활동은 사회모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제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충렬왕의 측근정치에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던 충선왕이 왕위계승을 위해 국내의 정치세력과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부터는0473) 현실비판적인 관료층의 입지가 강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선왕 즉위와 함께 시작된 개혁정치는 이제까지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던 신흥관료가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충선왕 즉위년(1308) 5월과 7월의 인사에서 학사직과 언론직에 기용된 20여 명의 인물 가운데0474) 13명은 향리출신이거나 아버지 때부터 비로소 관료를 배출하기 시작한 가문 출신이었다. 鄭可臣·安珦·崔旵·全昇·吳漢卿·李瑱·李承休·沈逢吉·趙簡·李混·張碩·朴全之·許有全 등이 이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원종대에서부터 충렬왕초에 걸쳐 과거에 합격하였다는 점에서 여몽전쟁이 종식된 후 고려의 종속화 과정을 지켜 본 사람들이다. 이들은 충렬왕 초기에 필자적이나 정동행성관으로 활동하면서 충렬왕의 측근정치에 협조하기도 했지만, 충렬왕 측근세력의 권력독점 등 정치운영이 파행적인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비판하다가 유배·파직당했던 경력이 있는 부류들이었다.0475) 충선왕은 이들의 이러한 비판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개혁 주도세력으로 발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흥관료는 이 시기 개혁을 매개로 굳게 결속하면서 정치적 지위를 강화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이러한 성장이 그들 자체로서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충선왕이 강제 퇴위됨으로써 신흥관료는 더 이상 세력의 신장을 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충렬왕 복위 후에도 신흥관료를 비롯한 개혁세력은 관료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개혁 주도세력이었던 박전지 등 몇몇 인물이 파직된 것을 제외하면 개혁세력의 대부분은 관직을 그대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위의 변동이 있었음에도 개혁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그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충렬왕이 재집권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들을 배제시킬 만한 정치적 여건이 아니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충선왕대 개혁에 참여했던 신흥관료는 충렬왕 복위 후에도 세족출신 개혁세력과 함께 충렬왕 측근세력의 충선왕비 개가책동을 저지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충렬왕 복위 후 가시화된 충렬왕 측근세력과 충선왕 지지세력의 대립구도는 오히려 신흥관료가 세족출신 개혁세력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충선왕 복위 이후 충혜왕대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의 기간은 신흥관료들에게 결코 유리한 시기가 아니었다.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측근정치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으며,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선왕은 복위한 지 4개월 만에 다시 원으로 돌아가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까지 원에 체류하면서 侍從臣을 측근세력으로 삼아 국내 정치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국의 주도권은 최성지·권한공·채홍철 등 충선왕 측근세력이 장악하게 되었고, 다시 한 번 충선왕의 지원을 기대했던 개혁세력은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실제 충선왕 원년(1308) 4월의 인사개편에서는 즉위년의 개혁세력이었던 인물들이 대거 탈락하는 등0476) 신흥관료가 점차 국정운영에서 소외되고 있었다. 개혁세력이었던 세족과 신흥관료는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충선왕의 환국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충숙왕대에도 개혁정치가 표방됨으로써 신흥관료가 다시 개혁을 매개로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었다. 충숙왕대 개혁세력 가운데 신흥관료에 해당하는 인물로는 李兆年·李齊賢·金開物·韓宗愈·申君平·李凌幹·金元軾 등이 확인된다.0477) 이들은 대체로 충렬왕대 말에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로서 충선왕 즉위년의 개혁정치와 충렬왕 측근세력과 충선왕 지지세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경험했고 충선왕의 吐蕃 유배, 충숙왕의 元都 억류, 심왕파의 책동 등 국가적 위기의 시대를 살면서 관료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심왕파의 책동과 관련하여 국내 정치세력이 전반적으로 그 위상에 손상을 입고 있었고, 이 시기에도 여전히 측근세력이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에 신흥관료를 비롯한 개혁세력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충숙왕의 원도 억류와 심왕파의 책동을 겪으면서 당시 국내 정치세력은 상당수가 이에 연루되었거나 충숙왕의 왕권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충숙왕은 12년(1325)의 개혁교서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였다. 