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란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고려 무신정권기에 최초로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던 서북지역의 농민항쟁은 무려 5년 이상이나 지속된 끝에 종식되었다. 이후 무신정권 기간을 통하여 고려정부는 서경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그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서북계에 대해서는 도령을 위무하고 중앙에서 파견한 병마사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등 강온 양면책을 강구하였다. 정부의 서북지방에 대한 견제는 고종대에 들어와 거란·여진 그리고 몽고의 내침으로 국가체제가 해이해지면서 약화되었으니 이 시기를 틈타 발생한 사건이 楊水尺의 난이다.
무신정권기 고려에 대한 외세의 침입은 몽고에 쫓겨 남하해 온 거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고종 3년 8월 거란군 수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자 고려는 3軍을 출동시켜 방어케 하였는데 이 때 양수척이 반기를 들고 거란적에 투항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이 고려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양수척 등이 익명으로 帖에 써서 이르기를, ‘우리가 고의로 반역하는 것이 아니고 妓家의 침탈을 견딜 수 없어서 거란적에게 항복하여 鄕導가 된 것이니, 만약 조정에서 이 기생들과 順天寺 주지를 죽이면, 창을 거꾸로 돌려들고 나라를 돕겠다’하였다(≪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3월).
원래 양수척은 천민계급으로 水草를 따라 옮겨 살며 수렵과 柳器匠·肉商 등을 일삼아 貫籍과 賦役이 없었다. 그런데 이의민 집권기에 와서 그의 아들 이지영이 朔州分道將軍으로 있을 때에 이들을 그의 愛妓 紫雲仙에 소속시키고 공물을 징수하기 시작하여, 최충헌이 집권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212) 이에 양수척은 그 침학을 이기지 못하여 거란이 침입하자 바로 투항하여 거란의 향도가 되었던 것이다. 최충헌은 그들의 요구사항을 듣고 자운선·上林紅 등 기생을 고향으로 돌려 보냈는데, 순천사 주지 역시 이 소식을 듣고 도망가 버렸다. 양수척의 반란은 결과적으로는 고려정부에 반역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긴 했으나, 위정자들의 수탈에 대한 피지배층의 저항의 변형된 형태로 민란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 있다.
고려를 침입한 거란족은 북방의 각 진에서 고려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남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8∼9월에 서북·동북계를 횡행하던 거란군은 드디어 11월에는 대동강을 건너게 되어 고려는 이제 개경까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 때 興王寺·弘圓寺·景福寺·王輪寺·安養寺·修理寺 등의 승도로서 종군했던 자들이 최충헌을 죽일 것을 모의하여 개경 宣義門을 부수고 들어가 관군과 대적하였다. 그들은 먼저 낭장 金德明의 집부터 찾아가 부수었는데, 그는 일찍이 음양설로 최충헌에게 아부하여 자주 요역을 일으켜서 여러 사원을 침해하였기 때문이었다.213) 이들의 반란은 관군에 패배하여 무려 800여 명의 승도가 참살당함으로써 끝맺었으나, 이 또한 사원에 거주하던 피지배층인 승도들의 대정부 항쟁으로서 그 원인이 가혹한 공역에 시달린 데에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성격보다는 농민봉기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같은 시기 이번에는 전주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거란이 남침하여 개경까지 위협을 받음에 따라 정부는 남부지방의 주현군까지 징발하게 하였는데 전주 군인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집단으로 봉기하였다. 즉 全羅抄軍別監 洪溥는 중앙의 명령으로 전주군을 고종 3년 12월 26일에 출동시켰는데, 이들이 5일만에 다시 전주로 돌아와 주의 長吏를 죽이고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주지방의 군대도 출발할 수 없었다고 하니,214) 반란의 조짐이 전라도 전역에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주 군인들의 반란도 평소 장리의 억압에 시달리던 주현군이 거란 방어에 우선하여 장리를 살해할 정도로 불만이 쌓여 있음을 드러낸 것으로서, 정부는 장군 奇允偉로 하여금 本領軍과 神騎의 두 반을 거느리고 충청도안찰사와 함께 출동하게 하여 겨우 이들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번에는 振威縣에서 난이 발생하였다.
