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2. 농민·천민의 봉기4) 외세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1. 신분제의 동요
          • 1) 신분제 동요의 배경
          • 2) 양인·천인의 신분이동
            • (1) 양인·천인의 신분상승
            • (2) 양인의 신분하락
            • (3) 이성계 일파의 집권과 양인·천인의 신분고정
          • 3) 향리 및 양반귀족의 신분동요
            • (1) 향리의 신분동요
            • (2) 양반귀족의 신분동요
        • 2. 농민·천민의 봉기
          • 1) 농민·천민봉기의 배경
            • (1) 중앙 통치체제의 문란
            • (2) 지방관의 탐학
            • (3) 대토지겸병의 확대
            • (4) 신분제의 동요
          • 2) 무신정권 성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1) 서북지역의 농민봉기
            • (2)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
            • (3) 관성·부성·전주 등에서의 농민봉기
            • (4) 제주민의 항쟁
            • (5) 운문·초전민의 봉기
          • 3) 무신정권 확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1) 만적의 난
            • (2) 진주민의 항쟁
            • (3) 경주민의 항쟁
          • 4) 외세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1) 거란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2) 몽고 1∼3차 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3) 몽고 6·7차 침입기의 농민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1) 몽고족의 흥기와 여·몽관계의 성립
            • (1) 13세기 몽고족의 흥기
            • (2) 몽고군의 고려 입경
            • (3) 강동성 전투와 여·몽관계의 성립
          • 2) 몽고의 고려 침입
            • (1) 몽고의 침략
            • (2) 최씨정권의 강화천도
            • (3) 몽고의 2·3차 침입
            • (4) 여·몽전쟁의 장기화
          • 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
            • (1) 살례탑군에 대한 항전
            • (2) 당고군에 대한 항전
            • (3) 야굴군에 대한 항전
            • (4) 차라대군에 대한 항전
            • (5) 고려의 입보책과 지방민의 항전
          • 4) 삼별초의 대몽항전
            • (1) 몽고와의 강화
            • (2) 삼별초의 봉기
            • (3) 삼별초의 진도 항전
            • (4) 삼별초군의 제주도항전
        • 2. 여·원관계의 전개
          • 1) 원의 간섭과 자주성의 시련
            • (1) 몽고제국 지배체제로의 편입과정
            • (2) 몽고제국 지배체제하의 고려왕조
            • (3) 여·원 양국간의 인적·물적 교류
          • 2) 북방문제
            • (1) 심양로의 심왕
            • (2) 동녕부
            • (3) 쌍성총관부
        • 3. 고려 말의 정국과 원·명 관계
          • 1) 원의 쇠퇴와 공민왕의 반원정책
          • 2) 공민왕의 개혁정치 실패와 명의 흥기
          • 3)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과 요동정벌
        • 4. 홍건적과 왜구
          • 1) 홍건적
            • (1) 원의 쇠퇴와 홍건적의 대두
            • (2) 홍건적의 침입
          • 2) 왜구
            • (1) 왜구의 성격과 규모
            • (2) 왜구의 침구목적
            • (3) 왜구의 침입
            • (4) 왜구에 대한 대책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1) 거란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고려 무신정권기에 최초로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던 서북지역의 농민항쟁은 무려 5년 이상이나 지속된 끝에 종식되었다. 이후 무신정권 기간을 통하여 고려정부는 서경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그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서북계에 대해서는 도령을 위무하고 중앙에서 파견한 병마사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등 강온 양면책을 강구하였다. 정부의 서북지방에 대한 견제는 고종대에 들어와 거란·여진 그리고 몽고의 내침으로 국가체제가 해이해지면서 약화되었으니 이 시기를 틈타 발생한 사건이 楊水尺의 난이다.

