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2. 농민·천민의 봉기2) 무신정권 성립기의 농민·천민봉기(5) 운문·초전민의 봉기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1. 신분제의 동요
          • 1) 신분제 동요의 배경
          • 2) 양인·천인의 신분이동
            • (1) 양인·천인의 신분상승
            • (2) 양인의 신분하락
            • (3) 이성계 일파의 집권과 양인·천인의 신분고정
          • 3) 향리 및 양반귀족의 신분동요
            • (1) 향리의 신분동요
            • (2) 양반귀족의 신분동요
        • 2. 농민·천민의 봉기
          • 1) 농민·천민봉기의 배경
            • (1) 중앙 통치체제의 문란
            • (2) 지방관의 탐학
            • (3) 대토지겸병의 확대
            • (4) 신분제의 동요
          • 2) 무신정권 성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1) 서북지역의 농민봉기
            • (2)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
            • (3) 관성·부성·전주 등에서의 농민봉기
            • (4) 제주민의 항쟁
            • (5) 운문·초전민의 봉기
          • 3) 무신정권 확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1) 만적의 난
            • (2) 진주민의 항쟁
            • (3) 경주민의 항쟁
          • 4) 외세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1) 거란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2) 몽고 1∼3차 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3) 몽고 6·7차 침입기의 농민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1) 몽고족의 흥기와 여·몽관계의 성립
            • (1) 13세기 몽고족의 흥기
            • (2) 몽고군의 고려 입경
            • (3) 강동성 전투와 여·몽관계의 성립
          • 2) 몽고의 고려 침입
            • (1) 몽고의 침략
            • (2) 최씨정권의 강화천도
            • (3) 몽고의 2·3차 침입
            • (4) 여·몽전쟁의 장기화
          • 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
            • (1) 살례탑군에 대한 항전
            • (2) 당고군에 대한 항전
            • (3) 야굴군에 대한 항전
            • (4) 차라대군에 대한 항전
            • (5) 고려의 입보책과 지방민의 항전
          • 4) 삼별초의 대몽항전
            • (1) 몽고와의 강화
            • (2) 삼별초의 봉기
            • (3) 삼별초의 진도 항전
            • (4) 삼별초군의 제주도항전
        • 2. 여·원관계의 전개
          • 1) 원의 간섭과 자주성의 시련
            • (1) 몽고제국 지배체제로의 편입과정
            • (2) 몽고제국 지배체제하의 고려왕조
            • (3) 여·원 양국간의 인적·물적 교류
          • 2) 북방문제
            • (1) 심양로의 심왕
            • (2) 동녕부
            • (3) 쌍성총관부
        • 3. 고려 말의 정국과 원·명 관계
          • 1) 원의 쇠퇴와 공민왕의 반원정책
          • 2) 공민왕의 개혁정치 실패와 명의 흥기
          • 3)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과 요동정벌
        • 4. 홍건적과 왜구
          • 1) 홍건적
            • (1) 원의 쇠퇴와 홍건적의 대두
            • (2) 홍건적의 침입
          • 2) 왜구
            • (1) 왜구의 성격과 규모
            • (2) 왜구의 침구목적
            • (3) 왜구의 침입
            • (4) 왜구에 대한 대책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5) 운문·초전민의 봉기
가. 명종 14년 이후 각지의 소요

 명종 14년(1184), 李義旼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농민봉기는 계속되었다. 무신집권기에 들어서서 더욱 심각해진 중앙정치의 혼란은 이의방·정중부·경대승에 이어 이의민이 등장한 이후에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명종 16년에 校尉 張彦夫 등 8명이 모반을 계획하다가 붙잡혔는데 그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정권을 잡은 자들은 비루하고 욕심이 많아 銀을 매우 좋아하여 벼슬자리를 팔아먹으며 불법한 행동을 많이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목을 잘라 그 입에다 은을 물려가지고 朝野에 널리 보임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은을 탐내다가 죽은 것을 알게 하려고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6년 정월).

 교위는 6위에서 정9품의 최하급 군인장교로서 일반 병사에 준하는 낮은 대우를 받은 직책이었다. 하급군인들은 무신의 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만큼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의 처우가 나아질 것을 기대하였는데 권세가들이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하여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모반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지방뿐 아니라 개경 내부에서도 반란의 기운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신집정자의 탐학은 지방관의 가렴주구를 방치하게 만들어 같은 해 7월 晋州와 安東에서도 농민봉기가 모의되었다.

진주수령 金光允과 안동수령 李光實은 모두 욕심이 많아 가혹하게 재물을 긁어 모았으므로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여 반역을 모의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6년 7월 정유).

