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
가. 명학소민의 1차 봉기
북쪽에서 서북민의 항쟁이 치열할 즈음 이번에는 남쪽에서 농민·천민들이 봉기하였다. 명종 6년(1176) 정월에 公州 鳴鶴所에서 시작된 봉기는 천민집단인 所에서 발생하였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우선 소의 성격을 간단히 알아보자. 소의 기원에 관해서는 다음의 사료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에서 주·군을 설치할 때 그 田丁·호구가 현이 되지 못하는 것은 鄕이나 部曲을 두어 그 곳에 있는 읍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는 또 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金所·銀所·銅所·鐵所·絲所·紬所·紙所·瓦所·炭所·鹽所·墨所·藿所·瓷器所·魚梁所·薑所의 구별이 있어 각각 그 생산물을 공급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7, 京畿道 驪州牧 登神莊).
고려시대의 지방제도는 각지에 존재하던 동족집단을 신분적 계층적으로 편성한 것으로서 향·부곡처럼 소가 군현제의 일환으로 편성된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런데 향·부곡이 농경을 주업으로 했던 데 비해 소는 금·은·동·자기 등 특수공물을 생산하였다. 그러므로 농경을 주산업으로 하고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려사회에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은 소에게 집중적으로 요구되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소는 국가의 대안없는 수탈체제에 시달려 왔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현종대 이후는 거란과, 인종대 이후는 여진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고려정부가 이들 국가에 많은 공물을 바쳐야 했던 대외관계 역시 소민의 수탈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소를 기반으로 발달하는 수공업이 국가의 소에 대한 맹목적 수탈체제에 시달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음에 비해 농업은 상당히 발전하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고려 전기에는 一易田·再易田이 많아 常耕田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다고 보여진다.128) 그러나 인구의 증가·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점차 상경전이 증가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문종대 이후의 통치기구 체제의 완비, 문물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이를 토대로 중세사회에서 생산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농경도 상당히 진척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고려 토지제도사 연구에 관한 여러 학설에 따르면 結負制는 농산물의 소출을 기준으로 마련한 제도(면적의 단위)로서 그것이 실제의 면적을 표시하는 頃畝法과 일치하여 고려 중기 이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후기 언제부터인지 그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隨等異尺制라는 새로운 量田法이 채택되어 결부제의 내용에 큰 변동이 생겼다. 이같은 변화는 경지 일반이 휴한농법의 단계를 지양하여 常耕化하고, 다시 그 상경화한 토지가 비척도에 따라 소출액에 차등이 있었다는 사실의 전제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129) 특히 무신정권 전후의 혼란기와 원 간섭기에는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가중되고 있어서 생산계층으로서의 농민층에게는, 休耕을 통한 농지 경영의 소출을 넘어서는 토지생산력의 증대가 요청되고 있었다.130) 이같은 농경의 발전은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상경화는 고려 중기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상경전의 확대로 인해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의 생활은 점차 향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토지생산력이 증가하여 일정한 수익이 보장되자 지배층은 그들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 토지겸병에 착수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은 이자겸이었다. 이 이후에도 권세가들은 탈점·매매·기진·개간 등 여러 형태를 통하여 민전을 탈취하였는데, 이로 인해 고려사회는 지주와 전호 혹은 전호도 되지 못하고 토지로부터 유리되어 떠돌아 다니는 유랑민 등 여러 계층으로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무신정권이 성립된 이후에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가속화되는 형편이었다. 이같은 농경사회의 분화로 인해 토지를 잃어버린 농민층의 불만과 국가의 직접 수탈체제에서 벗어나고자했던 소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합세하여 드디어 명학소민의 봉기를 낳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처음 명학소민이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료가 전한다.
公州 鳴鶴所 사람 亡伊·亡所伊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山行兵馬使라고 스스로 칭하고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정부는 祗候 蔡元富와 郎將 朴剛壽 등을 보내어 달래었으나 적은 따르지 않았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6년 정월).