 무신정권기 고려에 대한 외세의 침입은 몽고에 쫓겨 남하해 온 거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고종 3년 8월 거란군 수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자 고려는 3軍을 출동시켜 방어케 하였는데 이 때 양수척이 반기를 들고 거란적에 투항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이 고려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양수척 등이 익명으로 帖에 써서 이르기를, ‘우리가 고의로 반역하는 것이 아니고 妓家의 침탈을 견딜 수 없어서 거란적에게 항복하여 鄕導가 된 것이니, 만약 조정에서 이 기생들과 順天寺 주지를 죽이면, 창을 거꾸로 돌려들고 나라를 돕겠다’하였다(≪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3월).

 원래 양수척은 천민계급으로 水草를 따라 옮겨 살며 수렵과 柳器匠·肉商 등을 일삼아 貫籍과 賦役이 없었다. 그런데 이의민 집권기에 와서 그의 아들 이지영이 朔州分道將軍으로 있을 때에 이들을 그의 愛妓 紫雲仙에 소속시키고 공물을 징수하기 시작하여, 최충헌이 집권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212) 이에 양수척은 그 침학을 이기지 못하여 거란이 침입하자 바로 투항하여 거란의 향도가 되었던 것이다. 최충헌은 그들의 요구사항을 듣고 자운선·上林紅 등 기생을 고향으로 돌려 보냈는데, 순천사 주지 역시 이 소식을 듣고 도망가 버렸다. 양수척의 반란은 결과적으로는 고려정부에 반역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긴 했으나, 위정자들의 수탈에 대한 피지배층의 저항의 변형된 형태로 민란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 있다.

 고려를 침입한 거란족은 북방의 각 진에서 고려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남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8∼9월에 서북·동북계를 횡행하던 거란군은 드디어 11월에는 대동강을 건너게 되어 고려는 이제 개경까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 때 興王寺·弘圓寺·景福寺·王輪寺·安養寺·修理寺 등의 승도로서 종군했던 자들이 최충헌을 죽일 것을 모의하여 개경 宣義門을 부수고 들어가 관군과 대적하였다. 그들은 먼저 낭장 金德明의 집부터 찾아가 부수었는데, 그는 일찍이 음양설로 최충헌에게 아부하여 자주 요역을 일으켜서 여러 사원을 침해하였기 때문이었다.213) 이들의 반란은 관군에 패배하여 무려 800여 명의 승도가 참살당함으로써 끝맺었으나, 이 또한 사원에 거주하던 피지배층인 승도들의 대정부 항쟁으로서 그 원인이 가혹한 공역에 시달린 데에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성격보다는 농민봉기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같은 시기 이번에는 전주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거란이 남침하여 개경까지 위협을 받음에 따라 정부는 남부지방의 주현군까지 징발하게 하였는데 전주 군인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집단으로 봉기하였다. 즉 全羅抄軍別監 洪溥는 중앙의 명령으로 전주군을 고종 3년 12월 26일에 출동시켰는데, 이들이 5일만에 다시 전주로 돌아와 주의 長吏를 죽이고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주지방의 군대도 출발할 수 없었다고 하니,214) 반란의 조짐이 전라도 전역에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주 군인들의 반란도 평소 장리의 억압에 시달리던 주현군이 거란 방어에 우선하여 장리를 살해할 정도로 불만이 쌓여 있음을 드러낸 것으로서, 정부는 장군 奇允偉로 하여금 本領軍과 神騎의 두 반을 거느리고 충청도안찰사와 함께 출동하게 하여 겨우 이들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번에는 振威縣에서 난이 발생하였다.

진위현 사람 令同正 李將大와 直長同正 李唐必이 국가에 사단이 있는 틈을 타서 같은 현 사람인 별장동정 金禮 등과 더불어 반란을 꾀하여, 무리를 모아 縣令의 兵符와 印을 겁탈하고 창고를 열어 진휼하니 굶주린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그리하여 이웃 고을에 통지하되 자칭 靖國兵馬使라 하고 그 군사를 義兵이라 이름하였다. 행군하여 宗德(경기 화성)·河陽(충남 아산) 두 창고에 이르러 곡식을 풀어서 군사를 먹이고 제멋대로 꾸려서 장차 廣州를 침범하려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정월).

