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13세기 후반 이후-쇠퇴기
원종과 충렬왕에 의해 다스려지던 13세기 후반은 격동기로 100여 년간의 무신정권(1170∼1270)이 붕괴되고 몽고와의 화의가 성립하여, 그에 반대하는 三別抄에 의해 원종 11년부터 14년까지 항쟁이 계속된다. 그 이후 몽고의 간섭하에 들어간 고려는 원종 15년(1274)과 충렬왕 7년(1281) 일본원정에 참여한다. 그리고 충렬왕 원년부터는 원의 강요에 따라 전반적인 중앙관제의 개정을 보게 되고 그 이후 원의 경제적 수탈과 몽고식의 습속·언어가 유행하게 된다. 원의 세력에 배경을 둔 권문세족에 의한 고려의 신지배층의 성장은 고려도자에 있어서 원대 도자의 기형·문양이 반영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기에 기준이 되는 도자자료는 고종 44년(1257)에 죽은 최항의 묘지와 함께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靑瓷陽刻蓮瓣紋銅彩瓢形주전자(호암미술관 소장,<사진 3>)와,≪고려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畵金靑瓷에 관한 자료이다. 이 청자주전자는 표주박모양의 몸통에 외면은 연꽃잎을 양각하였고, 동자와 연줄기를 중간에 부착시켰으며 연꽃잎에 붉은 銅彩를 설채하였다. 그리고 점토가 섞인 耐火土받침으로 받쳐 구운 것으로 기벽이 두껍다. 이 주전자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종 44년경까지도 상형의 주전자가 적정한 비례로 만들어졌고, 동채를 설채한 구체적인 예이며, 그리고 유색은 녹색이 짙게 시유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화금청자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 仁規가 일찍이 畵金磁器를 (황제께) 바친 일이 있었다. 世祖가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릇이 견고해지라고 하는 것인가”를 물었다. 조인규가 “다만 채색하는 것 뿐입니다”라고 답하였다. 또 “그 금을 다시 쓸 수 있느냐”라고 묻자, “자기란 것은 쉽게 깨어지므로 금도 역시 그에 따라서 파괴되고 맙니다. 어찌 다시 쓸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세조가 그 대답을 좋게 여겨 지금부터는 자기에 금으로 그림을 그리지 말고 진헌하지 말라고 명하였다(≪高麗史≫권 105, 列傳 18, 趙仁規).
② 郎將 黃瑞를 元에 보내어 金畵甕器·野雉와 耽羅의 소고기를 바쳤다(≪高麗史≫ 권 31, 世家 31, 충렬왕 23년 정월 임오).
①②의 기록으로 보아 조인규가 원의 세조를 만난 것으로 추정되는 충렬왕 15년(1289)부터 충렬왕 23년 사이에 화금자기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부합되는 화금자기로는 개성 만월대 궁터에서 발견된 靑瓷象嵌猿兎紋畵金扁壺(<사진 4>)와 靑瓷象嵌牡丹唐草紋畵金대접을 들 수 있다.
이 화금청자편호는 마름모꼴의 문양대를 구획한 것과 편호의 형태 그리고 양쪽 옆면에 해바라기꽃 모양의 寶相唐草紋의 등장과, 담청색으로 바뀌고 있는 유색, 두꺼워진 기벽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예로 보아 1290년대를 전후로 하여 원대 도자의 기형과 문양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특히 충렬왕은 사치와 유락을 좋아하던 왕으로서 화금청자 등 특이한 도자가 많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충선왕·충숙왕에 의해 다스려지던 14세기 전반은 원나라 세력에 배경을 둔 권문세족에 의해 이끌어지던 시기였다. 무신정권이 붕괴된 후 대두한 이들은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으로서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는 대토지소유자였다. 또한 이 시기에 고려와 원과의 긴밀한 관계는 왕실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원의 법속·의복·변발·혼인 등을 통해 깊어졌으며, 성리학이 수용되고 새로운 불교(라마교)가 받아들여진다. 귀족들의 불교신앙의 한 형태로서 이 시기에 뛰어난 高麗佛畵가 제작되고 寫經이 성행하여 널리 알려진 대로 오늘날 국내외에 많은 예가 남아 있다.0708) 이처럼 권문세족에 의해 고려불화의 제작과 사경이 성행하는 화려한 일면을 간직한 이 시기에 고려도자에도 원나라 도자의 기형과 문양이 널리 반영되기 시작한다. 원의 靑華白瓷에 흔히 보이는 쌍봉문·보상당초문·파도문·용문·어문 등이 고려청자에 나타나며,0709) 吉州窯産도자에 보이는 굵은 음각선으로 간결한 문양을 나타낸 후 鐵釉가 시유되는 철유자기 등이 제작된다.
