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3) 개혁정치의 추진과 신진사대부의 성장(3) 신진사대부의 성장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1) 중앙 통치체제의 변화
            • (1) 도평의사사
            • (2) 충렬왕대의 관제격하
            • (3) 충선왕대의 관제개혁
            • (4) 공민왕대의 관제개혁
            • (5) 고려 후기 정치체제의 성격
          • 2) 지방 통치체제의 변화
            • (1) 감무제의 확산과 농촌사회의 변화
            • (2) 문무교차제의 시행과 외관간의 갈등
          • 3) 관리 등용제도의 변질
            • (1) 인사행정의 문란과 관원의 숫적 증가
            • (2) 과거제와 음서제 등의 변질
            • (3) 첨설직제와 납속보관제의 신설
          • 4) 군제의 개편
            • (1) 원간섭기의 군제
            • (2) 군역체계의 변화
            • (3) 중앙군제의 개편
            • (4) 지방군제의 재편
        • 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 1) 권문세족의 성립과 그 성격
            • (1) 세족층의 형성과 그 특징
            • (2) 고려 후기 권력구조와 세족
            • (3) 고려 후기 사회모순의 심화와 세족층의 동향
            • (4) 고려 후기 세족의 역사적 성격
          • 2) 신진사대부의 대두와 그 성격
            • (1) 신진사대부의 대두 배경
            • (2) 사대부의 성격과 용어에 대한 논의
            • (3) 사대부의 성격과 시기구분
          • 3) 개혁정치의 추진과 신진사대부의 성장
            • (1) 개혁정치의 추진
            • (2) 개혁정치의 성격
            • (3) 신진사대부의 성장
        • 3. 고려왕조의 멸망
          • 1) 고려왕조 멸망의 배경
            • (1) 이인임 정권의 한계와 무장세력의 대두
            • (2) 이인임 정권 내부의 갈등과 최영의 집권
            • (3)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
          • 2) 이성계의 집권과 고려왕조의 멸망
            • (1) 이성계 집정체제 강화를 위한 개혁
            • (2) 공양왕 옹립과 이성계의 실권 장악
            • (3) 정몽주 살해와 이성계의 왕권찬탈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1. 농장의 성립과 그 구조
          • 1) 전시과체제의 붕괴
          • 2) 농장의 발달과 그 구조
            • (1) 수조지집적형 농장
            • (2) 사적 소유지형 농장
          • 3) 녹과전의 설치
          • 4) 사전·농장의 혁파
        • 2. 수취제도의 변화
          • 1) 조세
          • 2) 공부와 요역
            • (1) 공부
            • (2) 토목공사에서의 부역실태
            • (3) 수취기준의 변화
        • 3. 농업기술의 발전
          • 1) 농법의 발전
          • 2) 목면의 재배
        • 4. 수공업과 염업
          • 1) 수공업
            • (1) 관청수공업
            • (2) 소 수공업
            • (3) 사원수공업
            • (4) 민간수공업
          • 2) 염업
            • (1) 고려 전기 소금의 생산과 유통
            • (2) 고려 후기 소금 전매제의 실시
        • 5. 상업과 화폐
          • 1) 국내상업
            • (1) 도시상업
            • (2) 지방상업
            • (3) 고려 후기 상업의 발달과 신분제의 변동
          • 2) 대외무역
            • (1) 원과의 무역
            • (2) 다른 지역과의 교역
          • 3) 화폐의 유통
            • (1) 포화
            • (2) 은병과 소은병
            • (3) 쇄은과 은전
            • (4) 원의 보초
            • (5) 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나. 신진사대부의 성장과 분화