 당시 거란은 서북방면의 여러 성들을 공략했을 뿐 아니라 3년 10월에는 楊州 沙峴浦(지금의 서울)까지 내려왔으니 서울의 바로 아래에 있는 진위현(지금의 평택)민으로서는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난의 주모자인 이장대와 이당필은 스스로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인「靖國兵馬使」라 하였으며, 휘하의 반민들은 외세를 방어하는 데 보다 적합한 용어라고 여겨지는「義兵」이라 칭하였다. 따라서 진위현민의 봉기는 외세에 대한 저항감도 있었으리라 판단되나, 이들이 난을 일으켜 창고를 열어 진대하니 굶주린 백성이 많이 따랐다는 것으로 보아 농촌생활의 피폐가 봉기가 확산될 수 있었던 원인으로 보인다.

 진위현은 작은 고을이나 삼도의 요충에 위치하여 사신과 빈객의 왕래가 잦아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백성과 궁핍한 아전으로서는 영접 전송이 부담스러워서, 피지배층의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특히 강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거란이 경기도 양주를 침범했다면 머지 않아 지리적 요충지인 진위현이 공격받을 것은 당연한 순서였으므로, 진위현의 토호인 이장대·이당필·김례 등이 힘을 모아 봉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우선 宗德倉·河陽倉을 습격하여 군량미를 확보한 후에 광주를 중심으로 대정부 항쟁과 외세의 방어에 주력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정부는 외세의 침입보다 농민봉기의 진압에 더욱 주력하여, 중앙의 군대와 광주·水州의 군사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이에 충주·청주·양주도의 병사를 징발하여 겨우 진압하였다.215) 고종 4년(1217) 2월에 관군이 거란을 양주 陶公驛에서 맞아 싸워 패배한 것으로 보아, 정부가 진위현민과 합세하여 대처했다면 이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실정이 많았던 정부인 만큼 농민이 의병으로 일어서는 것조차 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바뀌게 될 것을 걱정하여 저지했다고 보여진다.

 같은 해 5월, 이번에는 서경에서 난이 발생하였다. 당시 서경성이 견고하여 거란은 황해도·경기도까지 진격해 왔으나, 서경은 거란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거란은 서경을 피하여 대동강을 건너 남으로 향하였는데, 이로 인해 서경은 거란군에 둘러싸여 있는 형편이었다. 정부는 5군을 재편성하여 적군을 막게 하는 한편, 종묘 9실의 신주를 工部廳과 考工廳에 이주시켜 개경의 함락에 대비하였다. 거란이 東州(철원)·安陽都護府(춘천)·원주를 함락시키자, 정부는 서경병마사 상장군 崔愈恭과 판관 예부랑중 金成 등에게 조서를 내려 서경군사를 조발하여 위기에 빠져 있던 중앙군인 5군을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휘하에 있던 崔光秀가 반란을 일으켰다.

崔光秀라는 군졸이 있었는데 행군하기를 싫어해서 纛旗를 세우고 군사를 모아 서경으로 되돌아왔다. 崔愈恭이 창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金成은 술이 취해 드러누워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이즈음 유공이 사졸을 등쳐먹기를 좋아하여 결국 그들로 하여금 원망하고 반하게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5월).

