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Ⅰ
조선왕조의 건국은 고려 후기 사회의 모순 속에서 새로운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사대부세력과 民의 성장 속에서 성립되었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이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그 통치체제를 정비하려 하였다. 조선 왕조의 통치체제 정비와 국정의 운영은 민본지향적인 유교사상을 기본이념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도 유교사상이 정치철학을 주도하였지만, 이 시기의 유교사상은 훈고학적인 한당유학이었고, 또 불교철학에 의하여 크게 제약을 받은 것이었다. 유교사상이 정치·제도·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온 이후였다. 조선 초기의 유교사상에서 특히 중시된 것은 왕도정치사상이었다. 王道政治란 유교로 교양된 국왕과 신료들이 유교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체제 하에서 유교적 민본사상에 근거한 덕치·인정을 베풀고, 또 유교윤리가 양반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 모두에게 생활화된 정치를 말한다. 조선 초기 건국의 주도세력은 이러한 유교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체제로 중국 三代의 이상사회를 나타낸≪周禮≫에 주목하였다. 이들은 고려 말에 들어온 성리학을 正學으로 일단 긍정하면서도≪주례≫를 모범으로 하여 새로운 국가의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주례≫의 정신에 입각하여 국가의 통치구조뿐만 아니라 경제구조·산업부문을 국가가 주도함으로써 권세가에 의한 사유와 사영을 억제하려 하였다.
조선왕조는 이와 같이 유교사상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웠는데, 유교정치의 실현은 정치기구·통치체제의 정비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국 초에는 정치적·사회적 안정이 급선무였고, 태조로서도 왕권의 강화가 우선이어서 정치기구·통치체제를 정비할 여유가 없었다. 도평의사사는 문무고관의 합좌기관이었으나 능률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문하부도 정치의 중심기관이 되지 못하였다. 즉 태조대의 정치는 강력한 왕권을 가진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조준·정도전 등 소수의 재신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유교정치의 기틀은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이후,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태종은 도평의사사를 혁파하고 의정부를 설치하였으며 사병을 혁파하여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태종 원년(1401)에는 문하부를 없애고 그 재신들은 의정부에 합하여 점차 의정부·6조 중심의 정치체제를 갖추어 갔다. 그런데 의정부·6조체제는 周代의 三公·六卿制와 같은 형태로 유신들이 이상으로 하는 체제이긴 하나 그 운영에 따라 왕권과 신권의 강약이 변화되었다. 유신들은 의정부대신들의 정치적 권한을 강화시키는 의정부서사제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보았으나,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려는 국왕은 의정부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축소·배제할 수 있는 정치체제로 6조직계제를 선택하였다.
조선시대의 유교정치는 세종대에 이르러 발전되었다. 세종대에는 지방제도와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권위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유교정치를 하고자 하였다. 특히 세종대에 유교정치가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으로는 집현전을 들 수 있다. 집현전은 세종 2년(1420)에 설치하여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고, 이를 통하여 유교정치에 필요한 의례·제도의 정리와 다양한 편찬사업을 벌여 유교정치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양성된 유학자들과 더불어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다. 또 이러한 집현전은 세종의 왕권강화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태종 이후에 계속되었던 6조직계제가 세종 18년에는 의정부서사제로 이행됨으로써 정치체제상으로도 유교정치를 펴기에 적합하게 되었다. 이처럼 세종대는 학자적 관료들이 양성되어 유교적 의례와 제도가 정리되었으며, 정치체제도 의정부서사제로 바뀐 뒤에 유교적 소양을 가진 국왕까지 나와 조선 초기 유교정치의 토대를 마련한 시기라 하겠다.
그 후에 문종·단종을 거치면서 의정부 재상들의 권력이 비정상적으로 증대되었고 왕권이 약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반발하여 무단적으로 등장한 세조는 독재적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의정부서사제를 6조직계제로 고쳤고, 공신이나 언관에게도 위압을 가하였으며 집현전도 혁파했다. 이는 관료중심 체제와 자유분방한 정치비판, 언론활동을 이상으로 추구하는 언관과 집현전 유신의 유교적 이상주의가 왕권강화에 저해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세조대의 정치는 이와 같이 유교정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강력한 집권정책을 실시하였다.