 공민왕대의 개혁정치는 신진사대부가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사대부층의 한 갈래로 뚜렷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공민왕대 전 기간이 거의 개혁정국이나 다름없이 운영됨으로써 개혁적 성향을 지닌 신진사대부는 그 활동 공간을 넓힐 수 있었다. 공민왕 초기의 개혁은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왕의 외척과 시종신을 중심으로 추진됨으로써, 신진사대부가 개혁의 주도세력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현·이곡·윤택 등 신진사대부는 충목왕 사후 왕위계승 과정에서 권준·왕후·김경직 등 세족출신과 함께 공민왕의 즉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바 있기 때문에,0486) 이후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제현은 공민왕 즉위와 함께 정승에 임명되어 裴佺 등 충정왕 지지세력을 제거하고,0487) 書筵에 참여하여 토지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등 개혁을 주장하면서 정치력을 신장시키고 있었다. 백문보도 전리판서에 임명되어 인사행정의 정상화를 꾀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으며, 공민왕 원년(1352) 3월에는 관리선발에서 천거제의 활용을 건의하는 등0488) 개혁에 앞장서고 있었다. 이처럼 이들 신진사대부는 비록 기철 등 부원세력을 숙청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반원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는 배후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0489)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공민왕대 초기에 신진사대부는 이제현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이제현세력에는 세족출신 사대부를 비롯하여 신진사대부가 많이 포함되고 있었다. 이제현세력이 된 신진사대부는 이제현과 학문적 유대관계나 정치노선을 같이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즉 이제현과 동문이거나 문생, 또는 그 문생의 문생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과 정치적 입장이나 정치노선을 같이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현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0490) 이들은 공민왕대 개혁정국 속에서 개혁을 매개로 그들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 있었다.

 신돈정권의 등장도 신진사대부의 세력 강화에 기여하였다. 신돈정권의 성립 초기까지만 하여도 공민왕은 신진사대부가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려는 데 대해 경계하고 있었다. 왕권강화에 집착하고 있던 공민왕에게는 권력층으로 부상한 무장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한편으로는 신진사대부가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것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돈이 이제현과 그 문생들을 ‘나라에 가득찬 도둑’으로 지목하고,0491) 이들을 비판한 것은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신돈정권은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정치를 지속시킬 수밖에 없었으며, 개혁정국이 유지되는 한 신진사대부의 활동공간은 오히려 확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공민왕과 신돈은 개혁의 추진을 위해서 신진사대부를 개혁세력으로 확보하면서 그들의 협조와 참여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돈정권기의 대표적인 개혁사업으로 평가되는 전민변정사업과 국학 중흥책은 이미 이색 등 신진사대부에 의해서 제안된 것이었다는 점에서0492) 이 시기 개혁에는 신진사대부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 16년(1367), 국학의 중흥을 표방하면서 추진된 교육개혁은 신진사대부가 세력을 결집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진사대부의 내적 구성과 주도세력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공민왕은 국학의 중영을 명하면서 전국의 儒官이 품계에 따라 포를 내어 그 비용을 충당하도록 하였으며, 성균관의 학생 수를 증원하고 이색을 대사성에 발탁하는 한편, ‘經術之士’로 지목되고 있던 김구용·정몽주·박상충·박의중·이숭인 등을 모두 학관에 임명하였다.0493)