 최광수는 成州출신으로서 주진군의 旗頭였다.216) 그는 거란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정부에서 서경의 군대를 징발하자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다. 위의 내용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최광수 등 서경군이 거란군과 대적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 서경병마사 최유공과 판관 김성은 하급장교들에게 지휘권을 맡긴 채 서경에서 향락에 빠져 있었다. 특히 최유공은 탐학하여 서경민의 원성이 높았다. 피지배층을 수탈하여 자신의 향락과 안위만을 보존하려는 관리의 행위에 군인들은 분노를 느껴 드디어 거란과의 전투를 포기하고 봉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광수가 반란을 일으키자 서경민은 크게 호응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최광수는 서경성을 점령하였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힘을 얻은 최광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옛고구려 회복을 내세우고 스스로는「句高麗興復兵馬使金吾衛攝上將軍」이라 일컫고 관원과 군대를 모집하여 국가체제를 구축하였을 뿐 아니라 서북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동조하도록 요청하였다. 이 난은 흡사 명종 때 조위총의 주도로 일어났던 서북민의 봉기를 연상시킨다. 그를 죽일 계획을 가지고 찾아갔던 分臺錄事 鄭俊儒 등 10여 명을 동향인이라고217) 흔쾌히 맞이했던 까닭은, 최광수로서는 인재를 끌어모아 큰 세력을 만들어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포부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반란의 주체세력인 최광수 등 8명이 정준유에게 갑자기 암살당하여 그의 목표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봉기가 직접적으로는 서경 지배층의 탐학과 자기 보신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하였으나, 당시 대외적으로는 거란을 제대로 막지 못하여 위축되고 있었던 고려정부에 대한 신뢰 상실이 서경민들로 하여금 고구려 부흥까지 꿈꾸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고종 3년 8월부터 2년 반동안 고려는 거란의 침입으로 소요에 휩싸였다가 고종 6년 정월에 여·몽 연합군에 의해 江東城이 함락당함으로써 거란이 항복하여 안정을 되찾았다. 이 때 의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韓恂과 多智는 모두 義州의 戍卒로서 순은 별장이 되었고 지는 낭장이 되었다. 고종 6년에 두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그 곳의 방수장군 趙宣과 수령 李棣를 죽이고 스스로 元帥라 일컬으며 감창사와 대간 등의 관서를 두고 함부로 나라 창고의 곡식을 풀어내니 여러 성이 향응하였다. (조정에서) 장군 趙廉卿과 낭중 李公老를 보내 초무코자 하니 순·지의 무리 50여 명이 嘉州의 객사에 들어와 말하기를,‘兵馬使 趙沖·金君綏·丁公壽 등은 청렴하며 백성을 사랑하나 나머지 사람들은 탐욕스럽고 잔학하여 백성에게서 재물을 많이 거두는 것이 살을 벗기고 뼈를 긁는 것과 같으니,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고 하였다(≪高麗史≫권 130, 列傳 43, 韓恂 ;≪高麗史節要≫권 15, 고종 6년 10월).

 의주는 고려의 최전방으로서 외세의 끊임없는 공격에 가장 많은 시달림을 받았던 지역이었다. 이곳은 고구려 멸망 후 예종 12년(1117)에 고려가 회복할 때까지 당·발해 그리고 거란에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양계지방의 토지는 국가의 사민책에 의해 남쪽으로부터 이주해 온 농민들에게 국가가 量給하였으므로 농민에게 완전한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신정권 이후 많은 토지가 보다 용이하게 권세가들에게 점탈되어 농민들의 불만이 컸으리라 짐작된다.218) 뿐만 아니라 의주는 북방민족과의 교역의 중심지였으므로,219) 전쟁으로 교역이 끊겨 주민들의 생계가 더욱 어려워진 데 대한 불만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곳은 지휘계통이 다른 두 개의 군사조직이 존재하였다. 즉 중낭장 이하 州鎭將相將校들의 지휘를 받는 주진군과 防戍將軍 휘하의 경군과 남도 주현군으로 구성된 방수군이었다.220) 한순·다지 등이 먼저 방수장군 조선과 수령 이체를 죽인 것으로 보아 중앙의 방수군과 지방 주진군의 갈등도 봉기의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봉기하였던 직접적인 계기는 지방관의 탐학으로 인한 일상생활의 궁핍이었으므로 농민군은 반란을 일으킨 직후 창고를 열어 이들을 구휼하여 서북계 주민들의 지지를 확산시킬 수 있었다. 서북계의 주민들이 한순·다지의 난에 호응하게 된 것은 이러한 지방관의 탐학이 일차적인 원인이었으나, 한순·다지221)가 지향하는 단계는 단순한 민란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킨 즉시 원수라 일컬으며 감창사와 대간 등의 관서를 두었다고 한다. 이는 새로운 정부 혹은 국가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북계의 많은 성이 이에 호응하자 최충헌이 죽고 실권을 장악한 지 미처 한달도 되지 않았던 집정자 최우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우는 우선 安永麟·柳庇·俊弼 등 13명의 서북계 관리들이 일찍이 최충헌에게 아첨하여 백성을 착취하였다고 하여 섬으로 유배시키고, 의주반민에 호응하지 않았던 安北都護府·龜州·延州·成州의 주리에게 參職을 차등있게 주어 그 공로를 치하하였다. 그리고는 추밀원부사 李克亻胥에게는 중군을, 李迪儒는 후군을, 金就礪에게는 우군을 거느리고 가서 의주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힘입어 안북도호부에 의주의 반민들이 침입했을 때 주민들이 힘껏 싸워 朴蘇 등 80여 급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다.