세조 이후 예종을 거쳐 왕위에 오른 성종은 신진사류를 대거 등용하여 보수 귀족화한 훈신세력을 견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등장한 신진사류와 훈신세력의 대립은 양반관료체제 내의 여러 문제와 결부되어 연산군대 이후에 네 차례의 사화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화로 유교정치는 일시 후퇴한 듯 보이지만 이를 통해 유교와 유교정치는 더욱 깊게 뿌리내리고, 조선시대의 정치·사회·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종대에는 세조대에 만들어진≪經國大典≫을 수정·반포하면서 조선 초기의 정치제도를 일단 정비하였다. 이러한≪경국대전≫의 반포는 조선 초기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경국대전≫에 나타난 조선 초기의 정치체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중앙의 지배기구는 국왕 중심의 효율적인 행정체제로 정비되었다. 먼저 태종 때에 도평의사사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켜 정치를 의논하는 의정부, 왕에 대한 언론을 맡는 사간원, 군사기밀을 장악하는 중추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으로 나누었다. 한편 행정을 맡는 6조는 정2품 아문으로 승격시키고 소관 업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하게 하여, 왕이 인사·군사·재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의 지배기구는 왕-의정부-6조-각사로 체계가 세워졌다. 6조에는 각각 3, 4개의 屬司를 두어 업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으며, 중앙 각사를 속아문으로 6조에 배속하여 각 曹의 지휘 감독을 받도록 행정체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종친부·충훈부를 두어 종실·외척·부마·공신을 예우하는 한편 그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삼가도록 하였다. 또한 의금부·승정원을 왕에게 직속시켜 왕권을 안정시켰다.
한편 조선의 관료는 누구나 관품체계 속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관품체계는 관품이 관직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자체가 하나의 기준으로도 기능하였다. 이것은 관직을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관품을 통하여 지배층의 일원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따라 중앙과 거의 동질적인 지배층이 전국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관직의 수보다 훨씬 많은 규모의 지배집단이어서 효과적으로 편제할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관품은 18품 30계로 이루어졌는데, 관품에서의 기본적인 구분선은 4품과 5품 사이로서 大夫(將軍)와 士(郎, 尉)로 그 칭호를 달리 하였다. 그리고 관직과 연관하여 정3품(통정대부) 이상을 당상관, 그 아래를 당하관이라 하였으며, 종6품을 기준으로 그 이상을 참상관, 그 아래를 참하관이라 하였다. 여기서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은 기본적으로 정치가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아 근무일수에 관계없이 왕의 명령에 의하여 승진이 되었다. 참상관과 참하관은 거관하여 승진하는 데 필요한 근무일수에 차별이 있다. 인사 발령에 있어서도 대부 이상은 왕의 교지에 의하였으며 대간의 서경이 면제된 데 비하여, 士인 郎階의 경우는 교첩의 형식으로 발령되었고 대간의 서경을 거쳐야 했다. 이는 고려시대에 모든 관원의 인사에 대간의 서경이 필요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왕의 인사에 관한 권한이 강화되면서 귀족적인 성향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지방 통치체제 역시 많은 개혁·개편의 과정을 겪었다. 고려의 다원적인 도제가 일원적인 8도체제로 개편되고 신분적·계층적인 군현 구획을 명실상부한 행정구역으로 개혁하는 과정에서 속현과 향·소·부곡·처·장 등 임내의 정리, 작은 현의 병합, 군현 명칭의 개정 등을 단행하였다. 또한 고려의 사심관제가 경재소와 유향소로 분화, 발전해 갔는가 하면, 임내의 소멸과 直村化 및 인구의 증가에 따른 자연촌의 성장과 함께 군현의 하부 구획으로 새로운 面里制가 점차 정착되어 나갔다. 또한 종래의 안렴사와 감무를 2품 이상의 관찰사와 사류 출신의 현감으로 대치하는 등 감사와 수령의 직급을 올리고 外官久任法과 部民告訴禁止法을 실시하는 등 왕권의 대행자인 외관의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종래 향읍의 실질적인 지배자 위치에 있던 향리를 점차 지방관서의 행정 사역인으로 격하시키는 등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조선 초기의 군현제 정비는 위로는 8도체제와 아래로는 면리제를 확립시켜 나갔다. 