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민속
1) 세시풍속
고려시대의 풍속이 형식상으로는 고구려의 유풍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신라의 지식계급이 깊숙이 자리잡아서 그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아울러 후기에는 몽고풍속의 영향을 받아 절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즉위한 해 6월에 조서를 내려 이전의 풍속을 바꾸어 모두 새롭게 할 것을 밝혔다.0919)
그러나 한편으로 궁예에 의해 만들어졌던 새 체제가 오히려 백성들을 혼란케 하였으므로 모두 신라의 제도를 따르고 그 중에서 알기 쉬운 것만을 새로운 제도에 따르도록 하여0920) 신라의 풍속과 제도가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아울러 태조의<訓要十條>에 의하면,0921) 네 번째로 언급한 내용 중 우리 동방의 문물·예악은 당의 풍속을 본받아 준수하여 왔으나 반드시 구차하게 같이하려 하지 말라며 주체성을 강조하였고, 거란의 풍속은 본받지 말도록 경계하고 있다. 6조에서 지극히 원하는 바는 燃燈과 八關에 있다 하고, 연등은 불교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하늘의 신령 및 5嶽·명산·대천과 용신을 섬기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은 고려왕조의 신앙적 구조를 말해주는 것으로 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을 알 수 있다.
平壤의 木覓과 東明神祠에 제사지내고0922) 팔관회를 통해 고구려의 국가적 제례인 東盟을 이어받아 10월 보름날 소찬을 차려 놓고 팔관재를 거행하던0923) 고려왕조는 巫俗을 숭상하였고, 산신·해신·성황신 및 집안을 지켜주는 가신도 섬겼다. 그러므로 외래인의 눈에는, 고려인들이 귀신을 두려워하여 믿고 음양에 얽매여 병이 들어도 약을 먹지 않고 부자간에도 보지 않으며 방자와 압승만을 한다고 보였을 것이다.0924) 당시 俗謠인<動動>에는 5월에 먹는 ‘수릿날 아藥’과 9월에 ‘藥이라 먹는 黃花’0925)가 노래불려져 민간약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풍속은 신라의 전래풍이 많았는데, 신분상 士農工商 중에 선비(儒)를 귀히 여겨 글을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상업의 경우는 물물교환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장사치는 멀리 나들이 하지 않고 대낮에 고을로 가서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꾸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듯하다고 한 언급에서 알 수 있다.0926)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는 경솔히 합치고 헤어지기를 쉽게 하는 것으로0927) 보였는가 하면, 연소자를 데려다가 성년이 되어 혼인시키는 豫壻의 풍속도 있었고0928) 일부다처, 축첩의 습속, 근친혼, 동성혼의 폐해도 있었다.
그러나 문물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졌고 음식을 먹을 때 俎豆를 사용하고, 서로 주고 받는데 절하고 무릎을 꿇어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족히 숭상할 만한 것이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민풍은 돈후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여성들은 항아리를 머리에 이는데 한 손으로 항아리 귀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옷을 추키며 등에 아이를 업는 모습도 요즘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라 하겠다.0929)
세시풍속은 신라의 추석(한가위)·수리·유두 등이 계속 전승되고, 중국에서 들어온 한식·백중·칠석·중양·동지 등이 정착되는 시기로 봄의 연등과 겨울의 팔관회가 고유한 세시풍속으로 자리잡았다. 고려시대의 俗節에는 元正·上元·寒食·上巳(삼짇날)·端午·重九(重陽)·冬至·八關·秋夕 등 아홉 가지가 있었으며, 愼日은 歲首·子午日·2월 초하루였다.0930)
궁중에서는 원정·동지·인일·입춘·新雪 등에 하례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0931) 인일에는 신하들에게 人勝祿牌를 내리며, 입춘 때는 春幡子를 주는데 이는 綵絹을 잘라서 만든 작은 기이다. 첫눈이 오면 하례를 하는데, 小雪이 지난 다음 大雪 전에 눈이 오면 하례하고 소설 전에 눈이 오면 괴이한 눈이라 하여 하례하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세시풍속 중 궁중풍속은 비교적 여러 기록에 의해 자세히 밝혀져 있으나 민간풍속은 부분적으로 눈에 뜨일 뿐이다. 거란과 몽고의 습속이 습합된 것도 고려시대의 특이성인데, 한때 사치풍조가 만연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朕이 선왕을 우러러 본받아 검소한 덕을 행하고자 음식을 절감하고 嗜慾을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근일 듣건대 서울과 지방의 풍속이 사치를 좋아하여 그침이 없고 음식을 먹을 때에는 음식이 여러 가지로 너무 많아서 풍속을 문란하게 한다 하니 매우 마음 아픈 일이로다(≪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원년 정월 갑인).