 이색이 대사성에 발탁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그가 신진사대부의 핵심인물로 부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 시기에 와서 신진사대부의 구심이 이제현에서 이색으로 이동하는 등 일정하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 국학 중영사업을 주도한 신진사대부도 모두 이제현세력의 구성원이었다는 점에서 그 성향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진사대부의 주도세력이 공민왕대 과거합격자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 공민왕 초기 신진사대부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제현·백문보·김득배 등을 대신하여 그 문생들이 중심인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국학 중영사업을 계기로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던 사대부로는 이색·김구용·정몽주·박상충·박의중·이숭인·임박·정도전·정추·이존오·김제안·윤소종·이첨·권근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이색을 중심으로 학문적 유대관계를 통해 교유해온 인물들이었다. 즉 이색의 문하생이었거나 그들 사이에 어릴적부터 교우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 가운데 김구용·김제안·권근·정추는 세족출신이었고, 박의중·이숭인·이존오·윤소종 등은 이미 그들의 할아버지 때부터 관료를 배출하기 시작한 士族출신이었다.0494) 이들은 공민왕대 초기 국제관계의 변화와 국내정세의 변동을 경험하면서 현실인식과 자주의식을 심화시켰고, 대부분 공민왕 9년(1360)을 전후한 시기에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이색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사대부는 신돈정권기 개혁정치에 참여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물론 신돈집권기의 정치운영에 대한 신진사대부의 대응방식이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임박은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전민변정사업 등을 주도한 바 있고, 정추와 이존오는 오히려 신돈에 비판적이었으며, 정몽주·정도전·박상충·박의중·윤소종 등은 중도적인 입장에 있었다.0495) 그러나 신돈의 정치적 지향과 신진사대부의 그것이 동일하지 않았다 하더라도,0496) 이 시기 개혁 자체는 신진사대부가 추구하는 개혁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진사대부의 상당수는 개혁정치에 참여하면서 자기성장을 이루고 있었으며, 신돈이 몰락하는 공민왕 20년 경에는 중견 관료로서 인사권을 장악하고 요직을 역임하는 등 괄목할 만한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제현과 그의 문생인 이색을 중심으로 하는 공민왕대 신진사대부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우선 이들은 좌주·문생관계 등 과거를 매개로 결속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부분 과거합격자들로서 학문연마와 과거응시를 통해 사제관계나 교우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공민왕대에 활동했던 신진사대부 가운데 知貢擧나 同知貢擧를 역임하면서 과거를 주관했던 인물로는 이제현·안축·박충좌·이곡·안보·이인복·김득배·이색·전녹생·이무방 등이 있다.0497) 이들은 대부분 이제현을 중심으로 동문이거나 문생 또는 문생의 문생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각각 배출한 문생들은 학문연마나 과거 준비과정에서 서로 긴밀한 교우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는 세족출신 사대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학문적 교우관계를 맺고 있거나 현실인식 및 정치노선을 같이한 경우에는 가문배경이나 경제적 기반의 차이가 둘 사이의 결속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현이나 이색의 세력집단에는 김구용·권근 등 문벌출신의 사대부가 많이 포함되고 있었다. 사대부층 내에서의 이러한 관계는 공민왕대 이전에도 유지되어 온 바이지만, 공민왕대부터는 그 주도적인 역할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즉 공민왕대 이전에는 충목왕대의 개혁정치에서 보았듯이 왕후·김영돈 등 세족출신이 사대부층의 구심 역할을 하였다면, 공민왕대 이후에는 이제현·이색 등 신진사대부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제 신진사대부는 세족출신 사대부까지 세력집단 내로 끌어들이면서 정치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공민왕대 신진사대부는 대부분 주자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충렬왕대 주자성리학이 도입된 이래로 널리 보급되고 있던 성리학은 공민왕대에 와서 그 연구가 심화되고 확산되면서 당시 사대부는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당시 사대부들은≪小學≫을 통해 성리학의 기초교육과 일상적인 윤리규범을 배우고,≪大學≫에서 窮理正心과 修己治人의 도를 익히며,≪中庸≫에서 도덕적 실천의 근거를 배우는 등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었다.0498) 충목왕대부터≪四書集註≫가 과거의 시험과목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0499) 당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공민왕대의 과거는 이제현·이인복·이색 등이 거의 주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점도 주자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는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공민왕대 사대부는 농업기술의 진흥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0500) 이미 충정왕대에 李嵒은 원에서 농업기술서인≪農桑輯要≫를 가져왔고, 공민왕대에 와서는 姜蓍와 金湊 등이 이를 보급하기에 편리하도록 小楷體로 바꾸어 간행하는 등 농업기술의 보급에 관심을 보인 바 있다. 백문보는 水車의 제조를 건의하는 등 강남농법의 도입에 열의를 보였으며, 이색은≪농상집요≫의 後序에서 이 책의 내용을 ‘理生의 良法’이라 극찬하면서 농업기술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당시 신진사대부는 중국의 선진 농법을 도입하는 등 농업기술의 진흥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공민왕대 개혁정치를 통해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는 우왕대 李仁任정권이 등장하면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우왕대 정치상황이 신진사대부에게는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인임정권은 족당세력을 형성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경제적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0501) 비록 우왕 8년(1382)을 고비로 권력 창출의 주체가 이인임에서 林堅味로 변화하기는 하지만, 이인임정권은 최영에 의해 임견미·염흥방 등이 숙청되는 우왕 14년 정월 이전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인임 정권이 지속되는 동안 신진사대부를 비롯한 조정 관료의 정치활동은 제약당할 수밖에 없었다. 세족출신으로서 당시 재상의 자리에 있던 김속명이 지금의 재추는 자리만 채우고 있다고 자조할 정도로,0502) 이인임 족당세력을 제외한 정치세력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왕대 더욱 잦아진 왜구의 침입도 신진사대부의 정치활동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왜구의 침탈은 이미 공민왕 때부터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는 현안문제가 되어왔지만, 우왕대는 그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침입 횟수를 비교해 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충정왕 2년(1350)부터 공양왕대까지 42년 간에 왜구는 500여 회 침입했는데, 그 가운데 우왕대는 14년 동안 모두 378회에 이르고 있었다.0503) 매년 평균 27회씩이나 왜구의 침입을 당했던 셈이다. 왜구의 침입이 이러했기 때문에 당시 정국은 전시체제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이러한 정치상황은 신진사대부의 활동공간을 축소케 하였을 것이다.