그 결과로 지방통치는 군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지방행정은 수령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읍격과 수령의 직급은 여러 단계로 구분되었으나 행정체계상으로는 모두 병렬적으로 직속상관인 감사의 관할 하에 있었다. 다만 수령이 겸대하는 군사직으로 말미암아 수령 간에 상하의 계통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의 중앙집권적 지방 통치체제가 비교적 잘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왕→감사→수령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적 계통과 경재소→유향소→면·리임으로 연결되는 사족 중심의 자치적인 향촌 지배체체 및 이들 중간에 개재한 경저리·영리·읍리의 향리 계통, 이 3자가 서로 견제 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 단행된 지방 통치체제의 정비는 이와 같이 획기적인 개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령 8도체제가 확립되었다 하더라도 감사의 임기가 남부 6도와 북쪽 양계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또 양계는 감사가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하여 감영 소재읍의 부윤을 겸임하는 데 비하여 6도감사는 單身到界하여 1년의 임기 동안 관내 군현을 늘 순력하였다. 한편 조선 초기에는 호구와 전결수에 기초한 합리적인 면리제의 개편, 군현 병합이 철저히 시행되지 못하였다.
인구와 토지의 다과, 대소를 기준으로 한 합리적인 면리제의 개편과 군현병합은 국가의 지방통치 의도와 재지세력의 이해관계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저항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즉 국가에서는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분할하여 지배한다’는 원칙 하에서 전국을 8도로 나눈 다음, 각 도를 다시 주·부·군·현으로 구획하고 군현의 경계도 越境地와 犬牙相入地를 존속시킴으로써 군현끼리 서로 견제하고 경쟁 또는 감시하는 체제를 지속하려 하였다. 또 재지세력의 이해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양계지방을 제외한 남부 6도는 각 읍마다 土姓吏民이 존재하였고, 그들은 그 읍과 휴척을 같이 해왔으므로 병합되거나 혁파된다는 것은 곧 토착적 기반을 하루아침에 상실하고 다른 읍에 귀속되어야 했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군현 병합을 방해하였다. 각 읍마다 경재소와 유향소를 구성한 토성사족과 유향품관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경저리·영리·읍리로 연결된 향리세력이 서울과 지방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군현 병합은 바로 이러한 본관세력으로부터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Ⅱ
조선 건국 이후, 군대의 징발과 통솔권이 모두 장수에게 위임되어 있던 私兵체제적인 고려 말의 군사조직은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병권의 분장과 사병적 존재가 중앙집권적 군사조직으로 개편되어 갔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군사조직 중 우선 중앙군의 실태를 보면, 여기에는 법제적인 측면에서의 10위와 갑사로 이루어진 왕실 사병으로서 의흥친군위, 그리고 각 도의 번상 시위패와 반법제적인 존재였던 궁중 숙위병력인 성중애마 등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또한 군역 역시 군제만큼이나 여러 형태로 시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왕조의 안정과 더불어 차츰 정리되어 왕권을 직접 호위하는 무반관료로서의 금군과 중앙군은 5위제, 그리고 지방군은 진관체제로 정리되었다.
왕실과 重臣의 사병적 기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중앙군에 대한 국가적 통제체제로의 전환은 건국 초기부터 시도되었다. 즉 정도전은 태조 2년(1393) 의흥삼군부를 설치하여 지금까지 사병적 성격을 띤 중앙군과 지방군을 모두 여기에 귀속시킴으로써 일원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고 명실상부한 군사체계를 확립하려 하였다. 정도전의 이러한 계획은 왕자들의 반발로 실패하였으나, 왕자의 난을 거쳐 정권을 잡은 태종은 결국 사병을 혁파함으로써 병권의 집중에 성공하였고, 군제 개혁은 이후 세조 때에 이르러 5위제의 확립으로 일단락 되었다.