숙종의 교서를 통해, 고려시대 풍속에서 먹고 마시는 소비풍조와 사치풍속이 지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喪葬의 풍속이나 전반적인 면에서 경박한 풍속은 고치고자 한 노력도 보인다.
요즈음 세상의 道가 점점 나빠지고 풍속이 경박하여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없으며 혹은 어린 자식을 버리고 妻妾을 버리며 혹은 喪中에 방탕하게 놀며 부모의 유골을 임시로 절에 草殯해 놓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매장하지 않는 자가 있다. 마땅히 해당 관리로 하여금 검찰하여 벌을 주되, 만일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 자에게는 관에서 장례비를 지급하라(≪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11년 6월 을사).
고려시대는 국가적인 시책의 하나로 月令에 따라 모든 행사를 거행하도록 교지를 내렸는데 의종 22년(1168) 3월의 일이다.0932)
이같이 월령을 따르라는 명령은 음양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장차 낡은 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정하려는 의도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의종의 교지 가운데는 佛法을 존중함과 아울러 仙風을 숭상하고 이어받도록 하여 신라 이래 크게 행한 선풍을 팔관회와 연계시키고 있다. 또 월령행사는 이른바 歲時行事로서 세시풍속과 다르지 않다. 비록 궁중의 법도이기는 하여도 많은 民間俗에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향읍의 세시풍속은 궁중풍속과 형태적으로 차이를 보이나 결국 궁중속과 민간속은 상호교섭의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봄 연등, 한겨울 팔관은 궁중속이면서도 기층사회에서도 행해졌으며 오늘날은 오히려 민간속으로 침잠되어 잔존하고 있으며, 설·입춘·단오·유두·칠석·중양·동지·수세 등의 월령행사는 궁중과 민간의 풍속으로 병존하였다.
고려의 풍속은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삼국과 통일신라의 계통을 따랐으며 여기에 창의적인 면을 추가하였다. 또한 중국과 동북아시아, 이슬람 등의 외래문화적 영향을 받아 절충되는 면모를 나타냈음을 파악할 수 있는 바다. 따라서 고려시대 풍속은 궁중과 민간, 전통과 외래적 요소를 고루 견지했는데 구체적으로 세시풍속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0919) |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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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무진. |
0921) | ≪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 |
0922) | ≪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4년 하4월 을유. |
0923) | 徐 兢,≪高麗圖經≫ 권 17, 祠宇. |
0924) | 徐 兢, 위와 같음. |
0925) | ≪樂學軌範≫ 권 5, 牙拍. |
0926) | 徐 兢,≪高麗圖經≫ 권 19, 民庶. |
0927) | 徐 兢, 위와 같음. |
0928) | ≪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2년 2월 경신. |
0929) | 徐 兢,≪高麗圖經≫ 권 22, 雜俗 및 권 20, 婦人 戴. |
0930) | ≪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名禮, 禁刑 國忌. |
0931) | ≪高麗史≫권 67, 志 21, 禮 9. |
0932) | ≪高麗史≫권 18, 世家 18, 의종 22년 3월 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