이 시기 도자의 모습을 보면, 기형에서는 梅甁이 줄어들고 측면이 편평한 廣口壺 등이 많이 만들어지며, 대접은 저부가 깊어지고 각이 진 조그만 접시류들이 많아지며, 口部가 내만된 기형이 많아진다. 기벽은 두꺼워지고 유색은 담청색·회청색계로 바뀌고 있다. 상감의 무늬는 산만한 구도로 되거나 필치가 조잡해지고, 같은 문양의 반복 사용으로 도안화되기 시작하여, 종속되는 문양에는 이미 印花技法으로 문양을 시문하는 방법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다. 포류수금문·운학문·여지문·국화문 등이 그대로 쓰이고 있으나 간략해지고 운학문의 경우 雨點紋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굽다리는 두껍고 굽 안바닥에 규석받침이나 모래받침으로 받쳐 구워진다.
이 시기로 추정되는 干支의 명문이 있는 대접·접시의 예를 보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靑瓷象嵌蒲柳水禽紋「己巳」銘대접은 내만된 낮은 대접이다(<사진 5>). 그런데 대접 안바닥에 흑상감으로 표기하고 그 주위에 二重緣帶와 如意頭紋帶를, 내측면에는 대칭으로 연못가의 버드나무와 갈대·오리를 포치하였고, 외면에는 두 겹의 원 안에 국화를 네 곳에 배치하고, 그 외면을 당초문대로, 위아래 면에는 草紋帶와 蓮瓣紋帶를 간결하게 나타냈다. 유색은 회청색계의 청자유가 얇게 시유되었으며, 이러한 대접 외에도 안바닥이 움푹 파인 반원형의 대접, 각이 진 접시, 잔 등에 이러한 干支銘靑瓷가 나타난다. 己巳銘은 충숙왕 16년(1329), 庚午銘은 충숙왕 17년, 壬申銘은 충숙왕 복위 1년(1332), 癸酉銘은 충숙왕 복위 2년, 甲戌銘은 충숙왕 복위 3년, 壬午銘은 충혜왕 복위 3년(1342), 丁亥銘은 충목왕 3년(1347)으로 추정된다. 특히 강진 사당리요지에서 이러한 간지명의 청자가 거의 대부분 출토되었으며, 至正(1341∼1367)銘과 함께 정해명대접편이 출토되었는데 문양의 포치가 다른 간지명편과 유사하다.0710)
굽다리에는 커진 규석받침과 모래받침으로 받쳐 구워졌으며 胎土에 모래가 섞이고 거칠어진다. 문양에 있어 특이한 보상당초문이 이어져 꽉차게 채워진 壺·盒·鉢·甁 등이 보이며, 운봉문·용문·어문 등이 널리 쓰이고 있다.
공민왕·우왕으로 이어지는 14세기 후반은 전환의 시기였다. 원·명의 교체가 이루어진 이 시기에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이 대두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신흥사대부였다. 신흥사대부들은 권문세족의 정치권력 독점과 농장확대에 따른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을 시정하기 위해 개혁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지방의 鄕吏 출신이 많았으며 점차 중소지주로 성장하고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여 왕권강화를 꾀하는 공민왕 때에 그들의 개혁정치를 추진해 갔으며, 결국 신흥무인들의 협력으로 고려에 대신하여 조선왕조를 세우게 되는 것이었다. 이 시기 40여 년간에 걸친 왜구들의 극심한 침략과 홍건적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해안가 50리 안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해상의 조운이 끊겨 정부는 재정이 곤란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바닷가의 농민들은 계속된 약탈 속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모습이 이 시기의 고려도자에 반영되게 된다.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신흥사대부들의 요구에 따라 도자도 실생활에 널리 쓰여질 수 있도록 튼튼하고 실용적인 그릇의 다량생산이 필요해지기 시작한다. 신흥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그들의 생활이념으로 삼으면서 검소하고 실용적이며 합리적인 생활을 추구하게 된다. 또한 그들은 전국적인 세력분포를 보이고 있었다.
