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1차 침입
홍건적의 1차 침입은 3,000여 명이 들어와서 약탈하고 떠난 다음달인 공민왕 8년 12월 정묘일에 시작되었다. 이 때 홍건적의 한 괴수인 가짜 평장(平章의 僞職) 毛居敬이 자칭 4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압록강의 얼음을 건너와 義州를 함락시키고, 副使 朱永世와 의주 주민 친여 명을 살해하였으며, 그 다음 날에는 靜州(지금의 義州부근)를 함락시키고 도지휘사 김원봉을 죽이고 麟州를 함락시켰다.583) 당시 고려는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여 고심하고 있었는데, 홍건적의 침입까지 받게 되었으므로 중대한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은 다시 守門下侍中 李嵒을 西北面都元帥로, 慶千興을 副元帥로 金得培를 都指揮使로, 李春富를 西京尹으로, 李仁任을 西京存撫使로 임명하였다. 이 때 적이 鐵州에 쳐들어 왔으므로 安祐와 李芳實이 격퇴하였다. 퇴각된 적들은 麟州와 靜州에 주둔하다가 을해일에 다시 철주에 침입하여 그 부근 현들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다. 안우가 청천강에서 적과 만나 격파하였으나 다시 싸워서 패전하고 定州에 후퇴하여 주둔하였다. 이런 상황을 보고 받고 구원에 나선 이암이 기묘일에 서경에 이르렀는데 여러 군대가 아직 집합하지 않았으므로 黃州까지 후퇴하여 주둔하였다. 이처럼 밀어닥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국내의 인심은 매우 불안하였으며 서울에서는 피난할 계획을 세우고 앞을 다투어 곡식으로 물품을 사들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니 물품값이 올라 전에는 베 1필에 쌀 2말이었던 것이, 이 때는 곡식값이 떨어지고 물품값이 올라서 베 한 필에 5∼6말까지 이르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서북면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각 기관의 하급서리들을 징용하여 서북면의 전투인원을 보충하였으나 적을 막기에는 어려웠고 이달 말 적은 서경을 함락시켰다. 고려 조정에서는 호부상서 朱思忠을 적의 진영에 파견하여 적장에게 가는 베와 말안장, 굴레 그리고 술과 고기를 주면서 적의 虛實을 탐지케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주사충이 적의 글을 가지고 돌아 왔는데 그 내용이 대단히 거만하였다. 이 때에 왕은 피난책을 강구하였으며 漢陽遷都도 논의되었다.584)
한편 적에 의하여 함락된 서경을 탈환하고자 여러 부대가 生陽驛에 모였는데 그 수가 2만 명이었다. 적은 이것을 보고 우리 군대의 진격이 있을 것을 알고 사로잡은 의주와 정주 그리고 서경인을 죽였는데 그 수는 만 명을 헤아렸으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이런 상황 아래 점차 전세가 고려측에 유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정월 정미일에 고려군은 마침내 서경 탈환작전을 감행하여 적군을 내몰아 龍岡과 咸從으로 물러가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고려군은 천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고려 조정은 홍건적의 완전격퇴를 위하여 전세를 가다듬고 군대를 정비하여 안우를 安州軍民萬戶府 都萬戶로, 이방실을 上萬戶로, 金於珍을 副萬戶로 임명하였다.585)
다음달 2월 안우가 이끄는 군대가 함종으로 진격하였으나 미처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적의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그러나 고려군은 곧 진용을 정비하여 함종에서 싸워 적 2만여 명을 사살하고 적장 沈刺와 黃志善을 사로잡고 나머지 적 만여 명을 甑山縣으로 퇴각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고려군은 判開城府事 辛富와 將軍 李堅이 전사하였다. 한편 이방실이 퇴각하는 적을 정병 1천 騎를 거느리고 계속 추격하여 延州(雲山)江에 이르렀을 때, 안우와 김득배도 합세하여 추격하니 적은 크게 위축되어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빠져 죽는 자가 수천에 달하였다. 달아나는 적을 안우와 이방실이 다시 추격하여 옛선주에 이르러 적 수백 명을 무찌르니 남은 적의 무리 3백여 명이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586)
이와 같이 1차로 침입한 홍건적은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여 물러갔는데 3∼4월에는 간헐적으로 西海道지방에 나타나 노략질하기도 하였다.587)
583) | ≪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8년 12월 정묘·무진. |
---|---|
584) | ≪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9년 정월. 왕은 어사대에 명령하여 조정의 모든 관원을 모아 놓고, 무기·시종인원·양곡·鞍馬 및 馬草를 갖추어 수십 일간 毬庭을 경비케 하였다. 또 왕과 노국공주가 밤에 후원에 나가 말타는 연습을 하였는데 이 모두가 적을 피해 행차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
585) | ≪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9년 정월 을묘. |
586) | ≪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9년 2월 계유. |
587) | ≪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9년 3월 기유일 조에 의하면, 홍건적의 배 70척이 西海道 豊州 碧達浦에 정박하였으며, 또 서경의 德島와 席島에 정박하였다. 그리고 鳳州에 들어가 성문에 불을 질렀고, 100여 척의 배가 安岳郡 元堂浦에 들어가서 金錢과 양곡을 약탈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黃洲의 琵琶浦에도 침입하였는데, 4월 초하루에는 황주 鐵和浦에 침입하니 牧使 閔珝가 대항하여 20여 명을 무찌르고 1명을 생포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