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주민의 항쟁
고려시대 濟州民의 항쟁은 다른 지역의 농민·천민의 봉기에 비해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제주 즉 耽羅가 숙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독립된 나라로 존재하다가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된 독특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곳은 삼국시대인 4∼5세기에 국가가 성립하여 星主와 王子를 중심으로 하는 족장들이 다스리는 체제가 고려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토가 좁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 생산량이 충분하지 못하며, 인구 또한 적어 탐라는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탐라를 바로 병합하여 고려의 군현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그 내부의 사정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고려왕조는 광종대에 이르기까지 호족세력에 밀려 중앙 집권체제가 확립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광종의 호족 숙청작업에 의한 왕권강화책에 힘입어 점차 국가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하여 성종대에 가서 비로소 지방관을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고려는 탐라를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종 때부터 탐라를 통제하기 위해 민정을 살피는 勾當使를 파견하였으며155) 현종대에는 고려의 군현으로 간주하는 표식인 朱記를 내렸다.156)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탐라는 서서히 고려의 지배권으로 편입되어 숙종 10년(1105)에는 완전히 고려의 군현에 편입되었다.
탐라에 군이 설치되고 고려조정으로부터 직접 수령이 파견되었지만 성주와 왕자를 중심으로 하는 족장이 지배하는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묵계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시키는 대가로 고려정부는 탐라의 성주와 왕자에게 그들의 지위를 세습하는 독자적인 토착 세력권을 인정할 뿐 아니라 공물을 제외한 조세도 개경으로 보내지 않고 탐라 독자적으로 사용하도록 조처하였다.
그런데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정치·경제·형벌 등 모든 주도권을 장악하여 전횡하니, 이들과 탐라주민과의 갈등이 야기됨은 필연적인 사실이었다. 또한 이들 관리들은 탐라군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서 쉽게 드나들 수 없으므로 중앙정부의 감시가 소홀한 점, 그리고 약소국이라 볼 수 있는 탐라가 고려의 세력에 굴복하여 편입된 만큼 육지사람들의 제주민에 대한 우월감 등을 이유로 제주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함부로 수탈하였다. 그리하여 崔陟卿 등 몇몇 청렴한 지방관을 제외하고는 관리 임의대로 혹은 토호들과 결탁하여 대다수가 탐학에 열중함으로써 제주민의 항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하였던 것이다. 최초의 항쟁은 의종 22년경 良守 등의 주도로 발생하였다. 다음은 그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判吏部事 崔允儀가 그 청렴하고 정직함을 듣고 耽羅令으로 삼고자 하니 陟卿이 두번이나 外官으로 제수되므로 그 곳이 또한 궁벽하고 멀기 때문에 굳이 사양하였다. 윤의가 말하기를,‘耽羅는 지역이 멀고 풍속이 거칠어서 수령이 다스리기가 실로 어려운 까닭에 그대로써 보임시키고자 한다. 다행히 그대가 꺼리지 않고 가서 먼 곳의 백성들을 진무하여 나라의 근심을 없애 준다면 마땅히 좋은 직책으로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척경이 하는 수 없이 취임하여 利를 일으키고 폐단을 혁파하니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게 여겼다. 돌아오니 윤의가 이미 죽었으므로, 척경이 매우 가난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서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 때에 마침 全羅按察使가 달려와 아뢰기를,‘탐라사람들이 縣令과 縣尉의 포학에 시달려 반란을 일으켜 말하기를, 만약 척경을 현령으로 삼는다면 당장 무기를 버리겠다고 합니다’하였다(≪高麗史≫권 99, 列傳 12, 崔陟卿).