 우왕대 이인임정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정치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자 신진사대부들은 이인임세력과의 정면 대결을 통하여 위기국면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우왕 원년 北元 사신의 영접 문제를 둘러싸고 가시화되었다. 공민왕대부터 친명적 외교노선을 유지해왔던 신진사대부들은 이인임 등이 북원 사신을 받아들이는 등 원과의 관계개선에 주력하는 움직임을 보이자0504) 이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김구용·이숭인·정도전·권근의 都堂上書에서부터 시작된0505) 원 사신의 입국 반대운동은 마침내 이첨과 全伯英이 이인임의 誅殺을 요구하는 데까지 격화됨으로써0506) 이제 두 세력 간의 정면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인임 등은 신진사대부의 이같은 도전을 방치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이인임의 사주를 받은 禹仁烈과 韓理 등은 諫官이 재상을 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북원 사신의 입국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모두 숙청하고 만 것이다.0507) 이 때 북원 사신의 입국을 반대하는 등 이인임정권에 저항하다 숙청된 인물은 모두 22명 정도 확인되고 있다. 임박·정몽주·정도전·이숭인·김구용·이첨·박상충·전녹생·전백영·林孝先·方旬·閔中行·朴尙眞·廉廷秀·廉興邦·朴形·鄭思道·李成林·尹虎·崔乙義·趙文信·金子粹·鄭寓 등이 이들이다. 이들 이인임정권에 저항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볼 때,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가 주축을 이루면서 민중행·염정수·염흥방·박형·이성림·윤호 등 세족출신도 같은 세력집단에 포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대부터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신진사대부는 이 시기에도 변함없이 한 세력집단으로 굳게 결속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과 정치노선을 함께하는 세족출신 사대부를 대상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인임정권에 대한 신진사대부의 도전은 이처럼 실패로 끝났다. 신진사대부로서는 타격이 컸을 것이고, 다시 세력을 만회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적 타격에도 불구하고 신진사대부가 정치활동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이인임정권에 의해 숙청당했던 인물들은 다음해인 우왕 2년(1376)부터 대부분 석방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곧 발탁된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이인임 족당세력 내에서 권력투쟁이 전개되는 우왕 8년 이후부터 신진사대부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이색은 우왕 12년에 지공거를 맡았으며, 왕이 그를 사부로 삼아 존경의 뜻을 표하고 鞍馬를 하사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동왕 14년 정월, 이인임세력 숙청 후의 인사개편에서 判三司事로 발탁되었다. 박의중은 언론직에서 활동하면서 왕의 사치를 비판하고 경연 개설을 건의한 바 있으며, 정몽주·이숭인은 각각 政堂文學·同知密直司事 등 고위직에 임명되어 친명외교의 재개를 위해 활동하였다. 정도전은 우왕 10년 典校副令이 되어 정몽주를 따라 명에 다녀온 바 있고, 이후 成均祭酒 등의 관직을 거쳐 동왕 13년에는 大司成으로 활동하였다.0508) 이렇게 볼 때 신진사대부의 상당수는 이인임정권하에서도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하는 등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위화도회군 이후 이들이 권력 창출의 주도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이 정계에서 축출되지 않고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위화도회군은 신진사대부가 마침내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회군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 무장세력이 주도했지만, 여기에는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개입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선 신진사대부의 외교노선이기도 한 친명노선이 회군의 명분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정도전은 일찍이 이성계와 교우관계를 가지면서 역성혁명을 암시하고 있었다.0509) 또한 요동정벌에 참여했다가 회군을 건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南誾·趙仁沃은0510) 조준·윤소종·許錦·鄭地 등과 교우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조준은 이성계와 모든 사안을 함께 의논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0511) 그러므로 위화도회군은 정치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하고 있던 이성계 등 신흥 무장세력과 현실개혁에 관심을 갖고 있던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결합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위화도회군 후 집권세력으로 부상한 신진사대부는 권력개편에 성공한 후, 私田개혁과 관제개편 등 개혁정치를 주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왕조교체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진사대부는 이러한 정치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내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내적 분화는 이 기간 동안의 현안문제였던 사전개혁과 공양왕 옹립, 왕조교체를 둘러싸고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들은 사전개혁 문제 등을 둘러싸고는 온건한 개량노선을 지지하는 세력과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세력으로,0512) 왕조교체를 둘러싸고는 왕조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왕조교체 세력으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 신진사대부는 현실인식, 개혁의 방도, 정치적 지향의 차이에 따라 분화하고 있었던 것이다.0513)