중앙군의 근간이 된 5위는 의흥위·용양위·호분위·충자위·충무위로 구성되었다. 이들 5위에는 각기 조선 초기 중앙군의 13개 병종들이 편입되었고 또 전국의 지방군까지 각 위별로 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지방군은 각 지방절도사에 의하여 지휘·통제받고 있어서 지방군의 분속은 그들이 직접 변상하여 수도방어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대열 등 군사훈련에 대비하여 전국의 지방군을 거주지의 진관별로 파악하고 5위에 분속시킨 데 불과한 것이다. 즉 중앙군은 5위제로 대표된다고 하나 5위제는 하나의 훈련체제이고 실제 중앙군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앙군의 각 병종을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 초기의 5위제에 분속된 중앙군의 병종으로는 시취에 의하여 선발되는 군인(別時衛·親軍衛·甲士·破敵衛·壯勇衛·彭排·隊卒)과 시취에 의하지 않고 특전 혹은 의무병역으로 편입되는 군인(族親衛·忠義衛·忠贊衛·忠順衛·補充隊·正兵)으로 대별되었다. 이 중 중앙군의 대표적 군사력은 갑사였다. 갑사 는 처음에는 태조가 거느리던 의흥친군위의 군사를 주축으로 구성된 왕실의 사병이었다가 사병의 혁파 이후에 태종의 즉위와 더불어 복립되어 조선 초 기의 중추적 군사로서 기능하였다. 그 후에 갑사는 세종조 후반 이후 갑절로 증가하였고,≪경국대전≫에는 14,800명으로 등재되었다. 이러한 갑사의 증가는 조선의 통치체제와 권위가 안정됨에 따라 국가의 관직체계로 들어오려는 사람이 늘어나자 국가에서도 이에 부응하여 이들을 관직체계로 흡수하려는 의도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또 갑사의 증가는 갑사를 종전과 달리 지방에서 파악하게 함으로써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갑사는 士로서 5∼8품의 실직에 올라 이에 따른 과전과 녹봉을 지급 받았고, 또 군인의 경제적 상태에 따라 奉足까지 주어졌다. 이들은 시취에 따라 충원되었고, 그 응시는 양인 내에서 국가가 요구하는 신분적·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진 자에 한하였다.
갑사 다음으로 중요한 병종으로는 양인 농민의 의무군역으로서 정병이 있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가장 많은 군액을 소유한 병종이었다. 정병이란 이름은 세조 5년(1459)부터 사용된 것인데 초기에는 시위패로 불려졌다. 한편 세조 10년에는 각 지방의 영진군·수성군 등도 모두 정병으로 합속되었다. 정병은 근무 형태에 따라 중앙에 변상하는 번상정병과 각 지방의 요새지에 부방하는 유방정병으로 구분되었고, 또 말의 소유 유무에 따라 기병과 보병으로 나뉘었다. 중앙군으로서 번상기병은 향촌사회에서 부유한 사람 가운데에서 차정되었고, 입역기간 중 都試에 응하여 감사나 무반으로 진출할 수도 있었다. 즉 이 시기의 군역은 양인의 의무이지만, 관직으로 올라가는 권리이기도 하였다. 한편 번상보병은 15세기 후반부터 役卒化하였고 이후 대립·수포의 주대상으로 군역의 변화를 겪는다.
지방군제 역시 세조 때에 정비되었다. 세조 원년에는 이 때까지 북방의 익군과 남방의 영진군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군사조직을 북방의 예에 따라 군익도의 체제로 통일하였고, 이것이 2년 뒤에는 다시 진관체제로 변경되어 지방군제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진관체제는 거진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진들을 이에 속하게 하여 하나의 진관을 편성함으로써 自戰自守하는 독립적인 군사거점의 성격을 갖도록 한 것이다. 이 때에 육군만이 아니라 수군도 이러한 진관조직을 갖추었다. 조선 초기의 지방군사제도는 이 진관체제를 바탕으로 조직되었다.
