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명학소민 봉기의 의의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는 무신정권 이후 남쪽에서 일어난 민란 중 상당히 대규모적인 것으로서 고려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신정권의 초기 단계인 이의방정권이 끊임없는 사원세력의 반발과 서북민의 항쟁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함으로써 불안했다면, 그 뒤를 이은 정중부정권은 이 명학소민의 봉기와 서북민의 항쟁이 가져다 준 여파로 그 체제가 흔들리게 되어, 드디어 경대승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무신정권 초기 단계에서 집권체제가 정비되지 않았으므로 정중부정권이 지니는 무신연합정권의 취약성을 부인할 수 없으나 고려사회에서 피지배층의 봉기가 지배계층을 무너지게 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명학소민의 봉기를 진압한 후, 정부는 이것이 소민에 한정되지 않고 농민층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데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일반 백성들을 진무하기 위해서 미봉적인 조처나마 각지에 찰방사를 보내어 지방관의 탐학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권 자체의 도덕성이나 권세가의 탐학은 그대로 두고 지방관만을 속죄양으로 삼는 자체가 무리였고, 또한 찰방사가 정말 농민들을 위해 제대로 파악했는지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왕은 찰방사가 압송해 온 贓吏 35명을 즉석에서 풀어주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불과 수년 이내에 모두 사면하여 복직시켰다.
사실 당시 고려사회로서는 수취체제의 개혁이나 중앙 권세가들의 탐학 등 근본적인 문제들을 도외시하고 지방관의 청렴만을 요구하는 자체가 무리였다. 더구나 각 지역의 지방관들 자신이 중앙의 권세가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상례였다면, 탐학한 지방관을 제거하는 사실 자체가 개경권세가들의 세력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했으므로, 장리들 전원을 무죄 방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농민·천민 등 피지배층이 목숨을 걸고 봉기한 대가는 유명무실해졌고 지방관의 탐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즉 명종 12년(1182) 이후에 일어나는 관성·부성·전주 그리고 안동 등지에서의 민란은, 그 발발 동기가 지방관의 탐학한 수탈을 이기지 못하여 봉기하게 된 것들로서 정부의 시책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정부는 아래로부터의 돌출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압적으로 억압하는 통치체제를 강구하였으니, 이것이 후일 이의민에 이은 최충헌의 독재체제를 낳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두번째 조처는 권세가의 토지침탈 방지, 공부의 균등 배분·조세 탕감 등의 경제적인 배려였다. 고려사회는 예종대 이후 유민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는데 유민의 발생이 경제적인 면에서 일반 농민들의 소극적인 조세저항운동이라면 농민봉기는 보다 적극적인 저항형태였다. 정부에서는 백성들을 안무하기 위해 감무를 파견하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정책들을 실시하였다. 그 내용은 조금 후기의 사료이기는 하지만 명종 18년 3월의 조서에서 정부가 의도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① 명종 18년 3월에 制하기를‘무릇 州縣에는 각기 서울과 지방에 양반과 군인의 家田 및 永業田이 있는데, 이에 간교한 吏民이 있어 權要家에 의탁하고자 망녕되이 閑地라 칭하여 권세가의 이름으로 등기하였다. 권세가 또한 자신의 가전이라 칭하고는 公牒을 취하고자 즉시 사환을 보내어 편지를 써서 부탁하니 … 이 사환을 잡아 칼을 씌워 서울에 신고하고 등기한 이민은 끝까지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柴科).
② 명종 18년 3월에 制하기를, ‘여러 州·府·郡·縣의 백성들은 각기 貢役이 있는데, 이래로 外官 員僚들이 使令에게 슬쩍 부탁하여 役價를 받고 그 貢賦를 여러 해 동안 면제시켰다. 그러자 아전의 무리들이 모두 이런 식을 따르게 되어 역이 고르지 않게 되고 있다.…공역을 균등하게 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③ 명종 18년 3월에 下制하기를,‘각 지역의 부강한 양반들이 가난하고 약한 백성들이 빌린 것을 갚지 못하면 옛부터 내려오던 丁田을 함부로 빼앗으니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더욱 가난해졌다. 富戶는 겸병과 침탈을 하지 말며 빼앗은 토지는 각기 그 본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
명종 18년은 명학소민의 봉기를 진압시킨 지 이미 10년이 지난 시기였다. 이 이후에도 소규모나마 민란이 계속 일어나 정부로서는 일반 백성들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위의 내용이 오직 명학소민의 봉기의 결과라고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명학소라는 특수 천민 집단에서 야기된 민란에 농민이 가세하여 상당히 큰 규모로서 충청도 전역을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리라는 인식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
위의 사료 ①과 ③은 권세가의 토지겸병을 막기 위한 조처이며 ②는 貢役을 균등하게 시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백성들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책이 되지 못했음은 당연하다. 예컨대 ①의 경우를 보면 토지겸병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권세가인데, 그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환과 이민에게만 죄를 물었다. 대토지 소유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권세가들의 권익을 침탈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방지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③에서 정부는 농민들이 짊어진 빚을 해결해 주기 위한 어떤 대안도 없이 양반들에게 무조건 땅을 돌려주라고 했다. 이는 실현성이 희박한 것으로, 부강한 양반이 약한 백성들에게 토지를 돌려주게끔 만드는 어떤 제도적 장치도 없이 실제로 행해질 수 있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이후에도 계속 대토지소유자에게 토지를 본주인에게 돌려주라는 정부의 조칙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려사회 체제를 뒷받침하고 있는 권력자들을 부정하지 않고는 실시될 수 없는 것으로 근본적인 한계성를 지니고 있었다. ②는 지방관이 役價를 선납한 자에게 공역을 면제시켜 나머지 주민들이 과중한 역을 부담하게 되었으므로 잘못 부과된 공역을 시정하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이러한 국왕의 일시적인 조서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국왕은 조서를 내리기만 했을 뿐 적극적으로 개선시키려는 의지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농민들의 봉기로 인해서 정부는 농민들을 인식하게 되었고, 피지배층은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의 요구를 강력하게 나타내게 되었다는 점에서, 명학소민 봉기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유감스러운 점은 소와 같은 천민들을 위한 시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고려사회는 향·소·부곡 등 천민지역이 점차 해체과정을 거쳐, 고려 말기에는 이것이 거의 없어졌으며, 조선시대에 가서는 완전히 소멸되어 군·현과 같은 일반 행정구역에 편입되었다. 고대적인 잔재를 극복하게 한 이같은 사실은 고려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명학소민의 봉기가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봉기에서 또 하나의 의의는 망이라는 천민출신의 지도자가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이후에 일어났던 만적의 난의 효시가 된 듯하며, 그들의 목표가 신분해방을 거쳐 정부타도를 표방한 점에서는 경주민의 항쟁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