 사전개혁을 둘러싸고 당시 사대부층은 ‘一田一主論’과 ‘私田革罷論’으로 나누어져 대립하고 있었다.0514) 이색·권근 등은 그들이 공민왕대부터 주장해온 ‘일전일주론’에 입각하여 사전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이었다. 즉 수조권분급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전주를 1인으로 확정함으로써 수조권이 중첩되는 데 따른 폐단만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반면에 조준·정도전 등은 당시 사회문제를 유발하는 모든 요인이 사전제 자체의 폐단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혁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전혁파론은 과전법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일정하게 절충됨으로써 수조권분급제의 폐기로 귀결되지는 못했지만, 사전개혁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개혁론이었다.

 사전개혁을 둘러싼 사대부층의 내적분화는 공양왕 원년(1389) 4월 도평의사사에서 田制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성계와 조준이 사전개혁을 주장했을 때, 이색·권근·李琳·禹玄寶·邊安烈·柳伯濡 등은 이에 반대하였으며, 정도전과 윤소종은 찬성하였고, 정몽주는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0515) 신진사대부 내에서는 사전 개혁문제를 놓고 이색과 정도전을 중심으로 각각 온건론과 급진론으로 나누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권근과 조준의 입장에서 보듯이 세족출신 사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볼 때 사전개혁은 사대부층 내의 전반적인 분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신진사대부에 국한해서 보면, 공민왕 16년 교육개혁을 고비로 그 주도세력이 이제현에서 이색으로 넘어갔고, 이제 이 시기에 와서는 이색을 구심점으로 하고 있던 신진사대부 내에서 분화의 조짐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신진사대부의 내적분화는 공양왕 옹립과정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창왕 원년(1388) 11월에 발생한 金佇의 獄을 계기로, 이성계·정몽주·조준·정도전·沈德符·池湧奇·偰長壽·成石璘·朴葳 등은 다시 ‘禑昌非王說’0516)을 제기하면서 ‘廢假立眞’을 내세워 공양왕 옹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0517) ‘우창비왕설’은 이미 위화도회군 후부터 제기되었던 것으로, 이성계파에 속했던 조준·윤소종·吳思忠 등 급진적 사대부들은 유교의 명분론과 春秋大義를 앞세워 창왕의 즉위에 반대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색 등은 君臣義理와 天理·天倫을 주장하면서 이에 맞서고 있었다.0518) 위화도회군 직후 이성계파는 당분간 이색 등 온건론자의 입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어서 창왕의 즉위를 받아들였던 것인데, 이 때에 와서 본래의 의도대로 공양왕을 옹립한 것이다.