진위현 사람 令同正 李將大와 直長同正 李唐必이 국가에 사단이 있는 틈을 타서 같은 현 사람인 별장동정 金禮 등과 더불어 반란을 꾀하여, 무리를 모아 縣令의 兵符와 印을 겁탈하고 창고를 열어 진휼하니 굶주린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그리하여 이웃 고을에 통지하되 자칭 靖國兵馬使라 하고 그 군사를 義兵이라 이름하였다. 행군하여 宗德(경기 화성)·河陽(충남 아산) 두 창고에 이르러 곡식을 풀어서 군사를 먹이고 제멋대로 꾸려서 장차 廣州를 침범하려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정월).
당시 거란은 서북방면의 여러 성들을 공략했을 뿐 아니라 3년 10월에는 楊州 沙峴浦(지금의 서울)까지 내려왔으니 서울의 바로 아래에 있는 진위현(지금의 평택)민으로서는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난의 주모자인 이장대와 이당필은 스스로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인「靖國兵馬使」라 하였으며, 휘하의 반민들은 외세를 방어하는 데 보다 적합한 용어라고 여겨지는「義兵」이라 칭하였다. 따라서 진위현민의 봉기는 외세에 대한 저항감도 있었으리라 판단되나, 이들이 난을 일으켜 창고를 열어 진대하니 굶주린 백성이 많이 따랐다는 것으로 보아 농촌생활의 피폐가 봉기가 확산될 수 있었던 원인으로 보인다.
진위현은 작은 고을이나 삼도의 요충에 위치하여 사신과 빈객의 왕래가 잦아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백성과 궁핍한 아전으로서는 영접 전송이 부담스러워서, 피지배층의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특히 강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거란이 경기도 양주를 침범했다면 머지 않아 지리적 요충지인 진위현이 공격받을 것은 당연한 순서였으므로, 진위현의 토호인 이장대·이당필·김례 등이 힘을 모아 봉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우선 宗德倉·河陽倉을 습격하여 군량미를 확보한 후에 광주를 중심으로 대정부 항쟁과 외세의 방어에 주력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정부는 외세의 침입보다 농민봉기의 진압에 더욱 주력하여, 중앙의 군대와 광주·水州의 군사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이에 충주·청주·양주도의 병사를 징발하여 겨우 진압하였다.215) 고종 4년(1217) 2월에 관군이 거란을 양주 陶公驛에서 맞아 싸워 패배한 것으로 보아, 정부가 진위현민과 합세하여 대처했다면 이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실정이 많았던 정부인 만큼 농민이 의병으로 일어서는 것조차 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바뀌게 될 것을 걱정하여 저지했다고 보여진다.
같은 해 5월, 이번에는 서경에서 난이 발생하였다. 당시 서경성이 견고하여 거란은 황해도·경기도까지 진격해 왔으나, 서경은 거란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거란은 서경을 피하여 대동강을 건너 남으로 향하였는데, 이로 인해 서경은 거란군에 둘러싸여 있는 형편이었다. 정부는 5군을 재편성하여 적군을 막게 하는 한편, 종묘 9실의 신주를 工部廳과 考工廳에 이주시켜 개경의 함락에 대비하였다. 거란이 東州(철원)·安陽都護府(춘천)·원주를 함락시키자, 정부는 서경병마사 상장군 崔愈恭과 판관 예부랑중 金成 등에게 조서를 내려 서경군사를 조발하여 위기에 빠져 있던 중앙군인 5군을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휘하에 있던 崔光秀가 반란을 일으켰다.
崔光秀라는 군졸이 있었는데 행군하기를 싫어해서 纛旗를 세우고 군사를 모아 서경으로 되돌아왔다. 崔愈恭이 창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金成은 술이 취해 드러누워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이즈음 유공이 사졸을 등쳐먹기를 좋아하여 결국 그들로 하여금 원망하고 반하게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5월).