위의 기사 내용으로서는 난이 어떤 연유로 발발되었는지 구체적인 실상은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민란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그 지역의 토호나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이 원인이었는데 대표적인 경우로서 명종 12년(1182)에 일어났던 管城·富城 그리고 全州民의 봉기를 들 수 있다. 물론 이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 근본 원인은 국가의 대민수탈체제에 대한 반발, 피지배층 의식의 향상, 지배층의 변화로 인한 중앙집권체제의 약화 등 내부적으로 잠재된 고려사회의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 봉기하게 되었지만, 그 중에서 특히 지방관의 수탈로 인한 반발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들 반란은 대체로 탐학한 지방관을 교체하고 백성들을 진무함으로써 진압되었다. 그런데 이들 농경민이 지방관의 직접 통치 하에 있었으므로 지방관아에 일차적으로 대립하는 형세를 보임에 비해 所는 중앙정부의 직접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131) 명학소의 봉기는 바로 중앙정부에 대립되는 형태로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났던 반란의 주모자는 망이·망소이었다.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世宗實錄地理志≫姓氏條에 亡氏가 보이지 않으므로 망이를 이름으로 본다면 추측컨대 천민, 즉 所民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명학소는 어떤 소였는지 확실하지가 않다.132) 현재 대전지역인 이곳은 토지가 척박하고 지하자원이 전혀 생산되지 않으며 바다도 없는 것으로 보아 수공업집단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봉기에서 그 도화선이 되는 사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것이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분노에 의해 폭발된 것이 아니고 서북민의 봉기나 경주지역 농민항쟁처럼 미리 계획된 것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일시적인 감무 파견 등으로 회유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수취체제의 변화나 신분구조의 개편 등 국가적인 큰 변혁을 통해서가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 점이 명학소민의 봉기가 명학소라는 일정한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주변 백성들의 호응을 받을 요소가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또한 이들의 봉기가 장기화될 것을 시사하는 점이기도 하였다.
이들이 봉기했을 때 소민뿐 아니라 주변 농민들도 적극 호응하였다. 망이·망소이가 이끄는 명학소민이 일어나서 바로 공주를 함락시켰다는 사실은 주변 농민들의 호응이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는 국가나 지방관의 수탈과 더불어 권세가의 대토지겸병에 대한 농민의 불만이 표면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명학소민의 봉기는 천민집단이라는 지엽적인 이해관계를 지나 일반 농민에게까지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부는 지후 蔡元富, 낭장 朴剛壽 등을 파견하여 진무하였으나 빈민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이번에는 3,000명의 군대를 보내었다.133) 그러나 관군이 반민들에게 번번이 참패를 당하니, 놀란 정부는 명학소를 忠順縣으로 승격시켜 회유하였다.134)
충순현으로의 승격은 국가의 기본정책에 위배되는 조처였다. 고려정부의 향·소·부곡과 같은 천민집단에 대한 대책을 보면, 유공자의 출신지역은 군·현으로 승격시키고 그 반대되는 경우에는 군·현을 부곡·소 등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상례였다. 위기감을 느낀 고려정부는 명학소를 승격시켜서라도 봉기의 확산을 막으려고 했지만 사실은 국가적 지배질서의 원칙을 정부에서 먼저 무너뜨림으로써, 이제 백성들이 힘을 앞세워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쟁취하려고 할 때에는 정부도 양보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어 피지배층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이를 통해 이제 피지배층은 국가의 직접 수취대상인 소가 원래부터 있었고 또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지배질서의 일환으로 존재했을 뿐임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명학소민의 봉기는 소민들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주변의 농민들이 가세하여 세력이 커졌으므로, 망이를 위시한 명학소민들이 현으로의 승격에 만족하여 봉기를 그만두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될 수는 없었다. 또한 정부의 말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문제였다.
다음의 사료는 반민의 계통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있으며, 또한 이들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지배층 내부의 불만세력들이 이에 동조하는 등 양상이 복잡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① 南賊이 禮山縣을 함락시키고 監務를 죽였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6년 9월 신해).
② 良醞令同正 盧若純과 主事同正 韓受圖가 (咸)有一 및 平章事 李公升·內侍郞將小監 獨孤孝 등을 사칭하고 편지를 써서 忠州賊 亡伊에게 보내니 망이가 그 使者를 붙잡아 安撫別監 盧若冲에게 보내었다(≪高麗史≫권 99, 列傳 12, 咸有一).
③ 南賊首의 우두머리 孫淸이 스스로 兵馬使라 칭하였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6년 11월 임인).
④ 大將軍 鄭世猷와 李夫를 處置兵馬使로 삼아 좌우도로 나누어 가서 남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정세유 등이 開國寺 문 앞에 모여 군사를 훈련한 지 달포가 지난 후에 떠나갔다(≪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6년 12월 경자).