최척경이 언제 탐라현령으로 부임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으나 그를 추천했던 최윤의가 의종 16년(1162) 8월에 죽었으며, 탐라민의 봉기가 의종 21년경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 대략 동왕 15년이나 16년 봄으로 판단된다. 이들이 봉기하게 된 원인은 지방관의 가혹한 가렴주구 때문이었다. 위의 경우에서처럼 최척경이 의종 초에 京山府判官을 지낸 지 10년이 되도록 새로운 직책을 얻지 못했는데도 탐라에는 가기를 꺼릴 정도로 이곳은 관리들이 부임하기 싫어하는 지역이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탐라는 교통이 나쁘고 개경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특별히 중앙권력층과 연계되어 있지 않는 한 쉽게 잊혀져서 승진에 지장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최척경의 재부임으로 난은 중단되었지만 이를 통해 탐라민의 항쟁은 지방관의 탐학이 가장 큰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반란의 주모자는 良守였다고 한다. 양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모르나 제주의 토성인 良·高·夫의 하나인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농민반란은 토호들과 합세하여 일으켰던 것 같다. 제주 토호들이 농민들과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 배경에는 지방관의 토호에 대한 수탈과 더불어 확실치는 않으나 지방관과 결탁한 高氏를 위시한 토호세력과 良氏 세력간의 갈등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무신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탐라는 크고 작은 소요가 그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 16년(1186) 7월에 어떤 사람이 탐라가 반역했다고 고하니 왕이 안무사와 탐라현령을 새로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결국 이는 무고로 밝혀졌지만157) 이를 통해 탐라민의 고려정부에 대한 반감을 중앙에서도 감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탐라민은 이미 무신정권이 수립되기 이전인 의종대에 봉기하여 탐학한 관리를 축출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청렴한 관리인 최척경을 맞이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었음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즉 최척경처럼 청렴한 관리라면 그 직위에서 벗어나는 즉시 굶주림을 걱정해야 될 정도로 빈곤한 생활을 견디어야 했으므로, 일반적으로 관리들이 후일의 생계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수탈하여 치부하거나 수탈한 재물을 중앙에 바쳐 출세의 발판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지방관의 탐학은 관료체제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 바가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최척경과 같은 인물은 극히 드문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다수가 탐학한 관리였다고 보이지만 그렇다고 지방관이 교체될 때마다 제주민이 매번 정부를 상대로 싸우기는 힘든 일이었다. 또한 바뀐 수령이 청렴하여 백성들을 잘 다스릴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는 고려정부를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지리적인 위치와 그들의 능력으로 볼 때 고려를 타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가능한 방책은 고려왕조에서의 이탈, 즉 탐라의 독립을 갈망했으리라 여겨진다. 이같은 욕구를 달성시키기 위해 신종대에 제주민은 다시 봉기하였으니, 다음 사료를 보자.
① 耽羅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少府少監 張允文과 中郎將 李唐績을 보내어 안무하게 하였다(≪高麗史≫권 21, 世家 21, 신종 5년 10월).
② 탐라안무사 張允文·李唐績이 적의 우두머리 煩石·煩守 등이 모두 처형되었다고 아뢰었다(≪高麗史≫권 21, 世家 21, 신종 5년 12월 을해).
탐라민이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에 대한 설명이 없으나, 탐라반란의 주모자를 모두 죽이고, 주민들을 회유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방관의 탐학으로 인한 단순한 민란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앞서 의종 때처럼 지방관을 교체함으로써 수그러질 기세도 아니었고, 정부도 회유할 의사도 없었으므로 강경책으로 밀고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고 집정자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당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람은 최충헌이었다. 그는 농민·천민의 봉기를 힘으로 눌러 완전히 진압시키고 가혹하게 처단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주도권을 공고히 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진압책은 경주민의 봉기나 만적의 난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제주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위의 사료에서 정부가 10월에 안무사를 파견하여 12월에 반란의 우두머리를 처형한 것으로 보아, 신종대의 봉기는 최소한 세 달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정부에 항거한 반란민의 동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세 달 동안 버틴 것으로 보아 상당히 끈질기게 저항했으리라 판단된다. 그런데 반란의 우두머리 이름이 번석과 번수였다.≪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제주뿐 아니라 우리 나라의 어디에도 번씨 성을 가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姓이 없는 일반 양민이거나 그 이하의 신분층이었을 것이다. 앞서 의종 때의 봉기는 그 주도층이 양수 등 토호계층이었으므로 그들은 정부의 회유에 쉽게 굴복하여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에 피지배층의 불만은 그대로 쌓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무신정권을 고비로 제주도는 피지배층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난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역부족으로 패배하여 주모자가 잡혀 죽음으로써 난은 끝맺게 되었다. 이후 고려는 지방관에 의한 탐라의 통치체제를 강화시키고 토호들의 세력을 점차 약화시켰다.
탐라민의 봉기가 기대했던 바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고려왕조의 군사력에 의해 패배하니 정부의 탄압은 가속화되었을 뿐, 주민을 위한 시책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관의 탐학 또한 예전과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이후 고려는 30여 년 동안이나 몽고와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탐라는 전쟁의 참화를 입지 않아 탐라민의 행적은 전혀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탐라에 관한 기록은 몽고와 강화를 맺은 직후인 원종 초에 다시 나타난다. 원종 원년(1260)에 재물을 탐하다가 면직된 宋佋를 대신하여 判禮賓省事 羅得璜을 濟州副使로 삼았는데 그는 더욱 탐욕스러워 제주민의 고통이 가중되었다고 한다.158) 이후 원종 8년에 草賊 文幸奴가 난을 일으켰으며159) 이 난이 진압된 후 탐라는 원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종 9년(1268) 10월 원의 世祖는 14명의 사자를 고려에 보내어 南宋과 일본을 원정하는 데에 필요한 군사의 징발과 전함의 건조 상황을 점검하게 하였는데, 탐라에는 따로 배 100척을 만들도록 요구하였다. 원나라는 탐라가 일본과 가까운 만큼, 이곳을 일본을 공격하는 전초기지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제 고려가 아닌 원나라에 의한 과도한 貢役을 수탈당하게 되어 탐라민의 불만은 더욱 커지게 되었으니, 이 때 일어난 사건이 三別抄의 난이다.