최광수는 成州출신으로서 주진군의 旗頭였다.216) 그는 거란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정부에서 서경의 군대를 징발하자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다. 위의 내용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최광수 등 서경군이 거란군과 대적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 서경병마사 최유공과 판관 김성은 하급장교들에게 지휘권을 맡긴 채 서경에서 향락에 빠져 있었다. 특히 최유공은 탐학하여 서경민의 원성이 높았다. 피지배층을 수탈하여 자신의 향락과 안위만을 보존하려는 관리의 행위에 군인들은 분노를 느껴 드디어 거란과의 전투를 포기하고 봉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광수가 반란을 일으키자 서경민은 크게 호응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최광수는 서경성을 점령하였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힘을 얻은 최광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옛고구려 회복을 내세우고 스스로는「句高麗興復兵馬使金吾衛攝上將軍」이라 일컫고 관원과 군대를 모집하여 국가체제를 구축하였을 뿐 아니라 서북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동조하도록 요청하였다. 이 난은 흡사 명종 때 조위총의 주도로 일어났던 서북민의 봉기를 연상시킨다. 그를 죽일 계획을 가지고 찾아갔던 分臺錄事 鄭俊儒 등 10여 명을 동향인이라고217) 흔쾌히 맞이했던 까닭은, 최광수로서는 인재를 끌어모아 큰 세력을 만들어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포부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반란의 주체세력인 최광수 등 8명이 정준유에게 갑자기 암살당하여 그의 목표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봉기가 직접적으로는 서경 지배층의 탐학과 자기 보신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하였으나, 당시 대외적으로는 거란을 제대로 막지 못하여 위축되고 있었던 고려정부에 대한 신뢰 상실이 서경민들로 하여금 고구려 부흥까지 꿈꾸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고종 3년 8월부터 2년 반동안 고려는 거란의 침입으로 소요에 휩싸였다가 고종 6년 정월에 여·몽 연합군에 의해 江東城이 함락당함으로써 거란이 항복하여 안정을 되찾았다. 이 때 의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韓恂과 多智는 모두 義州의 戍卒로서 순은 별장이 되었고 지는 낭장이 되었다. 고종 6년에 두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그 곳의 방수장군 趙宣과 수령 李棣를 죽이고 스스로 元帥라 일컬으며 감창사와 대간 등의 관서를 두고 함부로 나라 창고의 곡식을 풀어내니 여러 성이 향응하였다. (조정에서) 장군 趙廉卿과 낭중 李公老를 보내 초무코자 하니 순·지의 무리 50여 명이 嘉州의 객사에 들어와 말하기를,‘兵馬使 趙沖·金君綏·丁公壽 등은 청렴하며 백성을 사랑하나 나머지 사람들은 탐욕스럽고 잔학하여 백성에게서 재물을 많이 거두는 것이 살을 벗기고 뼈를 긁는 것과 같으니,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고 하였다(≪高麗史≫권 130, 列傳 43, 韓恂 ;≪高麗史節要≫권 15, 고종 6년 10월).
의주는 고려의 최전방으로서 외세의 끊임없는 공격에 가장 많은 시달림을 받았던 지역이었다. 이곳은 고구려 멸망 후 예종 12년(1117)에 고려가 회복할 때까지 당·발해 그리고 거란에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양계지방의 토지는 국가의 사민책에 의해 남쪽으로부터 이주해 온 농민들에게 국가가 量給하였으므로 농민에게 완전한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신정권 이후 많은 토지가 보다 용이하게 권세가들에게 점탈되어 농민들의 불만이 컸으리라 짐작된다.218) 뿐만 아니라 의주는 북방민족과의 교역의 중심지였으므로,219) 전쟁으로 교역이 끊겨 주민들의 생계가 더욱 어려워진 데 대한 불만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곳은 지휘계통이 다른 두 개의 군사조직이 존재하였다. 즉 중낭장 이하 州鎭將相將校들의 지휘를 받는 주진군과 防戍將軍 휘하의 경군과 남도 주현군으로 구성된 방수군이었다.220) 한순·다지 등이 먼저 방수장군 조선과 수령 이체를 죽인 것으로 보아 중앙의 방수군과 지방 주진군의 갈등도 봉기의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봉기하였던 직접적인 계기는 지방관의 탐학으로 인한 일상생활의 궁핍이었으므로 농민군은 반란을 일으킨 직후 창고를 열어 이들을 구휼하여 서북계 주민들의 지지를 확산시킬 수 있었다. 