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신종 5년의 신라부흥운동
경주지역의 소요는 비록 金順과 今草가 항복했으나, 그 이후에도 운문산·태백산을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계속되고 있었으니, 신종 5년(1202) 8월에 최충헌이 문무관리들과 경주의 일을 의논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경주지역은 계속 소요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민의 항쟁은 주로 운문산을 근거지로 삼아 이루어졌다고 보여지는데 여기에는 최충헌정권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세력을 만회하지 못한 경주토호들도 함께 가담했으리라 생각된다. 토호들은 이제 농민의 지도자로서 주도권을 장악한 후, 경주 주위의 군현까지 점차 영역을 확대하여 신라부흥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들의 첫 시도는 평소에 사이가 좋지 못했던 永州를 침공하는 일이었다. 慶州別抄軍은 雲門賊 및 符仁寺, 桐華寺 등의 승도들을 끌어모아 영주를 공격하였다.200)
영주는 고려 초 臨皐縣에 道洞·臨州 두 현을 합하여 설치된 지역이었다. 성종 14년(995)에는 永州刺史로 삼았고 현종 9년(1018)에는 경주에 내속시켰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따라서 영주는 현종 9년부터 경주에 속해 있다가 명종 2년에 감무가 설치됨으로써 비로소 경주에서 독립하였는데, 그 속현으로서 梨旨銀所가 있었다. 이 지역은 현종 때 영주가 경주의 속현이 되자 함께 이곳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후에 영주에 감무가 파견됨으로써 이지은소는 다시 영주의 관할로 바뀌게 되었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慶州吏民 起兵謀叛 來侵郡境”이라 하여 경주민과 주리가 함께 영주를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경주민이 영주민과 감정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두 지역 주민들의 대결이라면, 이는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상의 문제라기보다는 두 지역의 이해관계가 얽힌 것으로 짐작된다. 만일 그렇다면 이지은소의 소유권을 둘러싼 암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당시의 貢賦는 농민의 개별적 부담이 아니라 집단적 부담으로서, 매년 미리 주·부·군·현 등 지방의 貢額이 일괄적으로 책정·할당되었다가 이것이 지방관리의 책임하에 왕실·정부의 각 기관 등에 헌납되었다. 그런데 종래 속현을 영유한 주읍은 그 속현을 착취대상으로 간주하여, 위로부터 배정 받은 각종 부담을 이들 속현에 과중하게 부과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읍의 몫까지 떠맡기는 것이 예사였다.201) 그런데 경주의 경우, 명종대에 와서 이곳의 속군현이었던 長鬐縣·永州郡·興海郡·慶山縣 등에 각기 감무가 파견됨으로써 속군현이 줄어들게 되었다.202) 여기에 경주에 소속되어 있던 이지은소까지 영주에 귀속하게 되니 경주민이 국가에 부담해야 하는 공액이 증가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특히 이지은소는 은을 생산하는 특수지역이므로 이것이 차지하는 위치가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주민으로서는 그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중요한 수탈대상의 하나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국가에서는 경주민의 공부가 가중됨에 따라 어느 정도 감면해 주었을 것이지만 속군현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던 이전보다는 부담이 훨씬 무거웠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에 경주민은 이지은소만이라도 그들의 지역에 다시 내속시킬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주민의 입장에서는 이지은소가 경주에 내속되면 그들 지역 또한 공부의 부담이 많아질 것이므로 들어줄 의사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이는 국가의 소관사항이었다. 이같은 지역간의 갈등이 경주 吏民으로 하여금 영주를 공격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이와 비슷한 예는 명종 2년에 成州人이 인종대까지 그들의 부곡이었던 三登縣을 공격하는 것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203)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주 이민 또한 정부의 승인없이 영주의 이지은소를 강제로 빼앗아 올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주의 공격은 그 지리적 위치로 보건대 반란의 전초전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경주 이민들의 영주 공격은 영주 이민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별초군·승도·운문산 반민 등에 의한 연합세력 형성과 가능성에서 힘을 얻은 경주토호들은 신라부흥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우선 그들의 구심점이 될 왕을 선정하였다.