 공양왕 옹립에 성공한 후 이성계파는 이색·권근·이숭인·이임·조민수·이종학·하륜 등을 숙청하였다.0519) 이제 사전개혁을 둘러싸고 대립해왔던 신진사대부 내의 두 세력은 공양왕 옹립과정에서 세력 균형관계가 무너져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개혁파가 확실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는 쿠데타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성계파가 공양왕 옹립을 통해 신진사대부의 상당수를 자신의 세력으로 확보하면서 집권에 걸림돌이 되는 세족과 신진사대부를 한꺼번에 제거하는 효과를 거둔 것이기도 하다.0520)

 공양왕 옹립을 지지했던 신진사대부는 왕조 교체과정에서 다시 분화하면서 대립하기 시작한다. 조선건국에 이르기까지 약 3년 동안에 신진사대부층은 다시 내적 분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김저의 옥 이후 공양왕대 최대의 정치적 사건은 동왕 2년(1390) 5월에 발생한 尹彛·李初事件이다.0521) 이 사건은 무고로 판명되었지만, 여기에 연루된 인물들은 이색·우현보·이임 등 공양왕 옹립에 반대하다가 유배된 인물이 대부분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이성계파는 다시 대간을 동원하여 이색 등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무고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파가 이를 정치쟁점으로 삼은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즉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색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노선의 신진사대부를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공양왕 옹립에 참여했던 신진사대부를 결속하는 한편,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던 공양왕의 활동을 제한된 범위 내에 묶어두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처리해나가는 과정에서 이성계파가 왕조교체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게 되자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양왕은 이색 등을 주살하자는 대간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면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정도전·남은 등 이성계파의 탄핵활동을 저지하고 대신에 정도전에 대한 탄핵은 받아들이는 등 이성계파의 입장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0522) 이는 왕조교체를 추진하려는 이성계파의 의도를 공양왕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윤이·이초사건은 공양왕 옹립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세력집단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심 인물은 정몽주였다. 공양왕 2년(1390) 8월, 사헌부와 형조가 윤이·이초의 당여를 치죄할 것을 요청했을 때 공양왕은 이를 도당에서 논의케 했는데, 정몽주는 “죄가 명백하지 않고, 또한 이미 사면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논죄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어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0523) 위화도회군에서 공양왕 옹립에 이르기까지 정도전 등과 함께 정치적 노선을 같이해 왔던 정몽주는 이성계파가 왕조교체를 가시화시켜가자 고려왕조를 유지시키려는 세력집단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왕조교체 문제는 신진사대부가 다시 내적분화를 이루는 또 한번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정몽주와 입장을 같이하면서 조선건국에 반대했던 세력집단에는 權遇·許應·金瞻 등 세족출신과 이행·이첨·성석린 등 신진사대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0524) 이들은 정몽주가 守門下侍中에 임명되는 공양왕 2년말부터0525) 왕의 지원을 받으면서 정도전 등 조선건국 주도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펴기 시작하였다. 먼저 이성계파로 활동하고 있던 윤소종·오사충·南在 등을 대간직에서 교체하거나 좌천시키고, 동왕 3년 9월에는 정도전과 趙胖을 유배보냈다. 이듬해 4월에는 마침내 이성계파의 핵심 인물들인 조준·정도전·윤소종·오사충·남은·남재·조박 등을 削奪官職, 유배, 국문케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대신에 유배되었던 이색·이숭인·이종학을 소환하여 복권시켰다.0526) 조선건국을 주도하고 있던 급진적 신진사대부는 이처럼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파는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정몽주 암살이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하여 타개하였고, 곧 공양왕을 폐위하여 조선건국을 가시화시켰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공민왕대부터 성장하고 있던 신진사대부는 위화도회군 후 전제개혁, 공양왕 옹립, 조선 건국과정에서 몇 차례에 걸쳐 내적으로 분화하고 있었다. 신진사대부의 내적 분화는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전제개혁에 급진적이었거나 공양왕 옹립에 동조했던 사람들이 모두 왕조교체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신진사대부의 한 사람이었던 이행은 조준 등과 함께 사전혁파를 강력히 주장한 바 있으나0527) 왕조교체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정몽주·이첨·설장수도 공양왕 옹립에는 참여했으나 조선 건국과정에서 이성계파와 대립하고 있었다.0528) 성석린 역시 이성계와 함께 9공신에 포함되는 등 공양왕 옹립을 주도했으나 왕조교체에 반대함으로써 이색·우현보의 당여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0529)