서북계의 주민들이 한순·다지의 난에 호응하게 된 것은 이러한 지방관의 탐학이 일차적인 원인이었으나, 한순·다지221)가 지향하는 단계는 단순한 민란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킨 즉시 원수라 일컬으며 감창사와 대간 등의 관서를 두었다고 한다. 이는 새로운 정부 혹은 국가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북계의 많은 성이 이에 호응하자 최충헌이 죽고 실권을 장악한 지 미처 한달도 되지 않았던 집정자 최우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우는 우선 安永麟·柳庇·俊弼 등 13명의 서북계 관리들이 일찍이 최충헌에게 아첨하여 백성을 착취하였다고 하여 섬으로 유배시키고, 의주반민에 호응하지 않았던 安北都護府·龜州·延州·成州의 주리에게 參職을 차등있게 주어 그 공로를 치하하였다. 그리고는 추밀원부사 李克亻胥에게는 중군을, 李迪儒는 후군을, 金就礪에게는 우군을 거느리고 가서 의주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힘입어 안북도호부에 의주의 반민들이 침입했을 때 주민들이 힘껏 싸워 朴蘇 등 80여 급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다.
한순·다지 등은 서북계 전역이 호응하지 않는 데다가 시일이 흐름에 따라 관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의주를 공격하니 이듬해 2월 東眞에 투항하였다. 즉 의주반민은 청천강 이북을 들어 동진에 소속시켜 금의 원수 于哥下를 끌어들이려 하였는데, 우가하의 배반으로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222) 그러나 의주의 유민을 진무하기 위하여 파견된 宗周賚·宗周秩 등의 관리가 또 탐학하여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다과를 정하는 등 백성을 괴롭히자, 의주민은 다시 봉기하여 이들을 죽였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5천의 관군을 이기지 못하여 평정되었다. 정부는 의주방어사를 咸新으로 맞추어 징계하였다가, 변방지대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곧 회복시켰다.223) 그러나 고종 9년에도 유배에서 사면되어 돌아온 의주적이 동진병을 끌어들여 靜州·義州 등지를 다시 침입하다가 진압된 적이 있었다.224)
이 의주민의 봉기도 앞서 최광수의 고구려 부흥운동처럼 반란의 주도층은 새로운 정부를 구상했던 정치성이 강한 사건이었지만, 지방관의 침탈에 항거하는 민중들이 대거 가담한 점에서 민란의 범주에서 파악해야 되리라고 생각된다.
212) | ≪高麗史節要≫권 15, 고종 3년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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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 ≪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정월. |
214) | 위와 같음. |
215) | ≪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정월. |
216) | 李穡,<鄭氏家傳>(≪東文選≫100, 傳) |
217) | ≪高麗史≫권 121, 列傳 34, 鄭顗(初名 俊儒)에 의하면 정의는 淸州人이라고 하며,≪東文選≫에는 최광수가 成州人이라고 한다. 그런데 최광수가 정의를 同鄕人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어릴 때부터 서경으로 이주해서 살았다고 생각된다. |
218) | 鄭鍾瀚,<高麗 兩界의 民田과 그 所有關係의 變化>(≪慶北史學≫6, 1983). |
219) | ≪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5년 정월 신축. |
220) | 趙仁成,<高麗 兩界 州鎭의 防戍軍과 州鎭軍>(≪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0). |
221) | 多氏는 고려의 姓氏에는 보이지 않고 발해의 姓氏條에 보인다. 혹은 多智가 이름일 경우, 여진이나 거란인에게서 비슷한 이름이 많이 나오므로 고려에 귀화한 발해인이거나 혹은 거란·여진과 같은 북방 이민족이 아닐까 생각된다. |
222) | ≪高麗史節要≫권 15, 고종 7년 2월. |
223) | ≪新增東國輿地勝覽≫권 53, 義州牧. |
224) | ≪高麗史節要≫권 15, 고종 9년 7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