경주인이 반란을 도모하여 비밀리에 郎將同正 裵元祐를 前將軍 石成柱가 귀양가 있는 古阜郡에 보내어 설득하기를, ‘고려의 왕업은 거의 다 쇠진되었으니 신라가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공을 왕으로 삼아 沙平渡를 경계로 삼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하니 성주가 거짓으로 기뻐하며 원우를 집에 머물게 하고는 은밀히 군수 惟貞에게 가서 그것을 고하였다. 유정이 원우를 잡아 안찰사에게 보내니, 안찰사는 중앙에 알린 후에 죽였다(≪高麗史節要≫권 14, 명종 5년 11월).
경주토호들은 신라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우선 국왕을 선정, 반란의 구심점으로 삼은 이후에 사평도를 경계로 한강 이남지역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고려를 완전히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고 한강 이남인 옛 삼국시대 때의 신라영토를 회복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것 같다. 경주토호들이 석성주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던 이유는 최충헌에 의해 유배되었던 인물인 만큼 반최충헌세력의 규합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경주의 토호가 아니므로 실권은 그들이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석성주는 최충헌에 반대했으나 고려왕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었으며, 옛신라에 대한 애착심도 없었다. 그리하여 석성주를 왕으로 추대하고 사평도를 경계로 신라를 부흥시키겠다는 경주토호들의 시도는 그가 관아에 밀고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신라부흥을 기도했던 토호들은 석성주의 밀고로 이 사실이 중앙에 알려지게 되자, 정부로부터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도는 명백히 국가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체포되면 죽임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안찰사에게 용서를 구하였다. 안찰사로서도 경주지역의 소요가 계속된다면 그 또한 문책을 당할 것이므로, 토호들의 항복을 받아들여 지역안정에 주력하고자 했다.
경주토호들의 주도 하에 일으켰던 신라부흥운동은 여기서 일단 그친 듯하며 더 이상 확산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최충헌은 그들이 비록 항복했으나 신라부흥을 시도했던 일은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토호들의 기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군대를 파견하여 경주지역을 횡행하던 난민들을 소탕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이후에 발생한 농민봉기는 정부의 토벌작전에 대응하여 맞서는 과정에서 점차 확산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이제 경주민의 봉기는 토호들이 주도했던 신라부흥의 성격보다는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일어선 농민항쟁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물론 경주토호들 중에서는 신라부흥을 고집하며 끝까지 고려정부에 항쟁했던 利備 같은 강경파도 있어 농민들과 함께 대항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경주토호들의 항복의사에도 불구하고 최충헌은 대대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는 이 때를 틈타 경주민의 반정부 항쟁을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정권을 유지해가는 데 경주민의 반정부적인 성향이 계속 걸림돌로 작용할 것을 감지한 데서 연유하였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그가 군대를 파견했던 신종 5년은 진주지역의 소요도 끝나 경주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였다. 최충헌은 대장군·직문하성 金陟侯를 招討處置兵馬中道使로 삼고 형부시랑 田元均을 그 부장으로, 대장군 崔匡義를 좌도사, 병부시랑 李頣를 그의 부장으로, 섭대장군 康純義를 우도사, 지합문사 李維成을 그 부장으로 삼아 경주를 토벌하게 하였다.
경주민은 이곳을 가혹하게 진압함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함부로 난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는 최충헌의 의도가 드러나게 되니, 이제는 그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맞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운문산·울진·초전의 농민군과 연합하고, 상주·청주·원주에 격문을 보내어 함께 대항할 것을 요청하였다.204) 운문산과 초전은 명종 23년에, 울진은 신종 2년에 농민들이 봉기하였던 곳이다. 이로 보아 이들 지역은 정부의 강압책에 눌려 일시 수그러졌지만 여전히 농민봉기의 진원지로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에 농민군을 이끌고 정부군에 대항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利備와 孛佐였다.