 결국 사전개혁과 공양왕 옹립, 그리고 왕조교체를 추진하는 등 일관된 정치노선을 유지했던 대표적인 신진사대부로는 조선 개국공신이기도 했던 정도전·윤소종·남은·남재·오사충·조인옥 등으로 좁혀졌다. 이들은 위화도회군 후 역시 분화의 길을 걷고 있던 세족출신 사대부 가운데 조준·金士衡·鄭摠 등 정치노선을 같이하는 인물들과 연대하여 조선건국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조선건국에의 참여 여부는 물론 사상경향이나 정치적 지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진사대부 내에서의 차별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른바 ‘杜門洞72賢’에 속하는 인물들의 면면에서 나타나고 있듯이,0530) 상당수의 신진사대부는 주자성리학적 사상경향과 현실 개혁적 성향의 소유자들이면서도 조선건국의 주도세력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이들을 신진사대부층에서 제외할 수는 없을 것이다.

<金光哲>

0486)閔賢九, 앞의 글(1989), 52쪽.
0487)≪高麗史≫권 38, 世家 33, 공민왕 즉위년 11월 을해.
0488)≪高麗史節要≫권 26, 공민왕 원년 3월.
0489)閔賢九는 공민왕 5년의 반원개혁정치를 부원세력을 제거한 政變의 측면과 반원 자주적 개혁의 측면으로 구분하고, 이제현 등은 개혁의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배후 인물이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閔賢九,<益齋 李濟賢의 政治活動-공민왕대를 중심으로->,≪震檀學報≫51, 1981, 238쪽).
0490)李淑京, 앞의 글, 49∼52쪽.
0491)≪高麗史≫권 132, 列傳 45, 叛逆 6, 辛旽.
0492)이익주, 앞의 글(1995), 53∼54쪽.
0493)≪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6년 5월.
0494)이들의 가문배경과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閔賢九, 앞의 글(1968b), 84∼89쪽 참조.
0495)閔賢九, 위의 글, 91쪽.
0496)朱碩煥은 신돈집권기에는 불교의식을 통해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꾀하려는 신돈의 정치적 지향과 유교적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사대부의 입장이 대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朱碩煥, 앞의 글, 109∼110쪽).
0497)≪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0498)도현철, 앞의 글(1993), 202쪽.
0499)≪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0500)이 점에 대해서는 李泰鎭,<14·15세기 農業技術의 발달과 新興士族>(≪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8) 참조.
0501)이인임정권의 권력독점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朴天植,<高麗 禑王代의 政治權力의 性格과 그 推移>(≪全北史學≫4, 1980).

高惠玲,<李仁任政權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91, 1981).

盧明鎬,<高麗後期의 族黨勢力>(≪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한울, 1990).