 한순·다지 등은 서북계 전역이 호응하지 않는 데다가 시일이 흐름에 따라 관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의주를 공격하니 이듬해 2월 東眞에 투항하였다. 즉 의주반민은 청천강 이북을 들어 동진에 소속시켜 금의 원수 于哥下를 끌어들이려 하였는데, 우가하의 배반으로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222) 그러나 의주의 유민을 진무하기 위하여 파견된 宗周賚·宗周秩 등의 관리가 또 탐학하여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다과를 정하는 등 백성을 괴롭히자, 의주민은 다시 봉기하여 이들을 죽였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5천의 관군을 이기지 못하여 평정되었다. 정부는 의주방어사를 咸新으로 맞추어 징계하였다가, 변방지대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곧 회복시켰다.223) 그러나 고종 9년에도 유배에서 사면되어 돌아온 의주적이 동진병을 끌어들여 靜州·義州 등지를 다시 침입하다가 진압된 적이 있었다.224)

 이 의주민의 봉기도 앞서 최광수의 고구려 부흥운동처럼 반란의 주도층은 새로운 정부를 구상했던 정치성이 강한 사건이었지만, 지방관의 침탈에 항거하는 민중들이 대거 가담한 점에서 민란의 범주에서 파악해야 되리라고 생각된다.

212)≪高麗史節要≫권 15, 고종 3년 9월.
213)≪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정월.
214) 위와 같음.
215)≪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정월.
216) 李穡,<鄭氏家傳>(≪東文選≫100, 傳)
217)≪高麗史≫권 121, 列傳 34, 鄭顗(初名 俊儒)에 의하면 정의는 淸州人이라고 하며,≪東文選≫에는 최광수가 成州人이라고 한다. 그런데 최광수가 정의를 同鄕人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어릴 때부터 서경으로 이주해서 살았다고 생각된다.
218) 鄭鍾瀚,<高麗 兩界의 民田과 그 所有關係의 變化>(≪慶北史學≫6, 1983).
219)≪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5년 정월 신축.
220) 趙仁成,<高麗 兩界 州鎭의 防戍軍과 州鎭軍>(≪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0).
221) 多氏는 고려의 姓氏에는 보이지 않고 발해의 姓氏條에 보인다. 혹은 多智가 이름일 경우, 여진이나 거란인에게서 비슷한 이름이 많이 나오므로 고려에 귀화한 발해인이거나 혹은 거란·여진과 같은 북방 이민족이 아닐까 생각된다.
222)≪高麗史節要≫권 15, 고종 7년 2월.
223)≪新增東國輿地勝覽≫권 53, 義州牧.
224)≪高麗史節要≫권 15, 고종 9년 7월.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