그런데 이들에 대하여≪고려사≫와≪고려사절요≫에는 이비·패좌로 되어 있지만, 田元均 묘지명에는“東京義庇之黨 與草賊巨魁勃尤起兵”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이름이 조금 다르기는 하나 그 연대와 전후 문맥으로 보아서 같은 인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비의 경우에는“東京賊徒 都領 利備”로 기술되어 있기도 한데, 그가 도령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경주토호였으리라 짐작되며, 패좌와는 달리 신라부흥에 대해 어느 정도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비해 패좌는 초적이라는 용어나, 운문산을 근거지로 삼았던 점으로 보아 일반 농민이나 천민으로서, 어느 시기인지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으나 운문산에 들어와서 농민군의 지도자가 된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이 경상도 지역의 농민항쟁에서 가장 대표적인 세력권이었다. 따라서 신종 5년(1202)의 경주지역민의 국가에 대한 항쟁은 신라부흥에 애착을 가지고 이를 실현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던 이비부대와 순수한 민란적인 성향으로 국가의 수탈체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강한 패좌의 두 부대가 연합하여 일으키게 되었다. 만약 경주지역의 봉기가 성공리에 끝맺을 수 있었다면 두 계층의 성격 차이로 내부에서 갈등이 파생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우선 강력한 정부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연합항쟁이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군은 3군으로 나누어서 반민들을 공격하였다. 즉 김척후·전원균부대인 중도사는 경주를 거쳐 운문산으로, 강순의·이유성의 우도사는 杞溪縣 등 경주 외곽지대로, 그리고 최광의·이신의 좌도사는 基陽縣 등 경주 북부 지역을 담당하여 농민군과 대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종 6년 정월에는 관군과 이비부대가 기양현에서, 2월에서 3월 경에는 패좌가 이끄는 반민들이 하산하여 기계현에서 이유성의 우도사와 싸울 무렵에, 중도사의 군대는 바로 운문산을 공략했던 것으로 보인다. 운문산 기슭에서의 전투에서 반민 주력부대의 하산으로 관군은 결국 승리했으나, 그들의 저항이 치열하여 정부측도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고 한다.205)
농민군은 그들의 근거지를 관군에게 빼앗기게 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를 탈환하기 위해 운문산에 있는 관군의 주둔지를 계속 공격하였으나 관군은 굳게 지키기만 할 뿐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다. 당시 운문산을 지키던 중도사 대장군 전원균은 오이를 심음으로써 물러날 의사가 없음을 명백히 하여, 농민군 스스로가 포기하기만을 기대했다고 한다.206) 운문산 속에서의 주둔은 관군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농민들 중에서 반민측에 가담하여 싸우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반민편이 되었으니 이는 관군이 농민에게 끼친 폐해가 적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관군이 운문산에 들어간 것은 농민군과의 정면대결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퇴로가 끊겨 정부군이 고립되어 전멸을 당할 우려도 있었다. 이에 정부는 관군이 수비에만 급급하여 반민들을 효율적으로 제압하지 못한다는 책임을 물어 김척후를 파면하고 丁彦眞을 기용하였다.
총대장인 중도사가 교체된 후, 관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농민군을 습격함으로써 그들의 활동 영역을 축소시켜 나갔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민심을 회유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기원의 대상은 매우 다양한데, 그 대략을 살펴보면 太祖眞前·龍王·天皇·부처·山神·天神·太一 등으로서 불교·도교·민간신앙의 대상이 모두 섞여 있다.207) 이는 항쟁에 지친 농민들을 동요하게 하여 사기를 저하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으리라 보여진다. 농민군의 동요는 계속되는 항전에서의 패배를 의미하므로, 반민지도부는 이를 근절시키기에 주력하였다. 그 일환으로 이비 또한 일찍이 신라에서 제사를 지냈던 5악 중의 하나인 東岳에208) 가서 기도를 올렸다. 그는 항쟁의 정당성을 선포하고 농민군이야말로 동경산신의 비호를 받고 있음을 강조하여, 농민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비부자가 관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에 몰래 기도하러 갔을 때 병마사 정언진의 사주를 받은 무당의 꾐에 넘어가서 사로잡히고 말았다.209)
이비의 체포는 농민군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봉기의 구심체인 지도부가 이비의 죽음으로 와해되니 반민들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어 관군에 대항할 의욕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에 패좌는 남은 반민들을 수습하여 운문산에 숨어 방어에만 주력할 뿐 나와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반민들의 대전 기피로 항쟁은 장기화되었고, 농민군을 빨리 진압하고 상경하려는 관군측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정언진은 반민집단 내부에서 틈이 생겼음을 간파하고, 휘하의 장수 몇몇을 보내어 패좌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다음은 패좌의 몰락을 기술한 기록이다.
정언진이 또 隊正 咸延壽·康淑淸을 보내어 운문산에 가서 패좌에게 편안하게 생업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적의 副將이 함연수에게 자주 눈짓하므로 함연수가 그 뜻을 깨닫고 밖으로 나가 칼을 가지고 들어와서 패좌를 쳤다. 패좌가 떨쳐 일어나니 강숙청이 쳐서 그 머리를 베어 서울로 보냈다. 그의 부하들이 함연수 등을 찌르려고 하니 적의 부장이 이를 꾸짖어 제지하였으므로 죽음을 면하였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丁彦眞).