 이 계획은 정부가 두 수령을 贓罪로 유배시키고 주민들의 반란모의는 문책하지 않았던 까닭에 그대로 가라앉았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나 이듬해 6월에는 가혹한 감찰로 吏民의 재산을 약탈하며 뇌물을 많이 받은 慶尙州道按察使 崔嚴威가 탄핵을 받았고, 동왕 20년에는 충주목사 鄭元獬가 백성에 대한 수탈이 심하여 충주민의 고소로 관직을 파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낸 사건이 있었다. 또한 명종 17년 9월 초에는 서북지방의 順州 歸化所에 안치된 賊 수백 명이 흩어져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감행하였다가 병마사에 의해 잡힌 기록이 보인다. 귀화소에 안치된 적이 고려에 침입했다가 포로로 잡힌 이민족인지 서북지방에서 봉기했던 농민들인지 그 실상은 알 수가 없으나, 국가는 이들을 일정한 지역에 예속시켜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의민 정권기에 일어난 가장 대규모의 농민항쟁은 명종 23년의 金沙彌와 孝心으로 대표되는 雲門·草田民의 봉기였다. 이미 명종 20년부터 경주를 중심으로 경상도지역에 빈발했던 소요는 정부의 회유책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중앙에서 군대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항쟁이 계속되다가 23년에는 경상도전역이 반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들이 봉기하게 된 원인을 경상도 지역에 한정시켜 살펴보겠다.

 경상도 지역은 墾田結數에 비해 인구가 많아 농민들의 생활은 상당히 어려웠다고 보여진다. 그러면 여기에서 경상도와 다른 지역간의 경제적 조건을 파악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간전결수와 인구수를 살펴보자.161)

지방 地理志

墾田結數
1戶當 結數 1口當 結數 실제 각 고을

統計結數
京畿道

忠淸道

慶尙道

全羅道

黃海道

江原道

平安道

咸吉道
200,347

236,300

301,147

277,588

104,772

65,916

308,751

130,413
20,882

24,170

42,227

24,073

23,511

11,084

41,167

14,739
50,352

100,790

173,759

94,248

71,897

29,009

105,444

66,978
9.59(9.30)

9.78(9.77)

7.13(6.19)

11.53(11.0)

4.46(9.52)

5.95(5.95)

7.50(7.57)

8.85(8.85)
3.98(3.86)

2.34(2.34)

1.73(1.50)

2.95(2.80)

1.46(3.11)

2.27(2.27)

2.93(2.96)

1.95(1.95)
(194,270)

(236,114)

(261,438)

(264,268)

(233,880)

(75,908)

(311,770)

(130,406)
1,625,234 201,853 692,477 8.05(8.10) 2.35(2.46) (1,688,054)

<표 1>

*( )는 실제 각 고을 결수에 대한 통계.

 위의<표 1>에 의하면 호당 평균 간전결수가 많은 지역의 차례는 전라도·충청도·경기도의 순이며, 적은 도의 순서는 강원도·경상도이다. 1인당 간전결수는 경기도·전라도·평안도의 순서로 많으며 적은 도는 경상도·함길도의 차례였다. 함길도와 강원도는 원래 산이 많으며 토지가 척박하여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미흡한 지역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이곳을 제외하고 비교해 보면 경상도가 평안도에 이어 두번째로 넓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구는 경상도가 다른 지역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밀하였다.

 따라서 경상도 지역이 결당 인구밀도가 가장 높아 소규모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작농이나 전호가 많았으리라고 짐작된다. 이에 농민들은 생산기술을 발전시켜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높임으로써 그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명종 19년부터 25년까지의 잇따른 흉년,162) 지방관의 탐학, 높은 인구밀도는 그들의 노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지역적으로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조세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경비도 과중한 형편이었다.163)

 이같은 상황에서 이의민은 명종 14년(1184)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자 그의 친족들이 중심이 되어 경주 영역내에 농장을 만들었다고 짐작된다. 그의 토지겸병은 명종 19년부터 해마다 계속되는 천재지변과 더불어 농민을 압박하여 경주민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한편 지방관은 각 지역에 할당된 조 세를 충당하기 위해 농장에 소속되지 않은 소농들에게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시켰다.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소극적인 조세저항운동으로써 유랑민이 되었다가 이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뭉쳐 중앙정부에 대항할 역량이 확보되니 급기야는 농민봉기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명종 23년의 김사미와 효심으로 대표되는 농민봉기 이전에 이미 명종 20년부터 경주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이들의 봉기 원인은 일반적인 민란처럼 권세가의 토지겸병으로 인한 유민의 증가와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에 견디지 못하여 일어나게 된 것으로, 치밀한 계획하에 봉기했다기보다는 우발적으로 발발하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들이 일단 봉기하자 같은 처지에서 신음하던 주변 농민들의 적극적인 가담에 힘입어 경주전역으로 확산되었다.164)