즉 심왕파의 책동이 전개될 때 위험을 무릅쓰고 군신의 의리를 지킨 인물들이 매우 적었으며, 대부분이 눈치를 살피며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는 것이다.0478) 충숙왕은 당시 국내 정치세력이 대부분 자신의 왕권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숙왕은 개혁정치를 표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측근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 측근정치를 운영하고 있었다. 충선왕의 내정 간섭과 심왕파의 책동을 겪은 충숙왕으로서는 왕권의 유지·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이를 측근세력의 육성을 통해 달성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측근정치가 유지되고 측근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상황에서 이외의 정치세력들은 이들 권력층으로부터 견제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상황은 충혜왕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충혜왕대에는 이른바 악소배를 측근세력으로 하는 측근정치의 극단적인 형태가 유지됨으로써,0479) 신흥관료를 비롯한 사대부층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曹頔亂의 진압에 참여하는 등 충혜왕을 지원했던 이조년이 사임하여 낙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0480) 신흥관료가 더 이상 국정운영에 참여할 수 없는 이같은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처럼 충선왕 복위 후 충혜왕대에 이르기까지 30년간은 개혁세력이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도 없었고, 신흥관료의 정치세력화도 달성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는 사상계의 변화가 나타나면서 새로운 사상경향을 지닌 인물들이 사대부층으로 확충된 시기라는 점에서 이후 신진사대부의 형성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원의 종속구조가 지속되는 가운데 고려 지식인층은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원에서 숙위하고, 원 制科에 응시하면서 자주 원의 문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양국 문인의 교류는 충선왕대를 고비로 더욱 활발하여 교류의 폭과 내용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같은 여·원 간의 교류를 통해 고려의 사상계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사상계는 이미 중기부터 송과의 교류를 통해 북송 신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었는데,0481) 이제 원과의 교류를 통해 당시 원의 지배이데올로기의 하나였던 주자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0482)
이처럼 고려 후기 사상계에 변화가 나타나게 되면서부터 점차 주자성리학을 학문적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유형의 사대부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安珦·閔漬·李齊賢·李穀·白文寶·朴忠佐·權溥·白頤正·禹倬·崔瀣·崔文度·李仁復·李穡 등이 이들이다.0483) 이들은 충혜왕대까지 관료로 활동했거나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로서, 민지·권부·최문도·백이정·이인복 외에는 모두 자신이나 아버지 때부터 관료를 배출하는 정도의 가문배경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체제유지적 현실정치론을 지향하고 아직 불교적 세계관에서 철저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小學≫의 일상적인 윤리규범과≪大學≫의 窮理·正心의 도를 익히면서0484) 좌주·문생관계와 학문적 교유를 통해 사대부층의 사상경향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말미암아 비록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주자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현실인식을 심화시키고 개혁의 필요성을 확산시키면서 세력을 결집해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진사대부의 면모는 충목왕대 개혁정치의 추진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충목왕대 개혁정치는 다른 시기와는 달리 개혁기구로서 정치도감이 설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이 체계적일 수 있었고, 개혁세력 상호간의 결속력도 강화될 수 있었다. 정치도감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혁세력은 세족출신 사대부와 신진사대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整治官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되는 33명 가운데 왕후·김영돈·김광철·郭王囷·金英利·許湜 등은 세족출신이었고, 안축·백문보·徐浩 등 27명은 신진사대부로서의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정치관이 아니면서 개혁세력이 되고 있던 인물인 이제현과 박충좌는 이들 정치도감 소속의 신진사대부와 특징을 같이하고 있었다.