앞서 패좌가 운문산의 요새지를 빼앗기고 이어 이비가 살해됨으로써, 농민군의 전의가 상실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농민군 내부에서는 관군에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정언진은 이 때를 틈타 회유사절단을 보냈던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패좌는 측근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는 정부측의 고도의 이간책이 맞아 떨어진 결과로 파악된다. 패좌가 죽자 농민들은 곧 반격을 시도하였다. 그리나 그들은 패좌의 부장을 비롯한, 정부와의 강화를 원하는 세력에 눌려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였다. 이후 정언진은 남은 농민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다시 운문산에 주둔하면서 山角·得光의 항복을 받고 반민들의 근거지를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운문산이나 태백산 일대에는 여전히 잔존세력이 남아서 끝까지 항거하고 있었으므로, 최충헌은 대부분의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안찰사 朴仁碩에게는 京兵 200명을 주어 남은 무리들을 소탕하게 하였다. 박인석이 신종 7년(1204) 5월에 金順 등 20여 명을 사로잡는 것을 끝으로 경주민의 항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명종 20년부터 시작된 경주지역의 농민항쟁은 운문·초전민의 봉기에 이어 신종대에 들어와서는 신라부흥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항쟁은 주변의 농민·유이민·사원세력과 연합하여 중앙정부와 직접 맞서서 저항했으며, 경상도의 전역을 장악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는 명종 4년에 발생했던 서북민의 항쟁 이래로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 등 30여 년 동안 농민군이 여러 항쟁을 겪는 과정에서 오는 피지배층의 역량이 그만큼 쌓였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충헌의 강경한 탄압책에 밀려 농민봉기는 일단 진정되었다. 경주지역에서의 농민봉기는 東京留守가 知慶州事로 강등된 사실 외에 기록에 나타나는 것이 없으므로 지방관의 수탈, 토지겸병을 방지하여 농민적 토지소유로의 재편성 등 농민의 요구사항이 제대로 수렴된 것 같지는 않다. 역설적으로 최충헌은 이 봉기를 무사히 수습함으로써 그의 독재체제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존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대토지겸병이 성행하여 체제내의 모순이 가중될 때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충헌이 기존 중앙 정치기구인 3省 6部體制를 그대로 두고 다시 敎定都監·都房 등을 설치한 이유는 그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함이었겠지만, 그보다는 기존 정치기구로는 분출하는 피지배층의 불만을 수습할 수 없어서, 보다 강압적으로 억누르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였다고 생각된다. 이는 농민들의 의식이 봉기 이전보다 훨씬 향상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경주민의 항쟁이 끝난 지 불과 10여 년 후에, 고려는 거란·몽고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이제 농민들은 외세의 침입에 저항하면서 국내의 지배권력에 대한 싸움을 벌이는 이중의 항전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 전주·나주 군인들의 반란, 振威縣人의 반란, 楊水尺의 배반 등 피지배층이 고려정부에 대해 항전을 벌이는 경우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최충헌이 죽은 후, 새로운 집정자로 등장한 崔怡(초명은 瑀)는 이민족과의 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남쪽 지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동경유수로 승격시켰다.210) 결국 농민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는 못하였으나 강등시킨 지 불과 15년만에 경주를 원상 회복시킨 것은 그가 새롭게 정권을 잡으면서 농민들을 회유할 필요성도 느꼈겠지만, 그보다는 농민들의 힘을 두려워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같은 농민들의 힘은 이후 몽고와의 전쟁에서 외적을 방어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李貞信>
200) | ≪高麗史≫권 20, 世家 20, 신종 5년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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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 李樹健,<朝鮮初期 郡縣制整備와 地方統治體制>(≪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413쪽. |
202) | ≪世宗實錄地理志≫권 150, 慶尙道 慶州府. |
203) | ≪高麗史節要≫권 12, 명종 2년 6월. |
204) | ≪高麗史節要≫권 14, 신종 5년 12월. |
205) | 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27, 征東軍幕上都統尙書副使侍郎書. |
206) | <田元均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571쪽. |
207) | 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8. 李貞信, 앞의 책, 221쪽<表 1>참조. |
208) | 李基白,<新羅 五岳의 成立과 그 意義>(≪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
209) | ≪高麗史節要≫권 14, 신종 6년 4월. |
210) | ≪高麗史≫권 57, 志 11, 地理 2 東京留守官 慶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