유기 대신 사기·목기를 전용하라는≪고려사≫의 기록처럼0711) 실용적 도자기의 다량생산이 요구되었다. 때마침 왜구의 침략으로 해안가에서 사람이 살 수 없고 조운을 통해 개경으로 운반되던 稅船이 왜구의 습격을 받아 조운이 막히게 되었으므로 육로를 통한 육운이 요청되던 때였다.0712) 강진·부안의 해안가에 위치해 있던 이 시기의 가마들은 왜구의 침략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들 새로운 지배세력의 요구와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필요성에 따라 전국적으로 내륙지방 곳곳에 가마가 설치되고 도자기생산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의 기반이 확대되어 나타난 것이 조선 세종 6년(1424)부터 세종 14년에 걸쳐 조사되어≪世宗實錄地理志≫에 수록된 324개소에 달하는 陶瓷所의 가마들이다.0713)
이 시기의 도자로 알려진 것은 강진 사당리요지에서 至正銘과 함께 출토된 靑瓷象嵌柳蓮紋梅甁片과 공민왕 14년(1365)에 사망한 공민왕비의 능인「正陵」銘의 청자상감대접 그리고 강원도 원주 令傳寺址三層石塔내에서 우왕 14년(1388) 洪武銘의 석판과 함께 발견된 靑瓷象嵌重圈紋대접, 金剛山 月出峰 출토의 공양왕 3년(1391) 洪武銘의 白瓷鉢·白瓷香爐 등의 자료가 있다.
135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靑磁象嵌柳蓮紋梅甁은 잘록한 모습의 홀쭉한 매병으로 구부는 外反되었고, 胴上部에는 간략해진 유문과 연화를 대칭으로 나타내고, 위 아래에는 큼직한 연판문대를 두르고 있다. 유색은 암녹색으로 변하였으며 釉面은 거칠다.0714) 이와 같은 14세기 후반의 매병은 15세기 전반 粉靑瓷梅甁의 모체가 된다.「정릉」명 청자상감대접은 간지명의 청자보다 간략해졌으며 특히 중심되는 문양으로 특이한 모란당초문을 내측면 네 곳에 포치시킨 형태로, 이후의 대접문양의 주류를 이루게 되며 이러한 모란당초문은 14세기 전반의 문양이 간략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우왕 14년의 청자상감중권문대접은 간략해진 상감문양의 대접으로 굵은 모래받침으로 받쳐 구운 것이 주목되는데, 14세기 말의 수많은 가마에서 주로 이러한 예가 발견되고 있어 그 추이를 짐작케 해준다. 백자발의 경우는, 공양왕 3년 홍무명의 것이 15세기 백자발의 원형을 보여주는데, 14세기 말에 硬質의 백자가 존재한다는 점과 담청을 머금은 白瓷釉가 거친 태토 위에 시유된 조선 초기의 백자와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는 도자에 있어 새로운 전환의 시기로, 이 때에 촉진된 도자의 실생활화는 뚜렷한 변화의 조짐이었다. 따라서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폐쇄된 강진·부안요를 대신하여 수많은 실용적인 도자를 제작하는 가마들이 전국의 내륙지방에 세워졌으며 대량생산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 15세기 전반의 세종연간에 도자가 그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324개소에 달하는 도자소는 곧 이은 조선시대 분청자·백자제작의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0708) | 安輝濬,≪韓國繪畵史≫(一志社, 1980), 75∼8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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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 中野徹,<元·明靑華白磁の文樣>(≪陶磁講座≫ 7, 雄山閣, 1973). |
0710) | 尹龍二,<干支銘 象嵌靑瓷의 製作時期에 관하여>(≪海剛陶磁美術館圖錄≫2, 1991), 114∼118쪽. |
0711) | ≪高麗史≫ 권 85, 志 3, 刑法 2. |
0712) | 羅鐘宇,<高麗末期의 麗日關係 -倭寇를 中心으로->(≪全北史學≫ 4, 1980). |
0713) | 尹龍二,<粉靑瓷窯址의 分布와 特色>(≪梨大博物館圖錄≫13 : 粉靑沙器, 1984), 112∼116쪽. |
0714) | 鄭良謨, 앞의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