망이 등이 충주까지 점령하였음에도 정부의 회유로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양온령동정 노약순과 주사동정 한수도가 농민군에게 가담하려고 시도한 사건이 일어났다. 농민·천민 못지 않은 고려사회의 불만계층은 동정직 소유자들이었다. 고려시대의 동정직은 정직에 준하여 설치된 산직으로서, 그에 보충되는 자들은 대기하였다가 규정에 따라 실직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관료층이 팽창하여 동정직 散官들이 희망하는 실직으로의 진출은 어려워졌으며 인종대에 이미 한계에 달하였다.135) 결국 동정직 소유자들은 지배층인 관인층에 속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고 이러한 불만으로 피지배층과 이해가 접근될 수 있었다.136) 그러나 망이 등은 관인층의 제휴 요청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명학소민은 使者를 붙잡아 관군에게 넘겨줌으로써 그들과 연합할 의사가 없음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이같은 행위는 정부가 명학소를 현으로 승격시켜 주는 것이 확실하다면 더 이상 진격할 의사가 없음을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때 명학소민이 아닌 또다른 南賊이 보인다. 위의 사료에 의하면 남적이 예산현을 함락시키고 감무를 죽인 기록이 나오며, 그로부터 두 달 후에는 손청이 병마사를 칭하였다고 한다. 예산현의 남적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지만 명종 7년(1177) 2월에 伽倻山의 적괴 손청을 죽였다는 기록에서 예산을 중심으로 한 가야산 일대는 손청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손청 등은 명학소민이 봉기하여 공주지역이 소요에 휩싸인 틈을 타서 예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가야산을 거점으로 영역을 넓혀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망이 등은 공주의 동북쪽으로 나아가 충주까지 영역을 확보하였다.
망이 등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소민인 데 비해 손청은 토호이며137) 또한 농민군을 이끌고 있으므로 미묘한 갈등은 예상되지만 일단 연대관계는 유지하고 있지 않았나 판단된다. 즉 그들 공동의 타도대상인 정부군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연합이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에 그들의 제휴가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망이 등이 표명한 정부군과의 화해의사는 손청을 가장 격분케 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병마사로 칭하였으며 망이 등과의 연합항쟁을 포기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그는 농민군을 지휘했던 만큼, 신분해방보다는 수탈체제의 극복이나 토지겸병으로 인한 고려사회의 모순의 극복에 더욱 초점을 두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반민들의 분열은 점차 대오를 정비하여 난을 완전히 진압하려는 정부측에서 볼 때는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정부는 우선 최초로 봉기했던 소민들을 회유하여 연합전선을 깨뜨린 후, 세력이 약화된 반민들을 각각 따로 진압하려는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같은 정부의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망이와 손청은 완전히 두 파로 나누어졌고, 이 때를 기해 중앙에서는 정세유와 이부로 하여금 각기 좌우도로 나누어 충주와 예산방면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게 하였다.
중앙에서 대군을 보내어 반민들을 진압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망이 등 은 정부에 대해 강화를 요청하였다. 명학소민이 항복했다는≪고려사≫의 저술 내용은 정부측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며, 사실은 정부와 명학소민 사이에는 강화가 맺어진 것으로 보인다. 강화를 맺은 구체적인 조건은 알 수 없으나 명학소민은 충순현으로의 승격과 지방관 파견에 만족하여, 정부가 반민에게 보복하지 말고 생업을 보장하라는 정도였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봉기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128)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經理 문종 8년 3월. 李齊賢,≪益齋亂藁≫권 9, 史贊 景王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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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 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80쪽. |
130) | 후대의 사료지만≪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조 趙浚의 1차 상소문에 의하면‘兼倂之家’가 收租하면서 1결을 3∼4결로 늘려 잡았다고 한다. 이는 조준이 당시의 부패한 사회상을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一易田·再易田 따위가 常耕田으로 변천함에 따라 일어날 수 있었던 사실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金泰永,<科田法體制下의 土地生産力과 量田>,≪韓國史硏究≫35, 1981, 50쪽 참조). 또한 이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라고 할 수 없지만 우왕대에 伊金이라는 사람이 彌勒佛로 자칭하면서 민심을 선동한 기사가 남아 있는데, 이 내용에는 당시 백성들의 바라는 바가 축약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즉 농경에 가장 중요한 소·말을 잡아먹지 말 것과 부의 공평한 분배, 그리고 한 해에 두 번 수확을 거두었으면 하는 이모작에 대한 꿈이 나타나고 있다. 이금은 그 시대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를 실현시킬 능력이 있는 것처럼 행세하여, 그에게 민심이 쏠리게 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미 고려 말기에 농민들이 이모작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상경전이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
131) | 北村秀人,<高麗時代の所制度について>(≪朝鮮學報≫50, 1969). |
132) | ≪新增東國輿地勝覽≫권 17, 公州牧 古蹟條에 의하면 명학소는 儒城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었다고 한다. |
133) | ≪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6년 2월 정해. |
134) | ≪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6년 6월 병술. |
135) | 徐兢,≪高麗圖經≫권 16, 官府 倉廩. |
136) | 金光洙,<高麗時代의 同正職>(≪歷史敎育≫, 11·12, 1969), 167∼169쪽. |
137) | ≪世宗實錄地理志≫권 149, 禮山縣의 土姓에 孫氏가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