정치관으로 활동한 신진사대부는 대부분 충숙왕대 이후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었다. 그 입사방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정치도감 판사였던 안축은 충렬왕 33년(1307)에 급제하였지만, 그 속관인 백문보·이배중·신군평·河楫·南宮敏은 충숙왕대에, 安吉祥·田祿生·安克仁 등은 충혜왕대에 급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사대부층이 위축당하고 있던 정치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학문을 연마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언론직에서 활동하면서 개혁정치의 전개와 함께 개혁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이들이 과거에 합격한 시기가 주자성리학의 유입 등 사상계의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라는 점에서, 이제현·백문보·박충좌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일정하게 새로운 정치이념을 체득하고 있던 사람들로 이해된다.
충목왕대 개혁세력으로 활동했던 신진사대부는 이 시기 개혁이 원의 간섭으로 좌절된 이후에도 그 세력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관 가운데 백문보·전녹생·안극인·陳永緖·李元具·金達祥 등은 공민왕대에 가서도 개혁에 참여하는 등 정치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정치관이었던 사람들의 아들이 역시 개혁세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0485) 특히 이제현의 경우는 공민왕대에 가서 좌주·문생관계 등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공민왕대 개혁정치의 버팀목이 되고 있었다.
0472) | 李益柱, 앞의 글(1988), 210∼213쪽. |
---|---|
0473) | 金光哲,<高麗 忠宣王의 現實認識과 對元活動>(≪釜山史學≫11, 1986), 48∼58쪽. |
0474) | ≪高麗史≫권 33, 世家 33, 충렬왕 24년 충선왕 즉위 5월 신묘·7월 무술. |
0475) | 李益柱, 앞의 글(1988), 214∼215쪽. |
0476) | ≪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원년 4월 신미. |
0477) | 鄭希仙, 앞의 글, 39쪽. 金光哲, 앞의 책, 191∼193쪽. |
0478) | ≪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12년 10월 을미. |
0479) | 채웅석,<고려 중·후기 ‘무뢰(無賴)’와 ‘호협(豪俠)’의 형태와 그 성격>(≪역사와 현실≫8, 1992), 249∼250쪽. |
0480) | ≪高麗史≫권 109, 列傳 22, 李兆年. |
0481) | 文喆永,<麗末 新興士大夫들의 新儒學 수용과 그 특징>(≪韓國文化≫3, 서울大, 1982), 99∼109쪽 ―――,<고려 중기 사상계의 동향과 新儒學>(≪國史館論叢≫37, 國史編纂委員會, 1992), 52∼58쪽. |
0482) | 원간섭기 주자성리학의 유입 문제와 이를 수용한 사대부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金泰永,<高麗後期 士類層의 現實認識>(≪創作과 批評≫44, 1977). 文暻鉉,<麗末 性理學派의 形成>(≪韓國의 哲學≫, 慶北大 出版部, 1980). 鄭玉子,<麗末 朱子性理學의 導入에 대한 試考>(≪震檀學報≫51, 1981). 金忠烈,<麗末 性理學의 수입과 형성과정>(≪高麗儒學史≫, 高麗大 出版部, 1984). 閔賢九,<白文寶硏究>(≪東洋學≫17, 檀國大, 1987). 周采赫,<元 萬卷堂의 設置와 高麗 儒者>(≪孫寶基博士停年紀念論叢≫, 知識産業社, 1988). 金男隨,<白文寶의 性理學 受容과 排佛論>(≪韓國史硏究≫74, 1991). 張東翼,<麗·元 文人의 交流>(≪國史館論叢≫31, 1992). 高惠玲,<高麗 士大夫의 性理學 受容>(≪14세기 高麗 士大夫의 性理學 受容과 稼亭 李穀≫, 梨花女大 博士學位論文, 1992). 都賢哲,<高麗後期 朱子學 受容과 朱子書 普及>(≪東方學志≫77·78·79, 1993). |
0483) | 高惠玲, 위의 책, 84∼93쪽. |
0484) | 도현철,<14세기 전반 유교지식인의 현실인식>(≪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민음사, 1993), 585∼587쪽. |
0485) | 閔賢九, 앞의 글(1980), 136∼13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