姜芝嫣,<李仁任 執權期 政治勢力과 政局動向>(≪梨花史學硏究≫22, 1995).
0502)≪高麗史≫권 111, 列傳 24, 金續命.
0503)羅鍾宇,<高麗末期의 麗·日 관계-倭寇를 중심으로->(≪全北史學≫4, 1980), 62쪽 참조.
0504)이인임 등이 원과의 관계개선을 꾀한 배경에 대해서는 高惠玲, 앞의 글(1981), 24∼25쪽 참조.
0505)≪高麗史節要≫권 30, 신우 원년 5월.
0506)≪高麗史節要≫권 30, 신우 원년 6월.
0507)≪高麗史節要≫권 30, 신우 원년 7월.
0508)이상과 같은 신진사대부의 복권과 정치활동에 대해서는≪高麗史節要≫권 30, 신우 3년 9월·권 31, 신우 8년 4·6월 및 권 32, 신우 9년 정·2·3·8월·10년 정·7월·12년 2·4·9월·14년 정월 참조.
0509)韓永愚,≪鄭道傳思想의 硏究≫(서울大 出版部, 1983), 25∼26쪽.
0510)≪高麗史≫권 116, 列傳 29, 南誾.
0511)≪高麗史≫권 118, 列傳 31, 趙浚.
0512)韓永愚,<朝鮮建國의 政治·經濟基盤>(≪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3 ;≪朝鮮前期社會經濟硏究≫, 乙酉文化社, 1983, 18쪽).
0513)홍영의, 앞의 글(1995), 79쪽.
0514)李景植,<高麗末의 私田捄弊策과 科田法>(≪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86), 66∼83쪽.
0515)≪高麗史節要≫권 34, 공양왕 원년 4월.
0516)禑昌非王說의 실체에 대해서는 朴亨杓,<朝鮮建國에 대한 是非>(≪學術志≫8, 建國大, 1967) 및 尹斗守,<禑昌非王說의 硏究>(≪考古歷史學志≫5·6, 1990) 참조.
0517)≪高麗史節要≫권 34, 신창 원년 11월.
0518)도현철,<高麗末期 士大夫의 理想君主論>(≪東方學志≫88, 1995), 14∼21쪽.
0519)≪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원년 12월 기해.
0520)李亨雨,<鄭夢周의 政治活動에 대한 一考察-恭讓王代를 중심으로->(≪史學硏究≫41, 1990), 73쪽.
0521)尹彛·李初사건의 발생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趙啓纘,<朝鮮建國과 尹彛·李初事件>(≪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7) 및 李亨雨, 위의 글 참조.
0522)趙啓纘, 위의 글, 455∼456쪽.
0523)≪高麗史節要≫권 34, 공양왕 2년 8월.
0524)李亨雨, 앞의 글, 90∼95쪽.

劉璟娥,≪鄭夢周의 政治活動硏究≫(梨花女大 博士學位論文, 1996), 141∼144쪽.
0525)≪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11월 갑오.
0526)趙啓纘, 앞의 글, 457∼461쪽.

李亨雨, 앞의 글, 90∼94쪽.

홍영의, 앞의 글(1995), 76∼77쪽.
052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0528)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신진사대부의 정치노선과 사상경향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鄭求福,<雙梅堂 李詹의 역사서술>(≪東亞硏究≫17, 西江大, 1989).

李楠福,<騎牛子 李行연구-고려말·조선초 사대부의 거취에 대하여->(≪東義史學≫6, 1991).

劉璟娥,<麗末鮮初 李詹의 정치활동과 사상>(≪國史館論叢≫55, 1994).

金貞子,<騎牛子 李行(1351∼1432)의 생애와 학풍>(≪釜大史學≫19, 1995).
0529)≪高麗史≫권 117, 列傳 30, 成石璘.
0530)金貞子,<소위 ‘杜門洞72賢’의 정치성향>(≪釜大史學≫15·16, 1992).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