 경주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는 여느 민란에서도 늘 그렇게 했던 것처럼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였다. 즉 사자를 보내어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여 경주민의 마음을 달래어 정부에 대한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씀과 동시에 안찰사로 하여금 반민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경주민의 반란은 더욱 확산될 뿐 조금도 진정되지 않아, 안찰사가 거느린 군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참혹한 패배를 당하였다. 이같은 패배는 안찰사가 거느린 군대인 주현군의 대다수가 농민들이었으므로 적극적인 토벌의사가 없었음에도 기인한다고 보겠다. 경주민이 정부의 설득에 동요하지 않고 더욱 강경해진 이유는,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중앙에서 사자를 보내면서도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지방관에 대한 문책이나 수탈에 대한 방지책이 없었다는 것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국왕은 조서를 내려 탐욕스러운 지방관의 출척을 다짐하였으나,165) 지방 수령의 탐학은 중앙과 연계되는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제대로 시행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정부는 이번에는 중앙군을 보내어 반민을 진압하려고 애썼으나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하였다.

 경주지역의 소요는 당시 집정자였던 이의민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들 수 있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의민은 경대승이 집권한 기간 동안 경주에 은둔하면서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그 결과 경대승이 죽은 후에 바로 중앙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상경한 이후에도 이곳을 계속 그의 토착적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경주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사실은 피지배층의 그에 대한 반감도 일조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농민들은 경주가 본향이며 신분적으로는 그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낮은 이의민이 정권을 장악하자 크게 충격을 받고 고무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들도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정치적 실력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더불어 그의 피지배층을 위한 적절한 시책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층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이전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토착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토지겸병을 자행하자 그들도 힘만 있으면 이의민처럼 될 수 있겠다는 자각과 더불어, 농민봉기의 불길이 번져나가게 되었다.

 이같은 피지배층의 봉기에 토호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자신에게 화가 미치지 않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한 농민들의 기세가 두려워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의민 정권에 뚜렷한 애착을 갖고 있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경주는 옛신라의 수도로서 다른 어느 곳보다도 자부심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 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통일을 이룩하자 6두품 계열의 경주 지식층이 중앙에 진출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무신들이 정권을 전담하면서 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경주 지배층의 무신들에 대한 거부감은 자신들의 이해와도 관련되는 뿌리깊은 것이었다. 더욱이 명종 3년에 金甫當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전의 국왕이었던 의종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점도 이의민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여 토호들이 농민봉기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게 만들었다.

 ≪慶州先生案≫에 의하면, 정부는 명종 20년(1190) 봄에 농민봉기의 진압에 실패한 周惟氐를 대신하여 玄德秀를 안찰사로 파견하였다.166) 현덕수는 조위총이 봉기하자 서북 지역의 대다수 성이 모두 호응하여 일어났을 때, 끝까지 그에게 굽히지 않음으로써 정부가 이 난을 진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정부는 농민군과 대치한 경험이 풍부한 현덕수를 경주에 보내어 탐욕스런 지방관을 출척하고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둔 것 같지는 않다. 현덕수가 延州에서 성취한 전공은 그의 능력보다는 토착적 기반에 근거한 바가 컸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그로부터 불과 네 달 후인 같은 해 12월에 중앙에서 다시 군대를 파견해야만 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후 농민군의 행방은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정부군에 의해 패하여 죽거나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졌으며 일부 농민들만 계속 저항하기 위해 운문산에 숨어든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방어하는 소극적인 대응을 할 뿐, 전멸을 당할 우려가 있는 적극적인 대항을 회피함으로써 농민봉기는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농민군이 와해되자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도 곧 돌아갔다. 당시의 집정자였던 이의민으로서는 그의 본향을 대상으로 벌이는 대대적인 토벌작전은 바라지 않았다. 이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민심만 악화될 뿐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반민들의 움직임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인 명종 23년 2월부터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 때는 단순하고 우발적인 봉기에서 벗어나 보다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계획하여 주변의 반민들과 연합하는 대규모의 부대로 발전하였다.

161)≪世宗實錄地理志≫색인(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5), 323·375쪽 참조.
162) 李貞信,<雲門·草田民의 蜂起>(앞의 책), 156∼157쪽.
16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공민왕 11년.
164)≪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0년 정월.
165)≪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0년 9월.
166)<道先生案>(≪慶州先生案≫, 亞細亞文化社, 1980), 20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