삼별초는 무신정권기에 수도 개경의 치안이 악화되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해 崔瑀가 용사를 모집하여 夜別抄를 만들었는데, 이 기구가 확대되어 左別抄·右別抄가 되고, 몽고군에 잡혀갔다 돌아온 장정들의 조직인 神義軍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삼별초는 대몽항쟁의 전 시기를 통하여 무신정권의 가장 중요한 무력기반이었지만 몽고와의 전쟁에서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들은 오랜 전투경력을 통하여 몽고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컸는데 고려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니 원종 11년 6월에 장군 裵仲孫과 야별초 지유 盧永禧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들이 봉기하게 된 궁극적 목적은 몽고에 의한 고려의 종속화를 방지하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고려왕실이 몽고에 굴복했으므로 고려정부도 인정할 수 없다하여 삼별초정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삼별초는 정부 및 몽고군에 대한 항전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근거지를 강화도로부터 珍島로 옮긴 후, 그 해 11월 제주를 함락시켰는데 다음 내용으로서 제주민의 향배를 잘 파악할 수 있다.
(김수는) 抄軍을 거느리고 耽羅에서 高汝霖을 만났는데, 이 때 적은 珍島를 지키느라고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이에 밤낮으로 보루를 축조하고 병기를 마련하여 삼별초군이 도래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이곳을 지키는 주민들이 머뭇거리며 협력하지 않아 그들이 오는 길을 차단하지 못하였다. 김수는 평소 大義로서 사람들을 격려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격하고 그 勇力도 백배하였다. 싸움에 임해 적의 선봉부대는 거의 섬멸하였으나 주민들이 그들을 도왔으므로 결국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고여림과 함께 적진에서 敗沒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崔瀣,≪拙藁千百≫권 1,<金文正公墓誌>;≪高麗名賢集≫2,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所, 1980, 401쪽).
제주를 장악하기 위한 관군과 삼별초군의 치열한 전투는 결국 제주민의 향배에 따라 삼별초의 승리로 끝맺었다. 관군이 이기지 못했던 원인은 군사수의 열세라기보다는 제주민이 모두 삼별초에 호응하여 그들을 도왔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삼별초에 대한 적극적인 호응은 제주민뿐만 아니라 전라도·경상도 주민과 개경의 노비에서도 엿볼 수 있다.160) 이에 따라 삼별초는 남쪽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여·몽 연합군과 계속 항쟁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제주도민으로서는 그들이 삼별초와 제휴함으로써 막강한 힘을 소유하게 되어 고려정부와 외세를 배격하고 명실공히 그들이 바라던 독립까지 쟁취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삼별초는 그 이듬해인 원종 12년(1271) 5월, 金方慶·忄斤都·洪茶丘가 이끄는 여·몽 연합군의 치열한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당하게 되니 주력부대를 탐라로 이주시켰다. 비록 진도에서의 참패로 인해 지리적으로 교통의 요지인 진도를 빼앗기고 난을 주도했던 배중손이나 왕으로 추대했던 溫이 죽임을 당하였지만, 金通精을 우두머리로 한 남은 삼별초군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이 여·몽 연합군이라는 대규모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항쟁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보다도 제주민의 전폭적인 지지와 호응에 연유하는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탐라로 근거지를 옮긴 후에도 맹활약을 전개하여 번번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공격하였으며 심지어는 충청남도의 安行梁을 거쳐 북쪽으로 진격함으로써 개경정부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러나 원종 14년(1273) 2월, 병선 160척 수륙군 1만 명을 거느린 대규모의 여·몽 연합군이 탐라를 공격하였다. 삼별초는 항파두리성을 중심으로 끝까지 저항하며 무려 3개월이나 버티었으나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삼별초의 항쟁은 일어난 지 4년만에 진압되었다. 이로써 고려정부는 이 전쟁을 통하여 외세와 연합하여 반원세력을 제거한 결과가 되었고 탐라는 이제 독립국이 아닌 원의 직속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