먼저 각 도에는 병영과 수영을 두고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파견하여 군사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병영과 수영은 한 도에 각각 하나씩을 두고 관찰사가 병사와 수사를 겸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국방상 요지에는 병영·수영을 늘려 설치하여 따로이 전임의 병사·수사를 파견하였다. 진관체제에서 병사가 있는 곳을 主鎭이라 하였고, 그 아래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거진 등 대소의 진이 있어 병영 및 수영의 통제를 받았다. 이 때의 거진은 부윤과 목사가 각각 절제사·첨절제사를 예겸하면서 진관의 군사권을 장악하였고, 그 아래의 제진은 군수 이하의 지방관이 동첨절제사 이하의 직함을 겸하면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Ⅲ
조선 초기의 교육·과거제도는 신분제의 바탕 위에서 중앙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양성하고 선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나눌 수 있다. 관학 교육기관으로는 성균관·4부 학당(4학)·종학·잡학·향교 등이 있었으며, 사학 교육기관으로는 서재·서당·가숙 등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교육은 관학보다는 사학 교육기관이 주도하고 있었다. 국가에서는 모든 경비를 국고에서 지급하는 관학보다는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사학에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사회에서 학문에 종사하지 않으면 의무군역의 징발대상으로 전락되었고, 또 문치주의 사회에서 관료로 출세하는 길은 학문을 하는 길밖에 없었으므로 교육열은 무엇보다도 높았다. 이로써 국가에서는 적은 교육비로서 충분히 국가가 의도하는 교육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제도와 과거제도가 곧바로 연결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이렇게 학교제도와 과거제도가 일원화될 수 없었던 까닭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무엇보다 조선사회가 양반관료제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양반들은 구태여 평민들과 어울려 향교에서 공부하려 하지 않고 사학이나 자기집에서 특권적으로 공부하려 했다. 또 양반 중에서도 문벌양반이 학당과 성균관 교육 및 과거시험에 있어서 사실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별시도 실제로 서울 양반들이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시험이 가까워서야 갑자기 발표되는 시험기일을 일반인들이 쉽게 알 수도 없었거니와 안다고 해도 여러 가지 제약때문에 합격하는 데 불리하였다. 한편 국가에서도 지배 층인 양반의 요구에 못이겨 원칙대로 학교제도와 과거제도를 운영해 나갈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대체로 세종조에 정비되었다. 과거는 본래 일정한 시험을 통하여 관인을 뽑는 등용문이었다. 과거 중에 문·무과는 고급관료를 뽑는 시험이고, 잡과는 하급관료를 뽑는 시험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는 초입사로로서 중요한 관문이었다. 그러나 초입사로는 과거 이외에 문음과 천거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문음·과거 외에 유일·남반잡로·성중애마 등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남반과 성중애마가 吏職으로 떨어져 나가게 되자 천거의 성격이 강한 유일(隱逸이라고도 함)만이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있어서 문음과 과거는 초입사로로서 쌍벽을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관문이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인사관리제도는 과거제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에는 초입사의 의미가 강했던 과거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초입사에 못지 않게 超資·超職의 의미가 컸던 것이다. 이 초자·초직의 특징은 조선시대 과거의 특징을 드러내주는 법제였다. 循資法·考課法과 같은 까다로운 진급규정을 무시하고 파격적으로 고급관료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조선시대 과거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였다. 이처럼 현직관리에게 과거 응시자격을 주는 것과 그 합격자에게 더 큰 승진의 특전을 주었던 것은 조선 양반관료제의 하나의 특성이었다. 양반관료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고려시대부터 음서 제도를 두어왔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과거가 음서보다 중요하자 과거시험에까지 그들의 특권을 반영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참하관 이하에게만 과거 응시자격을 주던 것을 조선시대에는 당하관 이하로 확대시킨 것은 그 까닭이었다. 그러나 과거라는 공개경쟁이 인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전시대보다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李存熙>